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대구에 이렇게 많은 '왕건'이 있을 줄이야 -2011/01/19-

思美 2011. 7. 1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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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이렇게 많은 '왕건'이 있을 줄이야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11)
정만진 (daeguedu) 기자
 

▲ 궁예를 몰아낸 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팔공산 앞에서 벌어진 동수대전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참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다.

'桐藪(동수)대전'의 '수(藪)'가 '桐華寺(동화사)'의 '사(寺)'에 해당되니 동수대전이라는 말은

 곧 왕건과 견훤이 동화사 앞에서 크게 싸웠다는 뜻이다. (사진은 문경새재의 드라마 <왕건>

 촬영장 인근의 용추계곡에 세워져 있는 관광안내판을 찍은 것이다.)

ⓒ 정만진
 
 
대구에는 고려가 남긴 '보물'이 별로 없다.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과 동화사 경내에 있는 석조부도 두 점(각각 보물 258호, 601호)이 눈에 띌 지경으로 빈약하다. 하지만 부도 정도로는 관광객의 발길을 끌지 못한다. 경북대 박물관에 있는 보물 271호 수능엄경 권 제10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외에 팔공산 북지장사의 3층석탑, 동화사 염불암의 청석탑 및 사찰 뒤 큰 바위 양면에 각각 새겨진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신무동의 마애불좌상 등의 고려 유물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문화재 등급상 보물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유형문화재에 지나지 않는다.
 

▲ 대구에 남은 고려 태조 왕건의 흔적들(빨간점, 연녹색바탕에 녹색글씨) 왕건은 파군재 일대에서 견훤에 참패해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대구에는 연경, 무태, 살내, 왕산, 일인석, 시량리, 불로, 해안, 안심, 반야월, 반월당, 안일암, 왕굴,

 은적사, 임휴사, 초례봉 등의 많은 지명과 신숭겸장군유적지(순절지지비 등)를 남겼다.

위의 지도는, 대구에 얼마나 많은 '왕건'이 남아 있는지를 독자들이 실감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자가 그림으로 그려본 것이다. 물론 실측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 정만진
 

 
그러나 대구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고려의 흔적이 있다. 왕건의 발자취가 바로 그것이다. 왕건군(軍)이 견훤군에게 부서진[破] 고개인 파군재[破軍峙]가 있고, 도주하던 왕건이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巖]인 독좌암(獨坐巖)도  있다.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강물[灘]처럼 흘러다닌 시내인 살내[箭灘]가 있고, 왕(王)이 도주할 때 넘은 산인 왕산(王山)이 있으며, 왕이 숨어있던 동굴인 왕굴도 있다.
 
또, 왕건이 직접 이름을 지어 붙였거나 그와 연관하여 동명이 생겨난 곳도 여럿 있다. 불로(不老)동은 노(老)련한 청장년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不] 동네라고, 연경(硏經)동은 선비들이 공부하느라[硏] 책[經]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고 왕건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고 훈시한 무태(無怠)동, 왕(王)이 없어진[失] 동네라 하여 실왕(失王)리, 어느 정도 멀리 도망을 쳐서 걱정이 줄어들자 굳었던 왕건의 얼굴[顔]이 그제야 풀렸다[解]는 해안(解顔), 마음[心]이 놓였다[安]는 안심(安心), 지나갈 때 반(半)달[月]이 밤(夜)길을 비추었다는 반야월(半夜月), 당(當)도했을 때 반(半)달[月]이 떠 있었다는 반월당(半月當) 등은 왕건의 발걸음에서 이름이 연유한 곳들이다.
 
그런가 하면, 사찰과 서원 몇 곳의 이름에도 왕건과 관련한 옛일의 내력이 스며들어 있다. 그가 숨어[隱] 지낸 흔적(跡)이 남은 은적(隱跡)사, 잠시 머물며[臨] 쉰[休] 임휴(臨休)사,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지낸 안일(安逸)암, 혼자[獨] 앉아있었던 바위[巖]에서 이름을 따온 독암(獨巖)서원이 바로 그들이다.
 
국가 고려는 비록 대구에 많은 보물을 남기지 않았지만, 태조 왕건 본인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수많은 발자취를 팔공산에서 앞산 일대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남기고 있는 것이다.
 

 

 

 

 

▲ 연경동(왼쪽)과 동화천 하류인 '살내' 대구에는 왕건과 관련이 있는

곳이 너무 많다. 위의 두 곳 역시 그렇다.

