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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고려 시대 (사진 맨위 왼쪽) 해안현- 지금의 금호강 건너편 해안, 불로, 서변동, 공산 일대이다. 서변동 신석기 유물 출토, 불로동 고분군 등이 이 지역에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증언한다. (사진 맨위, 오른쪽) 화원현- 지금도 고분군이 남아 있다. (사진 중간, 왼쪽) 대구현-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현재의 대구 중심가 일원이다. (사진 중간, 오른쪽) 수성현- 지금의 상동, 파동 등 신천 상류 일대이다. 이 일대에는 파동암음, 상동고인돌 등 유적이 특히 많다. 사진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유리판으로 덮어놓은 위에 현대의 고층 아파트가 비친 모습이다. (사진 아래, 왼쪽) 하빈현- 낙동강을 끼고 있어 농사짓기 좋았다. 하빈이라는 이름 자체가 강가를 뜻한다. (사진 아래, 오른쪽) 팔거현- 칠곡을 포함하여 노곡산성 일원이다. 역시 강(금호강)을 끼고 있어 농사짓기 좋았다. 산성 일대에 지금도 고분이 남아 있다. 칠곡은 1981년에야 대구직할시에 편입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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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국가 전체의 두드러진 중요 지역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신라가 통일을 완성한 직후인 689년(신문왕 9)의 일이다. 신문왕은 서울을 경주에서 대구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천도는 실현되지 못했고, 그 이후 대구는 그저그런 일개 지방으로 줄곧 남고 말았다.
고려 시대 들어 대구는 신라 때보다도 오히려 못한 사정에 내몰렸다. 내내 민란과 혼란 등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대구사람들은 끝없이 어렵게 살았다. 1193년(명종 23)에 김사미와 효심이 운문(청도)와 초전(성주)에서 각각 일으킨 민란과, 1202년(신종 5)에 경주 벌초군과 영천이 사사로운 싸움을 벌였을 때, 그리고 13세기 중엽인 고종 때에 경상도까지 들이닥친 호란의 불더미 속에서 대구사람들은 무수히 죽고 다쳤다. 뿐만 아니라 우왕 원년인 1375년, 그리고 1382년, 1383년 세 차례에 걸쳐 왜구로부터도 살육과 노략질의 고통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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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서봉에서 바라본 비로봉과 동봉 몽고의 침입 때 대구사람들은 팔공산 꼭대기로 피난을 갔다. 송신탑 같은 것들이 있는 왼쪽이 비로봉, 오른쪽이 동봉이다. 이 풍경은 서봉에서 바라본 것이다. 서봉 아래에 부인사가 있고, 동봉 아래에 동화사가 있다. 산 너머에 은해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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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년의 민란과 1202년의 난리 때 부인사와 동화사의 승려들이 운문의 반군을 도와 관군과 싸웠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규보가 반도 소탕에 나선 관군을 따라 대구에 왔다가 팔공산 신령에게 반도 토벌을 기원하여 '제공산대왕문(祭公山大王文)'과 '헌마공산대왕문(獻馬公山大王文)' 등을 지은 것은 대구가 반란군의 중심 지역이었음을 증언한다. 그만큼 대구사람들의 삶이 고단하고 피폐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1232년(고종 19) 제2차 몽고의 침략 때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판본이 남김없이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거란의 침략을 막으려는 호국 불교의 기원 아래 현종 초인 1011년부터 판을 짜기 시작하여 1078년 문종 때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이지만, 몽고군의 방화와 침탈 앞에서 허망하게 전소되고 말았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국가적 문화재가 외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린 안타까운 일이지만, 호국불교를 숭상하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정신적 충격이 막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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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부인사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이 외적의 손에 불타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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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역은 몽고의 제6차 침략 때 가장 대대적이고 본격적인 침략을 당하였는데, <고려사>를 인용한 <대구시사>에 따르면 '백성의 세(勢)가 궁하여 사자(死者)는 해골을 묻지 못하며, 생자(生者)는 노예가 되어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였고, '산성과 해도(海島)에 입보(入保)한 자들을 모두 출륙(出陸)케 할 때 공산성에 입보한 백성들이 굶어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런가 하면 대구직할시편 <대구의 향기>는 5차 침입 때에도 팔공산 주봉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난을 갔던 백성들은 굶어죽은 자가 심히 많아서 늙은이와 어린이(의 시체)는 골짜기를 메웠으며,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붙잡아 매달아 두고 가는 자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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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사 터 몽고 군사들은 부인사를 모두 불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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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왕건이 견훤과 일전을 겨루다가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팔공산, 왕산, 평광동, 불로동, 반야월, 앞산 일대에 남긴 '왕건의 길'을 제외하면 대구에는 고려 시대의 유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왕건이 전쟁에서 져서 유적을 남긴 것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팔공산의 부인사가 바로 그곳이다. 부인사에는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다! 초조대장경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뜨거운 관심을 기울여보자는 말이다.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알려진다. 선덕여왕은 의자왕의 공격을 당해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나라가 곤경에 처하자 팔공산에 들어와 불공을 드렸는데, 기도 중에 도인이 나타나 지금의 부인사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대업을 완수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부인사에는 선덕여왕의 초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는 선덕묘(善德廟)가 있다.
선덕여왕은 이 절에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명복을 빌었고, 사찰 이름에 왕비를 지칭하는 부인(夫人)이 들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선덕묘는 지금 그 이름도 숭모전으로 바뀌었고, 건물도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니다. 부인사는 한때 39동의 부속암자에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던 신라 시대의 거대 고찰이지만 호란 때 모두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웅대한 역사성도 고색창연한 풍모도 모두 잃어버린 채 현대판 작은 절로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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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사 선덕묘의 자리에 지금은 숭모전의 이름을 한, 최근에 세워진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선덕여왕의 어진은 여전히 부인사에 모셔져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선덕여왕 숭모행사가 봉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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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에는 없지만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판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초조대장경이 외적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불에 타 없어지는 그 참담한 역사만은 남아 있다. 우리는 부인사에 가서 없어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정신, 소중한 것을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없어졌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스스로까지 겨레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누가 있어 면면히 내려져오는 민족정기의 끈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부인사에 가서 초조대장경이 전소되는 참상, 몽고군이 절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자. 아니, 누군가가 그것을 생생하게 재현하여 찾아오는 이들에게 보여주면 더욱 좋으리라. 부인사에 초조대장경은 없지만 그것을 만들어내었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성은 여전히 팔공산 서봉 위를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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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사의 탑 부서져 흩어져 있던 서탑의 부재들을 1964년에야 주워모아 복원하였다. 동탑은 1959년 법당 중건시 탑의 부재들이 담장의 일부로 쓰이는 바람에 복원이 불가능하여 석탑 상층 기단 일부만 살린 탓에 멀리서 보아도 색깔이 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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