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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왼쪽) 진천동 석관묘 유적 (작은 사진, 위, 왼쪽) 노변동 고분 출토 유물 (작은 사진, 위, 오른쪽) 상동 무덤 유적 (작은 사진, 아래, 오른쪽) 화원 유원지에 남아 있는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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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면 그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오랫동안 구석기 유물을 볼 수가 없었다. <대구시사(市史)> 88쪽의 표현처럼 '(대구가) 구석기시대 이래로 인적이 없었던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내륙에 일어나는 침식과 퇴적에 의한 매몰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인지' 구석기시대 유물은 좀처럼 대구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1982년, 대구시가 <대구의 향기- 전통과 문물> 33쪽을 통해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지금부터 3000년 전쯤부터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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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파동의 바위그늘 대구 앞산 용두산성 비탈(장안사에서 용두골 입구 사이)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암음(岩陰, 바위그늘)유적. 크게 기울어진 바위 아래의 동굴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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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0일, 구석기시대부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음(岩陰, 대형 바위를 바람막이 등으로 이용한 고대인의 생활공간) 유적이 대구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수성구 파동 앞산 기슭에서 발견, 공개되었다.
대구박물관은 높이 6m, 너비 10m, 폭 5m에 이르는 이 암음 유적에서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토양층을 비롯하여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걸친 다양한 토양층을 확인하고 각종 유물을 발굴하였는데, 특히 1만년에서 100만년 이전에 조성된 최하층에서는 인공이 가해진 강자갈들을 다량 수습함으로써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는 구석기 유적일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대구박물관 측은 당시 "최하층에서 출토된 석기들이 구석기로 최종 판단된다면 대구 분지의 문화사적 상한을 구석기시대까지 대폭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파동 암음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대구에서 북구 서변동, 수성구 파동 등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인 즐문토기편이 출토된 사례만 있었다.
그 이듬해인 2001년, 대구·경북역사연구회는 <역시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 28∼29쪽을 통해 '대구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이에 대한 답도 바로 이 땅 속에 남겨진 유적과 유물의 발견으로 인해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정답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고, 이보다 더 올라가 구석기시대부터 살았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밝혔다. 파동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암음이 역사학계로부터 구석기 유물로 확실하게 공식 인정되지는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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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서 출토된 구석기 유물 2006년 월성지구 아파트 신축부지에서 구석기유물인 좀돌날 등이 출토됨으로써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약 3천년 전부터라고 보던 기존 학설 이 무너지고) 1-2만년 전부터로 보게 되었다. 사진은 당시 발굴을 담당했던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보도자료로 배포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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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인 2006년 7월 26일,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은 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의 아파트 신축부지 문화재 발굴현장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좀돌날문화기에 해당하는 2만~1만년 전의 유물로 추정되는 좀돌날(細石刃세석인, mocro-blade, 잔석기를 만들기 위해 떼어낸 아주 작은 돌조각), 좀돌날몸돌(좀돌날의 몸통돌), 격지석기(돌조각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발표했다.
1982년 대구시 발행 <대구의 향기>, 2000년 대구박물관의 파동 암음 발굴, 2001년 대구경북역사연구회 발간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 2006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의 월성동 유적 발굴에 나타난 기술과 발표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학계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대구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연대는 계속 앞당겨지고 있다. 그러나 대구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 대구시청 홈페이지, 대구시청이 발간한 <2009 시정 현황> 세 곳의 공식 기록을 찾아본 결과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점을 '1만년 이전부터', '2만년 전부터', '2~ 1만년 전부터'로 각각 서로 다르게 밝히고 있어 혼란스럽다.
