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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숭겸 유적지 지나 팔공산 동편으로 대구에서 갓바위로 가려면 비행장에서 팔공산 방향으로 접어든 후 파군재 삼거리를 지나게 된다.
파군재는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했던 곳으로 사진의 동상은 신숭겸 장군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파계사, 오른쪽으로 가면 동화사와 갓바위 방향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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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용연사, 유가사, 소재사 등등 대구 지역에 산재하는 대부분의 고찰들은 모두 신라 때 창건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어느 절도 본래의 건물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다.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이 1232년 몽고병의 2차 침략 때 방화로 불에 타버리는 등 호란과 임란 같은 전란 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모두 목조 건물인 까닭에 소멸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신라 고찰이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한 것은 대구만의 사정이 아니니, 그것을 다른 지역에 견줘 유난히 안타까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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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사 입구의 마애불 동화사 입구는 두 곳이다. 이 사진에서 보는 입구는 옛길을 통해 동화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이 훨씬 정취가 좋다. 사진 오른쪽에, 앞에 꽃이 놓인 비스듬한 바위가 보이는데 바로 그 바위에 신라 때 새겨진 불상이 있다. 보물 243호. (위의 사진에서 추측되는 것처럼) 노을이 질 무렵 불상 주위가 특히 아름다운 빛깔을 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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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대구 지역에 남긴 '보물'들은 모두 팔공산 안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저수지를 조성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인 무술명오작비가 신라 시대 유물로 경북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그 정도로는 팔공산 중 동화사 한 곳과도 견줄 바가 못 된다. 동화사에는 조선시대 보물인 대웅전, 사명대사와 지눌국사 진영(眞影) 등을 제외하고도 당간지주, 봉황문 바로앞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입상, 비로암의 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금당암의 동서 3층석탑 같은 신라시대 보물들이 줄줄이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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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암의 두 탑이 보물 248호이지만 봉황문(동화사 옛 입구의 보물 마애불상이 있는 바위 앞의 일주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동화사 대웅전까지 간다. 대웅전 거의 다 갔을 때 길 오른쪽에 서 있는 당간지주(역시 신라 때의 보물)를 보게 된다. 당간지주 옆에는 '금당암은 스님들의 수도공간이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요지의 경고문이 나부끼고 있다. 금당암의 동서 두 탑은 신라 때 것으로 보물 248호이지만 볼 수가 없다. (사진에는 두 탑 중 하나인 서탑만 조그맣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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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암의 3층석탑 보물 247호. 신라 때 세워졌다. 왼쪽에 반쯤 보이는 건물이 비로암 대적광전인데 안에 보물 244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비로암은 동화사 대웅전 앞에서 왼쪽으로 난 산비탈 길을 100m쯤 가면 나타나는 큰 주차장 바로 왼쪽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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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보물 중 대중들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각인된 것은 '갓바위'이다. 정식 명칭 '관봉 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에는 대부분 낯설어하지만, '갓바위'라면 모두들 친근감을 느낀다. 물론 불도들은 "갓바위 부처님"이라 높이 우러르지만, 일반 대중들은 그냥 "갓바위"라 부를 뿐이다.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불상(자체 높이 4.15m, 좌대 포함 전체 높이 5.6m)이 머리 위에 갓 모양의 거대한 넓적바위(두께 15cm, 지름 180cm)를 얹고 있으니 그만하면 '갓바위 부처님'에 틀림이 없지만, 대중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갓을 쓴 바위'라 호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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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을 기운이 완연한 갓바위 부처 보물 431호. 갓바위에 오르는 길은, 팔공산 종주를 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보통 두 갈래. 하나는 대구 방면에서, 다른 하나는 은해사 가다가 팔공산 뒤편으로 꺾어들어가 선본사 앞에서 오르는 길이다. 대구 방면에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1시간 정도 소요되며, 선본사 앞에서 오르는 길은 대체로 평이하고 시간도 대구 방면에 비해 절반만 들이면 충분하다. 대구 아닌 외지에서 와서 갓바위에 들른 뒤 다른 방문지에 또 가야 하는 경우에는 선본사 쪽에서 오르는 것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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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가 이름을 드날리게 된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연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나는,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갓바위의 남다른 신화 덕분. 고학력 시대를 살면서 첨단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조차 수능시험 잘 치게 해달라, 부자 되게 해달라, 가화만사성을 이루어 달라 식의 기복 신앙에 매달려 타종교 신자 중에도 갓바위를 찾는 이가 드물지 않다는 소문이다. 미륵불의 도래를 믿어 의심하지 않은 참된 불도들이었던 신라인들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금호강을 건너고 동화천 들판과 팔공산 계곡을 걸어 부지런히 관봉을 오른 것이야 당연한 일상사였을 터이다.
