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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주를 만드는 모감주나무 대구 동구 내곡동에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모감주나무 군락이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어떤 모감주나무는 수령, 높이, 굵기가 대구의 것보다 못한데도(대구시 홈페이지의 주장) 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았다고 한다. 천연기념물을 지정하는 중앙기관의 잘못인지, 대구시의 무사안일 탓인지, 어느 한쪽은 문제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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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방에서는 구석기 문화의 정황처럼 신석기 문화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구석기 시대 이래로 인적이 없었던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내륙에 일어나는 침식과 퇴적에 의한 매몰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는 처지이다. -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시사> 88쪽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한국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유물이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일제는 1935년 함경북도 온성 강안리에서 갱신세에 속하는 동물 화석과 석기 따위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이 유물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거치며 조사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 곳에 철도를 놓다가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 이이화 <이야기 한국사> 제1 권 67쪽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을 체계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대구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에게 '2011년은 대구 방문의 해'라는 사실을 널리 홍보하려는 목적에서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하고자 한다. 함부로 미화하고 과장해서는 안 되며, 결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쳐서도 안 된다! 증거물이 남아 있지 않으면 전설로 인정될 수 없고, 유물이 없으면 역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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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최고의 쾌적한 생활 환경의 대구 지상철 공사를 하면서 가림막을 펼쳐놓았는데, 거기에 커다랗게 적힌 정치홍보성 구호이다. 물론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약(空約) 수준의 홍보는 오히려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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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에 대해 알아보려고 여러 전문서적을 탐독하고 현장의 공식 안내문을 읽었는데, 뜻밖에도 놀라운 경향성을 발견하였다. 동구 내곡동의 모감주나무에 대한 현장 안내판의 해설과, 대구시청 홈페이지 중 문화체육관광국 홈피의 안내문을 예로 들어보자.
[현장 안내판] 모감주나무는 중국․일본․대만 등지에 분포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절 주위에 많이 심는다. 나무는 높이 9-10m까지 자라고, 노란꽃이 6-7월에 피며, 열매는 과리 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잎과 꽃은 약용으로, 종자는 염주알 모양으로 단단하고 둥글며 윤기가 있어 염주 및 비누미용으로 이용된다. 이 나무는 그 희귀성으로 인해 보존할 가치가 인정되어 충남 안면도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이 1962년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된 바 있다. 경북 안동에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모감주나무도 경상북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이곳의 모감주군락은 약 35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4그루와 5~10년생 약 100그루 정도가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의 4그루의 모감주나무는 이미 지정된 것들보다 수령이 오래되었고, 나무 둘레도 31~45㎝로 크며, 높이도 8~10m 웅장하다.
[대구시청 홈페이지] 모감주나무는 중국·대만·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와 강원도 이남에서 자라고 있다. 여름에 노란 꽃이 피고 열매는 콩알보다 약간 큰데, 열매가 둥글고 검으며 윤기가 있어 염주를 만드는 데 쓰인다. 스님들은 이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에 염주나무 또는 보리수라 부른다. 내곡 모감주나무군락은 다른 지역의 모감주나무보다 둘레나 나이면에서 훨씬 크고 오래되었으며, 나무의 보호측면이나 희귀수종보호 및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두 안내문에 따르면, 안면도의 모감주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은 것은 1962년이고, 안동의 것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1984년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은 것은 벌써 48년이나 지난 정말 옛날의 일이다.
그런데 안내문은 대구의 모감주나무는 그 나무보다 수령도 더 오래되었고, 키도 더 크고, 둘레도 더 굵은데 아직도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지역의 나무에 대한 잘못된 과장인지, 아니면 대구시가 문화유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공적 해설이 이래서야 어찌 공들여 현장을 찾은 방문객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인가.
원효, 설총, 김유신이 '대구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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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은 어디 사람인가 삼국사기는 김유신을 서울(경주)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구의 어떤 전문가들은 그를 대구사람이라고 강변한다. 원효, 설총, 김유신 등을 대구사람이라고 강변하는 주장은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까? 근거 없는 주장, 유적 없는 단정은 역사에서 금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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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낳은 인물에 대한 어떤 책의 주장은 더 큰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 책은 원효, 설총, 김유신, 이렇게 3인을 '대구의 인물' 맨 앞에 배치하고 있다. 문득 <삼국사기> 열전이 떠오른다. '김유신은 서울 사람(王京人)이다.' 김유신 열전의 첫 문장이다. 김유신은 충북 진천(당시명은 만노군)에서 태어나 13세까지 그곳에서 살지만 <삼국사기>는 그를 만노군인(萬弩郡人)이라 하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왕족의 경우에는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 식으로 표현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소나는 백성군 사산인', '죽죽은 대야주인' 식으로 본인이 거주하며 활동한 지역명을 붙여 어디 사람이라고 지정한다. 김유신과 관련되는 유적(태실)이 진천군 태봉산 정상에 지금도 엄연히 남아 있지만, 아무도 그를 두고 충북 사람이라거나 진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원효, 설총, 김유신이 '대구의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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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자유당 때 야당도시였다 그러므로 대구시민들은 강직하다? 20년도 더 전에는 야당도시였지만 그 이후로는 줄곧 여당도시였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그렇게 강변을 펼치면 그의 주장은 심한 오류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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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직할시가 1982년 2월 20일에 발행한 <대구의 향기- 전통과 문물>은 '대구의 도시적 특성'으로 '1. 분지성 지형도시(盆地性 地形都市)이다', '2. 내륙도시(內陸都市)의 성격이 강하다' 등 모두 11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중 마지막이 '11. 주민의 기질이 강직 순후(剛直醇厚)하다'이다. 본문을 읽어보자.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은 팔도인심을 설명하며 영남인을 태산준령(泰山峻嶺)이라 했는데, 준령과도 같은 당당한 기상, 꿋꿋한 절개가 대구사람 기질이다. 이러한 기질은 자유당 때의 야도(野都)로 나타나는 등 여러 차례 선거에도 찾아볼 수 있다.(하략)'
1982년이면 자유당 정권이 끝나고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에 견주자면 두 번이나 강산이 변한 그 뒷날이다. 자유당 정권만 끝난 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장기 독재를 펼친 박정희 정권도 비참하게 막을 내린 뒤의 시점이다. 그런데도 자유당 정권 시절의 선거 이야기를 거론하며 그것으로 '대구 사람들의 기질이 강직 순후하다'고 자평을 해서야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맞이한 뒤의 20년 세월 동안 대구 지역의 선거 상황이 어떠했는지 그것을 두고 논리를 펼쳐야 마땅하지 않을까.
내곡동의 모감주나무처럼 실체가 분명한 문화유산의 경우에는 그 근거를 확실히 갖춘 후(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은 후) 그 군락이 우리나라 최고의 염주 생산 근거지라고 홍보하는 것이 좋겠다. 김유신이 대구사람이라는 식의 근거 없는 아전인수격 자화자찬을 펼치거나, 20년 전에는 야도였지만 그 이후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하가 다 아는데 애써 뒷날의 사실은 외면한 채 오류에 가득찬 주장을 강변해서는 관광객을 설득할 수 없다. 과장과 오류가 없는 해설, 근거와 유적이 분명한 홍보를 통해 2011년을 진정한 대구 방문의 해로 만들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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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최초의 시비(詩碑)인 상화시비, 대구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시비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항일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비이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공원의 기초가 된 달성(達城)은 광주 풍납리 토성과 더불어 남한에 남아 있는 토성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유적인 까닭에 국가 사적 62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공원 내에는 최제우 동상도 있고, 동물원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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