대구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만년 이전부터이다. '대구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달서구 월성동에서 좀돌날석기가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는 이미 1만년 이전에 대구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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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만년 이전부터 대구박물관 전시실 내부에걸려 있는 안내문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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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구시청 홈페이지와 대구박물관 홈페이지는 2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대구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고장 대구는 (중략) 최근 월성동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석기가 발견되어 대략 2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우리 지역에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추정됩니다.(대구시청)' '2006년 대구 월성동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어 대구·경북에서 인간의 거주는 2만년 이전으로 추정된다.(대구박물관)'
그런가 하면, 대구시청이 발간한 <2009 시정 현황>은 이 둘을 섞어놓고 있다. '우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달서구 월성동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좀돌날석기가 포함된 유적이 확인되어 대략 2만~ 1만 년 전부터로 추정됩니다. 신석기시대에는 북구 서변동, 중구 대봉동, 수성구 상동 등 중·소 하천의 충적지대나 자연대지가 주된 활동 무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작게 전시되고, 안내판도 없는 대구 구석기 유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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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박물관 눈이 내린 날, 국립 대구박물관 본관 정문 앞 정도사터 5층석탑(고려시대)이 쓸쓸하게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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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달서구 월성동)에서 사상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이 출토돼 (중략) 한국의 선사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연합뉴스, 2006년 7월 26일)'으로 기대를 모았던 월성동의 구석기 유물은 대구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대구시립이 아니라 국립인 대구박물관은 수성구 황금동에 있다. 박물관 바로 맞은편이 경북고등학교이다. 하지만 대구에 사람들이 구석기시대부터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언해주는 월성동 유물은, 기대와는 달리 박물관 안에 아주 미미하게 전시되어 있다. 유심히 눈여겨 살피지 않으면 그것이 전시되어 있는지 그 여부조차도 알기 어려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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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월성동에서 출토된 구석기 유물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대구 월성동 출토 구석기 유물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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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 암음은 어떨는지? 용두산성 끝자락인 고산골 입구에서 청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강변 도로를 따라가다가 장안사 입구를 지나면 멈출 준비를 해야 한다. 구비를 돌면 지산동에서 산을 뚫고 넘어와 파동 창공을 덮은 다음 앞산 허리를 꿰뚫고 지나갈 고가도로가 터널 공사를 앞두고 하늘에 시퍼렇게 걸쳐져 있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 오른쪽이 구석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바위그늘이다. 차는 신호등 지나 오른편의 공사장 앞에 등산객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주차장에 세워둔 채 산비탈을 따라 도로의 인도를 잠깐 되돌아 걸으면 바위그늘 앞에 닿는다. (버스를 타고 온 방문객은 대자연 1차 아파트 맞은편에서 하차하여 50m 정도 걸어서 신천의 보를 건너면 강변도로의 신호등을 만나게 되고,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금세 바위그늘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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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동 바위그늘 (왼쪽) 동굴 안에서 밖으로 내다본 파동 풍경. 멀리 보이는 산을 뜷고 터널이 생겨 지산동으로 고가도로가 이어질 예정이다. (오른쪽 위) 버스를 타고와 대자연1차APT에서 내려 신천의 보를 건너면서 바라보는 구석기 암음 방향 풍경. 겹쳐보이는 산들은 앞산 자락으로 용두산성의 흔적이며, 암음은 하얀 차가 지나는 지점에 있다. (오른쪽 아래) 암음이 있는 거대바위의 윗부분은 세월의 무게를 나타내는 듯 거뭇거뭇한 얼룩이 가득하여 자못 고풍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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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위그늘 앞에는 이정표도 안내판도 없다. 출발 이전에 실물 사진을 유심히 보고 온 사람은 윗부분이 돌출되어 있고 그 아래로 동굴이 보이는 커다란 바위절벽과 마주치면 대뜸 그것이 파동 암음인 줄 알아챌 수 있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방문객은 일순 당혹감을 느낄 여지도 있다. 게다가 암음은 그리로 접근하는 길도 없어서 인도 난간을 타넘고서야 가볼 수 있다. 국립박물관이 발굴까지 한 중요한 역사유적을 이처럼 방치해둔 채 대구시는 그 일대에서 환경파괴 논란이 극심한 터널공사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루 빨리 주위를 정돈하고 작은 안내판이라도 세워 이 바위그늘이 역사유적다운 면모를 갖추도록 해야 조상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다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글픈 안타까움을 잠시 접어둔 채 장엄한 바위그늘을 살펴보노라니 아득한 세월을 넘어온 이 선사유적은 자못 보는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경사가 심한 거대바위 아래 동굴 안팎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살았을 선사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저절로 눈에 선하다. 세월의 이끼에 겨워 거뭇거뭇 얼룩까지 생겨난 웅장한 바위 아래로 걸어가, 움푹 안으로 파여 옛사람들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었을 굴 안으로 들어가 본다.
굴 안에서 돌아서면 신천 상류 너머로 파동 마을이 보인다. 옛사람들은 여기서 물고기도 잡아먹고 신천 건너가 농사도 지었으리라. 그 때는 아직 청동기로 만든 무서운 무기도 없었으니 약탈과 살육과 방화를 만날 일도 없었을 터, 평화와 고요가 신천 가득 넘치는 청정수를 따라 맑고 아름답게 흘렀으리. 분단과 지역감정의 수렁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채로 역사와 문화유산에도 무심할 뿐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한심한 후손들이 시속 100km도 넘게 쌩쌩 바람소리를 내며 차를 달려 집 앞을 이토록 소란스럽게 할 줄은, 그들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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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파동 바위그늘 주위 전경 강변도로에서 철책을 타넘고서야 접근할 수 있다. 주위에 아무런 안내판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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