신라인들이 미륵불의 도래를 확신한 불도들이었다는 말은 그들이 눈앞의 이익 때문에 갓바위를 찾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재웅 박사가 '지금은 모두들 약사여래로 모시고 있으나 불과 20여년 전에만 해도 미륵불로 모셔졌다고 한다'고 증언하는 것처럼(대구은행 발행 <향토와 문화> 1권, 1996년) 신라 시대의 갓바위는 '빌면 당장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부처가 아니었다.
기독교의 메시아에 해당하는 미륵불은 모든 중생들을 빠짐없이 구제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상낙원의 행복을 구가하게 해줄 미래의 부처인 데 비해, 약사불은 병을 낫게 해주고 오래 살게 해줄 뿐만 아니라 돈도 벌게 해주고 잘 먹고 잘 입게 해주는 현재의 구세주이다. 신라인들이 관봉의 석불을 섬긴 것과 현대의 한국인들이 갓바위를 찾는 것은 사뭇 성격이 다른 종교 행위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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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바위 보는 방향에 따라 보이는 모습(부분)과 느낌이 다르다. 사진은 두 방향을 이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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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의 지명도가 나날이 높아진 또 다른 까닭은 이곳의 부처가 세워진 위치며 그 형상이 워낙 판이하기 때문일 듯하다. 일반적으로 불상은 사찰의 불당 내에서 금빛을 번쩍이며 고이 모셔져 있거나, 아니면 바위에 몸의 앞면만 볼록하게 새겨져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갓바위 부처는 특이하게도 해발 850m의 산봉우리 꼭대기에 저 홀로, 금빛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지니지 못한 맨 돌덩어리이면서도 온몸을 송두리째 드러낸 채 앉아 있다. 이만하면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 사람들에게 충분히 경외롭지 않았을까.
갓바위의 부처를 뵈려면 신라인들은 금호강이나 신천 강가의 자기 집을 새벽같이 떠나도 한나절 내내 걷고 올라야만 했다. 지금은 차를 이용하여 관봉 턱밑까지 당도한 다음 거기서부터 짧은 길로는 30분, 먼 길로도 1시간만에 가뿐히 불상 앞에 닿지만, 신라 시대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러나 찾아가는 길의 어려움은 오히려 신라인들을 더욱 뜨겁게 채찍했을 것이다. 북풍한설 장대장마 칠흑어둠 작열폭염, 어느 것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하는 산꼭대기에서 발가벗은 채 사시사철 묵묵히 앉아있는 부처를 찾는 길인데 어찌 그 거리를 탓했으랴. 신라인들은 틀림없이 갓바위의 남다른 위치와 형상에 뜨겁게 매혹되어 있었을 것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이 만들어진 때 |
관봉의 석불이 머리에 갓을 쓴 것이 고려 시대라면, 석조 불상 자체가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일까. 관봉석조여래좌상을 관리하는 선본사(禪本寺)는 사적을 통해 638년(선덕여왕 7)에 원광법사의 제자 의현(義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갓바위 불상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 등을 검토한 전문가들은 9세기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경상북도 홈페이지 역시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 형식화된 옷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탄력성이 배제되어 8세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화사 창건 시기에 대해서도 갓바위부처 제작과 엇비슷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8- 팔공산 자락>에 '동화사는 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중략) 832년에 심지왕사가 중창'하였다고 하지만 '심지왕사 때의 중창을 사실상 창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는 대목이 있다. |
하지만 신라인들은 '머리에 갓을 쓴 돌부처가 그것도 산꼭대기에 있으니 얼마나 신비한가' 같은 이유로 관봉을 찾지는 않았다. 갓바위부처가 머리에 갓을 쓰게 된 것이 고려 시대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즉, 신라 시대만 해도 불상의 이름은 '갓바위 부처님'이 아니었다. 갓바위가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이 관봉(冠峰)이라 불린 것이나, 갓[冠]을 쓴 봉(峰)우리에 앉[坐]아 있는 돌[石]로 만들어진[造] 약사여래(如來) 불상(像)이란 의미의 관봉석조여래좌상이란 이름이 일반화된 것은 모두 고려 시대의 일이다.
