대구직할시(지금은 대구광역시)가 1982년 2월 20일에 발행한 <대구의 향기- 전통과 문물> 제4 장은 '향토 문화재'이다. 향토 문화재 중 제일 앞부분이 '석조물'인데, 그 중에서도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공제비'이다.
이공제비는 이공이 제방을 쌓은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이다. 조선 정조 원년(1776년) 대구판관으로 부임해온 이서(李漵)가 사재를 들여 대구 중심부에 축제 공사를 완공함으로써 홍수 피해를 극적으로 해소한 공로를 기려 백성들이 1797년에 세웠다.
석조물 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군수 이후범선 영세불망비'이다. 고종 2년(1898년) 대구에 대홍수가 있었는데, 정조 때 대구판관 이서가 축조한 제방의 일부가 무너져 큰 난리가 벌어졌다. 이 때 대구 지방의 군수로 있던 이범선(李範善)이 군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도 큰 경비를 들여 4∼5일만에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감동한 군민들이 비각을 만들어 이공제비 옆에 나란히 세웠다. 이공제비와 이범선비는 둘 다 수재로부터 주민들을 구한 치수의 공덕을 기려 일반 백성들이 세웠다. 또한 백성들이 뒷날까지 꾸준히 비석을 관리, 보호해 왔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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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제비와 이범선비가 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는 이서공원 풍경 상동교와 대구한의대병원 사이에 있는 이서공원은 대구판관으로 있으면서 대구의 치수 관리에 큰 공을 세워 사람들의 안녕을 도모해주었던 조선시대 명관 이서를 기려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사진의 오른쪽은 현대식 조각작품 '신천의 변화'(이상일 작)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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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등장하는 석조물은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이다. 이 비는 현종 15년(1849년)부터 철종 2년(1851년)까지 대구판관으로 있던 서유교(徐有喬)의 치적을 기려 세워졌다. 서유교는 판관으로 재직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지금도 변함없이 대구의 주요 관문인 팔달교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았다.
그 이전까지는 배를 이용해야 팔달진(八達津, 현재의 팔달교 일대 나룻터)을 건너다녔는데, 서유교가 돌다리를 놓아 모두들 걸어서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함으로써 대구사람들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서, 이범선, 서유교를 기리는 비가 세워진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대구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공무원이었고, 좋은 업적을 남겼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지금의 대구시가 그들의 비를 잘 관리하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과연 이 세 비들은 '영세불망'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고 있을까.
이공제비와 이범선비는 상동교 바로 하류(대구한의대병원 바로앞)에 있고, 서유교비는 팔달교 들머리(칠곡의 노곡동 쪽)에 있다. 이공제비와 이범선비는 이서공원 안에, 한 비각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서공원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서공원은 앞산 쪽에서 상동교를 건너면 좌회전을 했을 때 바로 왼쪽에 다리와 맞붙어 예쁘게 꾸며져 있는 작은 녹지를 말한다.
이서를 기려 작은 공원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까지는 뛰어난 발상이었으나, 이서공원이라는 표시가 도로변에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얼핏 생각하면 다리 끝 지점인 공원 입구의 커다란 표지석에 '이서 공원' 네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을까 여겨지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서공원에 '이서 공원'은 없고, 그 표지석에는 초등학생들에게 구태의연한 훈화를 하는 완고한 노인네 같은 표정의 '○○게 살자'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이러고도 어떻게 '영세불망(永世不忘)'을 외람되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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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공원이 '이서공원' 표지석은 없다 선정을 실천한 대구판관으로 이름이 높아 작으나마 이서공원이라는 공간을 얻었지만, '이서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야 마땅할 자리도 빼앗긴 탓에 이곳이 이서공원이며, 이서가 누구인지를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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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교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팔달교 다리 끝에 세워져 있다는 문헌의 기록만 믿고 찾아갔지만, 생각과는 달리 네 번이나 방문해서야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상동교의 이서공원과 마찬가지로 팔달교 들머리에도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그래, 잘 해놓았구나' 싶었지만, 역시 천만의 말씀이었다.
그 표지석에도 '서유교' 이름 석자는 전혀 찾을 길이 없었고, 이공제비 찾을 때나 마찬가지로 '○○게 살자'만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서유교비는 팔달교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 구석에서 온갖 잡풀과 넝쿨에 파묻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펴도 찾아낼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서유교' 이름 석자는 영세불망은커녕 잊힌 지 이미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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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달교에도 서유교비는 보이지 않고 팔달교에 다리를 처음 놓아 대구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었던 조선 시대 대구판관 서유교를 기리는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이름을 지녔지만, 팔달교 다리 아래 후미진 구석에서 잡풀더미에 파묻힌 채 잊혀져가고 있다. 팔달교 입구의 어마어마한 표지석은 서유교 개인이나 선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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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치가 저급한 지역감정적 투표행위에 찌든 지 오래되어, 선정(善政)을 하든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를 하든, 혹세무민(惑世誣民)을 하든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인고(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를 하든 특정 정당의 간판만 달면 '누워서 떡먹기'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그 결과 정치인들이 유권자인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선정비 홀대 태도는 그들에게 선정 실천 의지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과거의 훌륭한 목민관에 대해 입으로만 영세불망을 부르짖는다면 우리의 공동체적 미래는 희망이 없다.
선정비를 드러나게 세우는 것이 안하무인격 패거리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책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날의 정치인들을 줄기차게 재평가하자. 훌륭한 정치를 한 분은 계속 영광을 드러내고, 그 반대인 자는 끊임없이 매질하자. 이공제비와 이범선비를 상동교 입구로 옮기고, 서유교비 역시 위로 올려 잘 보이는 곳에 놓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게 하면 선정을 실천한 정치인과 공무원을 기리는 기풍의 진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선정비를 대도로에 줄지어 세우거나 큰 다리 난간에 보기좋게 도열하면 그것만으로 멋진 관광 요인이 된다. 520m 남짓한 다리에 사람만 다니고, 난간 좌우로 30개의 바로크식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프라하의 카를교를 연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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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표 바로세워야 역사유적, 문화유산, 종교시설, 체육공원 등 관광지 성격의 장소를 안내하는 이정표는, 팔공산의 것(오른쪽 아래 사진) 것처럼, 갈색 바탕에 흰 글씨로 제작해야 한다. 그런데 천주교 성지인 관덕정과 유교 유적인 금회영각은 흰색, 교육시설인 성재서당은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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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유적 안내판 색깔 통일시켜야
조선 시대 대구시장들의 선정비가 어떤 단체의 국민계몽적 거대석에 밀려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것은 오늘날 대구정치와 행정권력을 장악한 인사들의 인식수준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몇몇 관광유적 안내판이 기본 색깔(고동색)조차 무시한 채 뒤죽박죽 세워져 있는 것은 관계자들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이다. 천주교의 주요 순교지 중 하나인 관덕정은 흰색, 대구시가 추천하는 팔공산 올레길 중의 하나인 성재서당은 빨간색, 사육신 관련 유적인 금회영각은 미색(본디 흰색이었는데 변색?) 안내판을 거리에 내놓고 있다. 대구시가 다시 세우든지, 아니면 천주교 등이 자체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영세불망'과 '순교'의 빛이 허탈하게 탈색되어 가는 듯 여겨져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