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도소 육신사 인근 이전 계획 나오자
지역민들 "박근혜 전대표는 큰 정치를 하세요" 현수막 내걸어 |
대구시가 화원읍에 있는 대구교도소를 하빈면의 육신사 인근으로 옮길 계획을 구체화했다. 그러자 육신사 일대의 하빈면민들로 구성된 대구교도소유치반대추진위원회(위원장 도록수)는 작년 11월 하빈면 주민 79%의 서명을 받은 호소문을 청와대, 법무부, 대구시, 달성군에 제출하는 등 강력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빈면민들은 "반대" 목소리를 높인 현수막들을 육신사 부속건물인 숭절당 기둥에까지 내걸었다.
"박근혜 전대표는 큰 정치를 하세요."
"김범일 대구시장은 육신사를 모욕하지 마시오."
큰 정치? 육신사를 모욕하지 마시오? 육신사가 어떤 곳이기에 하빈면민들은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 육신사 인근에 교도소를 설치하는 일이 어째서 큰 정치를 포기하는 행위이고, 그곳을 모욕하는 일일까? (육신사가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은 박근혜 국회의원의 지역구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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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소도를 육신사 근처로 옮겨? 육신사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육신사의 부속건물 숭절당에 박근혜 한나라당 전대표, 김범일 대구시장에게 "교도소 하빈 이전 반대" 의견을 밝힌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위의 사진은 별당인 충효당 입구에 내걸려있는 반대 결의문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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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묘골마을이 있다! 박팽년의 직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성촌인 묘골마을은 대구가 외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조선 시대의 역사유적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의 이 마을은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는 이유로 흔히 동명 대신 "육신사"로 불려진다.
육신사 경내에는 '六臣祠'라는 편액이 걸린 외삼문, 사육신만이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있는 까닭에 '六臣祠' 대신 '崇正祠'란 편액이 걸린 사당 건물, 박팽년의 손자 박비(뒷날 박일산으로 개명)가 1479년 지은 태고정(보물 554호), 7대손 숭고가 1644년 별당으로 건축한 충효당, 14대손 문현이 1664년 지은 도곡재(대구시 유형문화재 49호), 제사 때 쓰는 제기를 보관하고 임시숙소로 사용하기도 하는 숭절당, 그리고 2010년에 문을 연 사육신기념관 등이 당당한 모습으로 웅거하고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니 이런 유적은 아무리 많아도 나라 안에 여섯 곳을 넘길 수 없다. 특히 박팽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직계 사내자손을 남긴 사람이므로 사육신의 후손이 99칸 종택을 짓고 번창하게 살았던 흔적을 대구 아닌 다른 곳에서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육신사는 대구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마을 들머리에 사육신기념관까지 설립되어 있으니 묘골마을 육신사는 자녀와 함께 꼭 찾아보아야 할 뜻깊은 역사여행지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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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기념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제 어머니의 여종을 '엄마'로 아는 채로 살았던 묘골마을 입구에 있다. 2010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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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일부- 사육신 처형과 그 유족 처리 |
세조 4권 2년 6월 7일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柳誠源)·허조(許慥)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사방으로 잡아당겨 찢어죽이는 형벌인) 거열(車裂 )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친자식(親子息)들은 모조리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인)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의 잔읍(殘邑)의 노비(奴婢)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세조 5년 2년 9월 7일
세조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
단종 복위를 기도하였다가 실패한 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직계 존비속 남자들은 모두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그나마 여자 가족들은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직계 아들이나 손자가 죽지 않고 살아난 예외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박팽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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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신사 외삼문의 현판 사(祠)는 제사를 지내는 집을 뜻한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이름에 사(寺)가 흔히 들어 있기 때문에 "**사"하면 사찰인 줄로 여긴다. 예를 들면, 충북 진천의 길상사(吉祥祠)는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인데 이름에 '사'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사찰로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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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의 둘째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시아버지인 박팽년과 남편 박순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대구에서 관비 생활을 했다. 당시 그녀는 아들이면 태어난 즉시 죽임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가 될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얼마 뒤 출산을 했는데 아들이었다. 이 소식이 관으로 들어가면 아기는 바로 죽을 운명이었다.
