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그 많던 고인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11/01/06-

思美 2011. 7. 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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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고인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⑦역사유적·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⑦
정만진 (daeguedu) 기자
▲ 국가사적 진천동 유적지 아이들이 고인돌에 새겨진 선사시대 그림들을 탁본도 직접 해볼 수 있도록 모형 입석까지 세워둔 진천동 유적지. 국가사적으로 지정될 만큼 소중한 곳이다.
ⓒ 정만진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의 수는 대략 6만여 기이다. 남한에만 2만9510기의 고인돌이 있고(1999년 문화재청과 서울대박물관 공동 발간 <한국지석묘유적종합조사연구>), 북한에도 2만 안팎의 고인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로 아주 유명하다. 특히 2천여 기가 밀집되어 있는 고창의 고인돌 군집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에 대한 발굴 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된 때는 1927년으로, 대구 '대봉동 고인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만큼 대구에 고인돌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방 이전만 해도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라 불렸다. <대구시사(市史)> 102쪽의 "대구 분지를 흐르는 신천의 유역에 분포한 지석묘군은 일찍부터 알려졌고, 남방식 지석묘 묘제의 대표적 유적으로 유명하다. 이 지석묘군은 192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옛 대구읍성 바깥에 분포해 장관을 이루었다"라는 대목은 결코 허장성세가 아니다.

 

대구시가 펴낸 <대구의 향기> 35쪽에 나오는 "대구에는 굉장히 많은 지석묘가 있었다. (중략) 대구역 부근에서 달성공원에 이르는 사이에 지석묘가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화원에 이르는 도로 부근에 2km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 이르는 사이에 있었으며, 신천 너머 수성들에도 남북으로 1km에 걸쳐 늘어서 있었다"라는 표현 역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출구의 칠성바위 바위마다 사람의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특이한 유적이다.
ⓒ 정만진
 

그러나 지금 대구 시내에서 제대로 된 고인돌을 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대구의 향기>에서 "시가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대부분의 지석묘가 없어지고 말았다"라는 대목을 보는 마음은 바늘에 찔린 듯이 아프다. <대구시사>에 나오는 "(대구의 그 많던 고인돌들이)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를 읽는 눈에는 저절로 물기가 감돈다. 도대체 그 많던 고인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식민지 시대 이 땅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기네 정원을 꾸미는 데에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함부로 가져다 썼다. 그 일을 두고 <대구시사> 103쪽은 "1927년 첫 지석묘 발굴 조사가 있었을 때에는 이미 상당수의 지석묘 상석이 일본인들의 정원석으로 많이 이용되어 원위치에서 이동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는 광복 전까지만 해도 거석 유적들이 도심 곳곳에 즐비해 '고인돌의 도시'라고 불렸다(<영남일보> 2010년 10월 9일, 박진관 기자)"는 지적을 보면, 허망하게 사라져간 대구 지역 고인돌들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없앴다고 보아야 한다. <대구시사>가 "(일본인들의 행위) 후에도 시가지의 확장으로 상석의 대부분이 제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구 시역의 확장으로 진천천 유역, 욱수천 유역, 율하천 유역의 반야월 지역 지석묘군마저 최근의 갑작스러운 경제성장에 따르는 대규모 공단지 조성, 시가지 확장 등 국토개발로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면서 우리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것은 겸허하고 옳은 역사가의 자세이다.

 

신천 유역인 파동, 상동, 중동, 이천동과 진천천 유역인 상인동, 월성동, 진천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대구의 그 많던 고인돌들이 우리의 몰역사적인 개발 일변도 의식 때문에 무참하게 훼손되고 만 것이다. 고창보다도 더 많아 무려 3천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는 대구, 만약 지금도 그것들이 제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볼 게 없다'는 대구의 오명은 정말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고인돌 상석 설치는 이렇게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안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 상석 설치' 장면 재현도
ⓒ 정만진
 

대구에서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학습을 하려면 대구박물관, 경북대박물관, 계명대 행소박물관 등을 찾아야 한다. 특히 고인돌처럼 야외에 그냥 남아 있을 수 없어 저절로 유리 상자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신석기와 청동기 유물들은 박물관이 아니고서는 볼 수가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고인돌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그들은 아직도 들판에 유유히 남아 있다. 박물관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있는 신석기, 청동기 유물들은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는이에게 곱다이 느낄 수 있게 해주지 못하지만 비바람과 눈발에 주저없이 젖어 있는 고인돌들은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은 본디 자리에 고이 남아 뒷날의 후손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은 듯하다.

 

대구에서 찾기 쉽고, 안내판 설치 등 정비가 잘 되어 있는 고인돌 유적은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방향 출구에 있는 칠성바위 유적지, 상동 정화팔레스 바로 뒤에 있는 상동 유적지, 대구교도소 담장 바로 아래와 화장사 안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화원 천내리 유적지 등을 들 수 있다. 그 이외에 시지 보성아파트 단지 내, 수성유원지와 안상규벌꿀 중간 지점, 냉천 제일교회 뒤의 밭, 대구박물관 건물 뒤 유적공원 등에서도 고인돌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적으로 단연 압권은 국가사적 411호로 지정된 진천동 유적지가 아닌가 한다. 아이들이 고인돌에 새겨진 선사시대 그림들을 탁본까지 할 수 있게 모형 입석까지 세워두었으니 대구 지역에서 이보다 나은 고인돌 유적지를 찾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 대구교도소 담장 아래와 화장사 경내에도 고인돌이 대구교도소 담장 아래에 고인돌들이 버티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철망이 바로 교도소의 것이다. 기와 담장은 화장사라는 사찰로, 고인돌은 사찰 견애에도 여럿 있다. 교도소 담장과 고인돌 함께 바라보기, 고인돌이 있는 곳에 옛날 사찰이 지어졌다는 사실 확인 등 이곳에서는 답사교육의 가치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 정만진
 

▲ 상동 정화팔레스 뒤뜰에도 고인돌 정화여고가 범어동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우방 정화팔레스)가 들어섰다. 정화여고 운동장에 있던 고인돌 유적들도 그 와중에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발굴 현장이 두꺼운 유리판으로 잘 보호되고 있으며, 안내판을 통해 역사적 내용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 정만진
 

2011.01.06 17:56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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