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구제역 때문에 폐쇄된 국가사적 62호 달성공원 -2011/01/11-

思美 2011. 7. 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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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때문에 폐쇄된 국가사적 62호 달성공원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8)
정만진 (daeguedu) 기자
 

▲ 폐쇄된 달성공원 (위) 정문과 폐쇄된 모습 (아래) 정문 왼쪽에 있는 향토역사관 건물과 역시 폐쇄된 출입문 모습
ⓒ 정만진
 
1월 6일 이후, 아무 생각없이 습관처럼 달성공원을 찾았던 대구시민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모두 크게 놀랐다. 공원 정문 앞에 범죄 현장처럼 붉은 기운이 감도는 출입 금지 울타리가 커다랗게 둘러져 있었고,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 옆으로 들어가는 향토역사관도 출입문에 무시무시한 경고판이 붙은 채 폐쇄되어 있기는 마찬가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가축질병공고 '심각 최고단계 발령' 때문에 공원 관람을 잠정 중지한다는 설명이었다.
 
▲ 구제역 심각 '최고 단계'이므로 공원을 폐쇄합니다 출입 금지 안내판
ⓒ 정만진
 
▲ 폐쇄 안내 달성공원 정문 앞을 지키고 있는 폐쇄 안내 입간판들
ⓒ 정만진
 

물론 며칠 전인 1월 5일 아침에 신문을 유심히 읽었거나, 텔레비전 뉴스라도 놓치지 않고 본 사람이라면 달성공원이 6일부터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런 시민이라면 애당초 찬바람을 뚫고까지 달성공원을 찾아오지도 않았겠지만, 습관처럼 달성공원 앞으로 운집하는 고령의 단골손님들 중에는 모른 채 왔다가 당혹한 분들도 아마 상당수 계셨을 법하다.
 
대구 달성공원 관람이 (2011년 1월) 6일부터 전면 중단된다. (중략) 대구 시민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상징되는 달성공원이 폐장되는 것은 1969년 8월 1일 개원 이후 처음이다. (중략) 달성공원은 평상시 하루 관람객이 7천여 명에 이르고, 동절기에도 3천여 명이 꾸준히 찾는 곳이다. (<영남일보> 2011년 1월 5일, 1면)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펼친 대구시민들 중에는 '달성공원 잠정 폐쇄'라는 기사를 1면에서 보면서 정말 '마음의 고향'을 잃은 듯 허전함을 느꼈을 것이다. 공원 안에 동물원이 있어 어릴적부터 그곳을 드나들었던 대구시민들이니 폐쇄 소식에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자가용을 별로 소지하지 않았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족 나들이는 시내버스를 타고 달성공원을 찾는 것이 다반사였고, 멀리 간다 해도 팔공산 비탈 정도에서 맴돌다가 막차를 타려고 동화사 봉황문 아래 버스정류소에서 차표를 들고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을 잊지 못하는 40대 이상의 시민들은 더욱 그러할 터이다.
 
▲ 토성 동쪽 성벽 위의 관풍루에서 바라본 달성공원 내부 풍경 출입이 금지되기 이전인 작년(2010년) 12월 2일에 들어가서 찍은 사진이다.
ⓒ 정만진
 
▲ 아이들에겐 '달성공원= 동물원' 작년 12월 2일, 상당히 추운 날씨인데도 코끼리들이 바깥을 거닐며 놀고 있었다. 맹추위 때문에 공원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도 말이다. 코끼리들은 아이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혹시 기다리고 있었을까.
ⓒ 정만진
 

 
달성은 제62호 국가사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성곽의 하나로써 그 역사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달성은 대구 분지의 평평한 땅에 홀로 살짝 솟은 구릉 위에 세워졌으니 맴돌아 흐르는 하천을 원용하여 축성한 경주 월성과 성을 쌓은 기법이 같다고 보면 된다. 달성의 동쪽과 북쪽은 하천 위에 날카롭게 선 천연의 단애를 고스란히 성벽으로 활용하면 되었고, 지금 시민들이 드나드는 공원 정문에서 서쪽 방향의 완만한 경사지에는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다.
 