이때 며느리 이씨의 여종도 함께 따라와 있었다. 마침 그녀도 임신 중이었다. 출산 시기도 차이가 거의 없었다. 여종은 딸을 낳았다. 그녀가 며느리 이씨에게 말했다.
"제가 아들을 낳고, 마님께서 딸을 낳은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제 딸은 어차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평생을 관비로 지낼 신세이지만, 마님의 귀한 아드님은 생명을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여종의 아들이 된 박팽년의 손자는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로 숨어들어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이름도 그냥 '박비'라 했다. 노비에 무슨 성씨가 있을까 싶어 사람들은 박비 두 글자를 아이의 이름으로만 여겼다. 박비의 뒷글자 '비'는 노비를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앞글자 '박'이 박팽년의 손자라는 사실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어머니'인 여종이 알았고, 가까운 인척 중 몇이 숨을 죽이며 그 사실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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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골 전경 박팽년의 손자 박비를 자기 아들이라며 세상을 속인 여종이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던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 전경. 맨 앞에 보이는 정원 넓은 집은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가 건립한 충효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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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 이어 예종 다음인 성종 대에 이르렀을 때에는 사육신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 정치적 분위기가 일신된 덕분에 박비는 이윽고 임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종은 박비를 충신의 자식이라 칭찬하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해 주었다. 박비는 묘골로 돌아와 육신사의 전신인 절의묘(節義廟)와 정자 태고정(太古亭), 그리고 99칸이나 되는 종택 등을 짓고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닦았다. 자신의 이름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를 뜻하는 '박비'를 버리고 박일산(朴壹珊)으로 개명하였다.
박일산이 묘골을 가꾸기 시작한 이래 마을은 온통 기와집으로 가득 찰 만큼 번창하였다. 대구광역시가 제작한 육신사 리플렛에 따르면 묘골마을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집이 불에 타버렸지만, 구한말까지도 300여 호의 집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사당과 보물 554호인 태고정만은 전란의 와중에도 전소되지 않고 건재하여 지금도 옛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왜병이 집의 기둥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지켜보는 박씨 일가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끼는 기둥을 찍지 않고 왜병의 발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던 것이다. 다른 왜병이 다시 도끼를 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도끼를 들고 나서는 왜병이 없었다. 이제 왜병들은 건물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왜병들이 각각 불쏘시개를 하나씩 만들어 기둥에 갖다댈 무렵, 갑자기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소낙비가 쏟아졌다. 왜병들이 들고 있던 불쏘시개들은 단숨에 시커먼 잿더미로 변했다. 결국 왜병들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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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정 임진왜란 때 묘골마을 대부분의 와가들이 불에 탔으나 이 건물은 전소를 면했다. 보물 554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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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름이 절의묘(節義廟)였던 사당에서는 본래 박팽년 한 분만 모셨다. 그런데 5대손 박계창이 제삿날 꿈을 꾸었는데 다른 사육신 다섯 분들이 사당 밖에 와 서성였다. 박계창은 꿈에서 깨어난 즉시 부랴부랴 음식을 더 차려 함께 제사를 모셨다. 꿈 이후 하빈사(河濱祠)를 새로 세웠고, 박팽년 이외의 다섯분 사육신도 함께 모셨다. 그 뒤 1691년 낙빈서원을 지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고, 1975년 육신사(六臣祠)를 건립하였으며, 1981년 외삼문, 숭절당 등을 갖추었다.
박팽년은 죽기까지 단 한번도 세조에게 "신(臣)"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박팽년의 시조를 한 수 읊어본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쫓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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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빈서원 육신사가 세워지기 이전까지 사육신을 제향하였던 낙빈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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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외에도 사육신 기리는 곳 두 군데 더 있어 |
육신사 외에도 대구에는 사육신과 관련되는 곳이 두 곳 더 있다. 하나는 달성군 다사면 세천리에 있는 금회영각(琴回影閣)이고, 다른 하나는 북구 노곡동에 있는 태충각(泰忠閣)이다. 이 두 곳은 백촌 김문기를 기려 세워졌다. (금회영각과 태충각 등의 건립은 유응부 아닌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에 따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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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충각(왼쪽)과 금회영각 조선 초의 충신인 백촌 김문기를 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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