종합하면, 신라인들이 열성적으로 관봉을 오른 것과 갓을 쓴 돌부처를 보려는 호기심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에게는 관광겸 건강 증진 목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당장의 개인적 이익을 갈구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갓바위 부처를 찾은 것은 오로지 돈독한 미륵신앙 때문이었다.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꿀 미륵불의 도래를 기원해서였다. 같은 9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동화사를 찾을 때에도 신라인들의 마음은 갓바위 부처를 모시는 때와 한결같았다. 지금은 동화사가 거대 약사대불을 건립하는 등 절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지만, 본래는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미륵불을 모시는 법상종의 3대 사찰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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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는 없지만 팔공산에는 국보도 있다. 팔공산에는 국보도 있다. 흔히 제2 석굴암이라 불리는 삼존석굴과 은해사 거조암의 영산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삼존석굴과 거조암 영산전은 (대구에서 볼 때) 팔공산을 넘어가야 있다. 갓바위의 위치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경산시이지만 팔공산 넘기 이전에 있어 대구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대구에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삼존석굴과 영산전은 행정구역상으로든 대구시민들에게 느껴지는 심리적으로든 경북 군위군과 영천군의 문화유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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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를 타지인과 외국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자
갓바위의 주소가 대구광역시가 아닌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 44번지라는 사실을 거론해야겠다. 행정구역상으로 말하자면 갓바위는 대구가 가진 문화유산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관봉석조여래좌상은 팔공산 너머에 있지 않고 능선의 정상에 있다는 점 덕분에 대구 시민들의 마음 안에 '갓바위는 대구의 문화재'로 온전히 자리잡고 있다.
어디 대구 시민들뿐일까. 타지 사람들도 갓바위를 찾아 경산 시내로 가지는 않는다. 팔공산 너머에 있는 은해사와 삼존석굴은 흔히 "영천 은해사", "군위 제2 석굴암"이라 부르지만, 팔공산 능선 꼭대기에 있는 갓바위를 "경산 갓바위"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갓바위는 '2011 대구 방문의 해'를 맞아 대구가 타지인이나 외국인에게 크게 홍보할 만한 대표적 문화유산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갓바위를 대구시와 '20011 대구 방문의 해' 홈페이지에 올리고,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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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바위 가는 길 갓바위는 팔공산의 관봉 정상에 있다. 갓바위의 행정상 주소는 경산시 와촌면이다. 경산시는 해마다 '갓바위 축제'도 연다. 그러나 외지인들은 보통 대구를 거쳐 갓바위로 간다. 대구시가 갓바위의 주소지만 염두에 두고 관봉석조여래좌상을 '남의 떡' 보듯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필자가 부족한 솜씨에도 아랑곳없이 애써 지도를 그려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까닭도 그것을 증거하려는 간절한 심정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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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는 해마다 '갓바위 축제'를 열고 있지만, 접근성 때문에 관봉석조여래좌상이 '대구의 갓바위'로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도 갓바위의 행정적 소재지가 경산시라는 점에만 집착하여 관봉석조여래좌상을 경산시만의 문화재로 방관한다면 '2011 대구 방문의 해', 나아가 대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좁은 나라에서 지방자치단체끼리 이런 일도 함께하지 못하여 '약사불'이 안겨주는 눈앞의 이익마저 놓친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 '미륵불'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
갓바위는 국보는 아니다. 하지만 21세기의 현대인들이 현재의 복을 비는 원시적 신앙심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갓바위의 풍경은 보는이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단초를 던져준다. 이 시대에 어느 산꼭대기에서 이런 모습의 '현대인의 초상'을 재삼 볼 수 있겠는가. 아마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갓바위는 역사가 남긴 보물이기도 하지만, 지나간 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의 정신문화까지 아울러 증언하는 보기드문 문화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단언하건대, 갓바위를 찾는 행렬만 계속된다면 관봉석조여래좌상은 반드시 국보의 명예를 얻을 것이다. 당연히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산시는 힘을 합쳐 갓바위를 국가적 관광 명소로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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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오후, 노을이 밀려오는 무렵의 갓바위부처 관봉석조여래좌상의 오른편에서 사진을 찍으면 불상이 입체적으로 새겨진 거대한 바위 아래에 있는, 촛불이 가득 켜진 함까지 같이 찍힌다. 배경을 이루고 있는 팔공산 자락의 늦은 오후 풍광은 석조불상 앞 10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바라보는 경치인데 위의 사진에서는 합성하여 불상 바로 뒤에 넣었다. 바위와 불상이 워낙 크기 때문에 (사람이 선 채로 쳐다볼 때 전체 높이가 5.6m) 본래는 갓바위부처 위와 좌우로는 하늘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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