▲ 가파른 동쪽과 북쪽 나무들이 경사진 모습으로 자라는 것을 보면 달성의 비탈이 얼마나 가파른지를 가늠할 수 있다.
ⓒ 정만진
 

 
청동기 이래 대구 지방의 중심세력이 범처럼 웅크린 채 세력을 과시했던 이곳 달성의 규모는 동서로 약 380m, 남북으로 470m에 이르고, 성벽의 주위 둘레는 1300m, 높이는 4m 안팎 정도였다. 성벽의 아래쪽에서는 조개무지 유적(1968년 10월 발굴)과 목책(木柵) 흔적이 발견되었고, 남서쪽으로 펼쳐진 내당동 일대의 구릉에서는 삼국시대의 고분 수십 기가 있었다. 고분들은 1923년에 일부 발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지금 달성공원에 가면 일반 시민들은 토성(土城) 위에 석축(石築)을 쌓았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성벽 상층부의 큰 돌덩어리들을 찾아볼 수 있다.
 

▲ 달성토성 달성공원 안의 동쪽과 북쪽 가파른 비탈 위 산책길을 걸으면 옛날의 토성 위를 거니는 것이 된다.
ⓒ 정만진
 

우리나라 현존 토성 중 원형 가장 잘 보존돼
 
달성에 관한 기록은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261년(첨해이사금 15) 봄 2월에 '달벌성을 쌓고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달성은 대구시민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아래의 기록들은 그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달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불분명하나 5세기경으로 판단된다. <대구시사>
남한에서 현재 남아 있는 토성으로는 광주 풍납리 토성과 더불어 대구의 달성이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사적 62호로 지정 보호되어 있다. <대구의 향기>
달성토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문화재입니다. <달성공원 내 안내판>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성곽의 하나로 평가된다. <달성공원 입구 안내판>
 

 

▲ 달성토성, 대구의 자존심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토성
ⓒ 정만진
 

▲ 우리나라의 가장 이른 시기 성곽 중 한곳이 바로 대구의 달성이다. 달성공원의 안내판
ⓒ 정만진
 

 

대구에 사람들이 구석기 시대부터 살았다는 증거는 월성동 유적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고, 그 이전에는 파동 바위그늘에서 추정되었다. 신석기 유물은 서변동 발굴 등에서 확실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청동기 유적은 특히 많아서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어렵다(<대구의 향기>가 (대구에는) '청동기 유물이 많이 나온다'고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 그리고 달성(達城)은 "기원 전후경 대구 지방이 완전한 철기 시대로 들어간 후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달구벌 부족국가에 의해서 축성된 토성'으로 추정되는 뚜렷한 철기 유적이다.
 
달성공원의 현황과 역사

1596년(선조 29) 경삼감영이 설치되었던 달성은 1905년(광무 5)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원으로 조성된다. 1906년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철거될 때 경삼감영의 정문인 관풍루가 이곳으로 옮겨진다. 1963년  10월 18일, 드디어 국가사적 지정된다. 지금 형태의 달성공원으로 개원한 것은 1969년 8월 1일의 일이고, 1970년 5월 2일에는 동물원 개원, 2000년 4월 1일부터는 무료 개방으로 점점 더 시민들의 휴식터가 되었다. 그 결과 대구시 홈페이지는 달성공원을 '대구의 여러 공원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시민들과 친근한 공원'이라고 설명한다.

 

▲ 경상감영 정문이었던 관풍루 친일파 박중양 등에 의해 대구읍성이 해체될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 정만진
 

달성공원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이상화 시비가 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동상, 구한말 의정부 참찬,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옥사한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안동에서 출생하여 갑산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애국지사로서 청년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헌신한  이상룡 선생 구국기념비, 달성서씨 유허비, 서병오 선생과 서동균 선생 예술비 등도 있다.

 

달성공원에는 호랑이를 비롯 25종 90마리의 포유류, 비단잉어 등 2종 940마리의 어류, 타조 등 59종 435마리의 조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류 8종 17마리는 천연기념물이다. 뿐만 아니라 달성공원에는 나무도 많아 수목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향나무 등 60종 5,236그루의 교목류와 광나무 등 37종 23,804그루의  관목류가 정말 공원처럼 아름다운 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달성공원의 유래 (달성공원 홈페이지)

▲ 시원하게 열린 달성공원 정문 폐쇄되기 이전인 2010년 12월 2일의 모습.
ⓒ 정만진
 

대구는 신라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재위) 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옛이름은 이 달구화(達句火) 달불성 (達弗城)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 근거지에 쌓은 성곽(城廓)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점해왕(沾解王)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 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조 선조 29년(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2011.01.11 16:19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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