ⓒ 정만진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팔공산 동화사 아래에서 견훤과 대회전을 치른다. 이 한판 승부가 바로 동수(桐藪)대전이다. 동수(桐藪)의 '수(藪)'와 동화사의 '(寺)'는 같은 뜻이므로(동수는 동화사의 다른 이름) 동수대전은 곧 동화사대전이다. 싸움터는 은해사 입구 태조지(太祖旨)에서부터 동화천이 금호강과 만나는 살내[箭灘]까지 매우 넓었지만, 승부를 판가름한 일전은 동화사 들머리인 파군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전투의 이름이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일대에 '화살[箭]이 내[灘]를 이루었다'는 뜻의 살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왕건군과 견훤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무수한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동화천 양옆으로 떨어졌는데, 화살이 동화천을 뒤덮어 새로운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는 뜻인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 그 살내의 동화천은 대구 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자연 하천이니, 이 또한 화살을 모두 걷어내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은 우리네 선조들의 덕분인가.
 
대구에서 금호강 무태교를 건너 파군재 삼거리로 향하다가 왼쪽 산골짜기로 접어들면 연경마을로 가게 된다. 동수대전의 한 귀퉁이었던 연경 마을은 본디 글 읽는 소리로 가득찬 학문의 요람이었다. 마을 이름이 경(經)전을 공부한다(硏)는 의미인 것만 보아도 그런 추측은 가능하다. 언젠가 왕건이 이곳을 지나갔는데,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나무나 낭랑하여 그가 지명을 그렇게 붙였다고 전한다. 금호강과 동화천의 접점인 살내[箭灘]에서 파군(破軍)재로 가는 무태(無怠) 지역 중간쯤에서 다시 도덕산(道德山) 아래로 굽어 들어가야 나오는 이 마을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적요한 골짜기이니, 그 당시에야 얼마나 고요한 산촌이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 도덕산(연경마을 뒷산)의 도덕암 전경 마을 뒷산에 '도덕산'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내력을 증언해주는 유교 건축물(연경서원)은 없어졌지만

불교사찰은 '도덕암'이라는 이름 아래 여전히 건재해 있다.

ⓒ 정만진
 

송림사 맞은 편에서 무태 지역으로 이어지는 산에 붙은 도덕산이라는 이름도 연경마을에서 유래한다. 글 읽는 선비들이 많아 도덕에 관한 한 연경마을을 따라올 곳이 없다는 뜻에서 동네 뒷산에 '도덕산'이라는 고상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대구 최초의 서원인 유교의 요람 연경서원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지금, 도덕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모과나무(수령 800년)를 자랑하는 불교 사찰 도덕암만 의연히 남아 있고, 연경마을 자체도 도시 재개발 국면을 맞아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폐가만 여기저기 어수선하여 보는이의 마음을 자못 쓸쓸하게 한다.
 
무태는 연경마을 옆을 휘돌아 흐르는 동화천(동화사에서 연유된 이름) 좌우의 들판 지역이다. 나태(怠)가 없다[無]는 뜻인 무태마을의 이름도 왕건이 붙인 것이라 한다. 동화천 주변에 주둔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견훤군과 전쟁 중이니 절대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할 것이라고 훈시했다는 데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부지런한 것을 보고 그렇게 작명을 해주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무태라는 지명은 왕건이 이곳을 직접 밟은 역사의 흔적임에 틀림이 없다.
 

▲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지 신숭겸 유적지 입구(사진 위,

왼쪽), 신숭겸 순절을 기리는 비석이 들어 있는 비각(위, 오른쪽), 제사를

지내는 표충사(아래, 왼쪽)과 재실인 표충재(아래, 오른쪽). 네 사진 모두 뒤로 왕산이 보인다.

왕산은 왕건이 견훤군에 대패하여 팔공산 염불암 방향으로 도주할 때 부랴부랴 넘은 산이다.

ⓒ 정만진
 

▲ 파군재 삼거리의 신숭겸 동상(왼쪽)과 유적지 내의 신숭겸을 기리는 비석 신숭겸은 견훤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게 되자 왕건의 옷을 대신 입고

적을 속이다가(그 새 왕건은 도망쳐서 살게 된다) 전사했다.

ⓒ 정만진
 
 
살내 전투 이후 신숭겸의 지원군이 도착하지만 끝내 왕건의 군(軍)사는 파군(破軍)재에서 견훤군에게 철저하게 부서지고[破] 만다. 지금 그 자리에는 신숭겸장군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유적지 내에는 신숭겸 장군이 그곳에서 죽었음을 기리는 순절지지비(殉節之地碑)비, 영정을 모신 표충사, 부속건물인 숭절당과 표충재 등 많은 볼거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수대전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황급히 파군재 일대를 떠나 봉무동을 거쳐 평광동 시량리로 갔다가 시내를 타고 불로동까지 내려온다. 봉무동 앞을 휘감아 흐르는 동화천 개울가의 독좌암(바위[巖], 혼자[獨], 앉을[坐])에 혼자 앉아 잠깐 넋을 수습한 뒤, 몸을 은신하기 위해 마을 뒷산을 넘어 평광리 끝자락인 시량리로 피했을 듯하다. 물론 시량리라는 마을이름의 내력도 왕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하는 바로는,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웬 낯선 사람이 숲속에 있는 것을 본 주민이 주먹밥을 준 후 잠시 뒤에 와 보니 그가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왕이었다. 그래서 '왕(王)을 잃은[失] 마을[里]'이라는 뜻의 "실왕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발음하기 쉽게 바뀌어 '시량리'가 되었다.
 

 

▲ 독암서원(왼쪽)과 독좌암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한 파군재 아래의 봉무동에 있다. 왕건이 망연자실하게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巖]라 하여

독좌암, 독암서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정만진
 
▲ 신숭겸 유허비 평광동 맨 끝인 시량리, 그 중에서도 사과밭 맨 구석에 있다.
ⓒ 정만진
 
 
시량리는 평광동 중에서도 가장 산골 쪽에 숨어있는 끝마을이다. 그러므로 시량리에서 줄곧 걸으면 평광동으로 나온다. 평광리에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 이번에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을 지나 불로동에 닿는다. 시량리를 벗어난 왕건도 (대구시 동구청이 '왕건길'이라 부르며 관광자원화하고 있는) 그 길을 하염없이 걸었을 것이다. 측백나무숲 아래를 흐르는 맑은 물은 한 모금 손으로 떠 마시며 권토중래를 다짐했거나, 혹은 처량하게 된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측백숲에서 잠깐이면 닿은 불로동에 도착한 왕건은 전쟁통에 끌려갔거나 피난을 가버린 바람에 마을 안에 노(老)련한 중장년 사내들이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不] 것을 보고 한탄을 했고, 그 이후 그 마을에는 불로(不老)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그래도 불로동은 파군재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서 안심을 할 수는 없다. 왕건은 정신없이 계속 걷고 뛰었을 것이다. 반(半)달[月]이 흐릿하게 밤[夜]길을 비춰주는 곳까지 왔을 때 그제야 왕건은 마음[心]이 놓였다[安]. 지금 고모령에서 금호강 건너편을 바라볼 때 그 일대를 반야월 또는 안심이라 부르는 연유가 바로 왕건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제 왕건은, <대구시사>의 표현을 따르면, '금호강을 건너 지금의 경산 압량 지역이나 대구의 수성구 고모동 방면을 지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로 천변을 이용하거나, 또는 적대 세력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산기슭의 외곽을 이용'하여 대구의 앞산 지역으로 향한다. 왕건이 앞산까지 가는 길의 중간쯤에 당(當)도하였을 때 달[月]이 반(半)쯤 기울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대구 시내 중심부의 큰 네거리 일대에 반월당(半月當)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내력이다.
 

 

▲ 불로고분군, 반야월역 왕건이 도망을 치다가 어느 마을 지났는데 아이들과 아녀자만 있고 노(老)련한 사람들(청장년)은 모두 전쟁에 나갔거나 도망치고 없[不]다고 해서 그 마을을 불로동이라 불렀다.

한참 더 도망을 쳐 밤[夜]이 되었는데 하늘을 보니 반(半)달[月]이 떠 있어

그곳을 반야월이라 부르게 되었다.

ⓒ 정만진
 

▲ 앞산을 향해 도주 중인 왕건 왕건이 이제 마음을 좀 놓았다는 뜻의 안심(왼쪽 사진에 금호강 건너 아파트가 보이는 곳이다. 멀리 보이는 산 옆 고갯길이 유행가의 소재인 고모령이다.)과, 앞산을 향해가다 보니 반(半)달[月]이 보이는 장소[당]

였다고 해서 반월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대구 중심가 풍경. 도로 멀리 보이는 산이 앞산이다.

ⓒ 정만진
 
 
앞산에는 안일(安逸)암이 있다. 왕건이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하게 머문 절이라는 뜻이다. 안일암 뒤로 앞산 거의 정상까지 올라가면 왕건이 숨어 지냈다는 왕굴이 나온다. 안일암에서 고산골 쪽으로 더 나아가다가 낙동강승전기념관  옆으로 난 산길을 10여분 오르면 나오는 은적(隱跡)사는 왕건이 숨어[隱]지낸 자취[跡]가 깃든 절이다. 은적사 바로옆에도 왕굴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안일암과 은적사의 반대편 앞산비탈에도 왕건은 이름을 남긴다. 임휴(臨休)사, 왕건이 잠시 머물면서[臨] 쉰[休] 절이라는 뜻이다.
 
앞산에 머물던 왕건은 견훤군의 수색으로부터 안전해지자 이윽고 '성서 지역을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 고려의 통제를 받고 있던 성주 지역으로(<대구시사>의 표현)'  옮겨간다. <대구시사>는 견훤이 공산전투 대승 이후 벽진군(성주)을 크게 공격했다는 기록을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로 원용한다. 왕건이 벽진군을 거쳐 완전히 개성으로 탈출한 것이 확인되자 견훤은 그 분풀이로 성주를 무참하게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 앞산의 왕건 관련 사찰들 왕건이 잠시 머물러 쉬었다는 뜻의 절 이름이 붙은 임휴사(위, 왼쪽), 왕굴에서 바라본 안일사(위, 오른쪽), 숨어서 조용히 있었다는 의미의 절 이름이 붙은 은적사(아래, 왼쪽), 은적사의 또 다른 왕굴
ⓒ 정만진
 

▲ 왕굴 왕건은 아마 컴컴한 동굴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가 뭔가를 비는 종교적 장소가 되어 있다.
ⓒ 정만진
 

 
대구에는 '왕건'이 많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에도 이만큼 그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경쟁 상대인 견훤에게 철저하게 참패한 후 고독하게 패주하는 길을 따라 남긴 흔적이니, 그 길과 유래를 둔 지명들은 보고 듣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준다. 대구에 남은 왕건의 흔적이 역사적이고 교육적이라는 말이다.
 
'20011 대구 방문의 해'를 맞아 특별히 대구시가 키워야 할 문화유산은 어디일까. '왕건'이 그 중 하나이다. 대구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는, 대구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른 곳의 것은 왜소한, 차별성이 뚜렷한 것들을 부각시켜야 한다. 팔공산의 관봉석조여래좌상도 그 중 하나이고, '왕건' 또한 그렇다. 대구에 고려 시대 보물이 별로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왕건'이 유난히 많이 있다는 데 주목을 하자.    
 
왕건의 흔적으로 해석되는 해안, 일인석, 태조지에 대하여

 

염불암 일인석 관련 :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한 지금의 신숭겸장군유적지 바로 뒤에 있는, 뒷날 왕이 넘은 산이라 하여 왕산(王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작은 산을 넘어 팔공산 쪽으로 도주한다. 왕건은 팔공산 동봉 거의 턱밑까지 내달아 큰 바위 위에 홀로 앉아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그때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그 바위[石]는 한[一] 사람[人]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그대는 뉘시기에 거기 앉으신 게요?"하며 은근히 당신이 임금이 아니냐고 물었다. 왕건이 "내가 바로 왕이오"하고 대답하자 스님은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그 바위를 일인석(一人石)이라 부른다. 그 이듬해(928년)에 일인석 옆에 염불암이라는 절이 신축된다. 시기적으로 미루어볼 때 왕건측의 지원을 받아 사찰이 건축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런 추측은 당시 동화사 승병들이 왕건 아닌 견훤을 지원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대구시사>도 <승증동국여지승람>의 '桐藪望旗而潰散'과 '自隨以歸'라는 표현을 '왕건(군)이 공산에 (처음) 왔을 때 동수(동화사)의 병력이 고려군의 기를 보고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왕건의 구원병이 경주 지역까지 짓쳐들어가지 못하고 팔공산 권역에서 멈추게 된 것은, 견훤의 후백제군이 곧 대응하여 병력을 이끌고 온 탓도 있겠지만 이 시기의 대구 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면서 동화사 승병과 일대 주민들이 견훤을 지원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처참한 대참패 이후 팔공산 동봉 아래 깊은 골짜기까지 쫓겨온 왕건의 입장에서는 이듬해 염불암이 지어지는 외진 산속에서 승려로부터 받은 존경어린 대우가 크게 감격스러운 추억이었을 터이다.

 

▲ 염불암 왕건은 도피 중 팔공산 염불암까지 가서(당시에는 염불암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고 그냥 빈터였다) 큰 바위[一人石]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왼쪽 사진은 케이블카와 동봉 정상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염불암의 원경이고, 오른쪽 사진은 염불암 바로뒤에 불상이 두 면에 각각 하나씩 그려져 있는 큰 바위이다.
ⓒ 정만진
 

하지만 왕건이 혼자서 팔공산 염불암까지 도망을 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미심쩍은 대목이다. 염불암으로 가는 산자락은 말이 달릴 수 있을 만큼 평탄하기는커녕 포장이 되어 있는 지금도 숨을 헐떡이며 걸어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염불암도 없었으니 나무와 덤불투성이가 아니었다 해도 간신히 비집고 다닐 만한 좁디 좁은 산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공산전 대패 바로 그 이듬해에 왕건측이 아직 적세가 강하던 팔공산 지역에 신축되는 사찰 사업을 지원했다는 해석도 무리한 견강부회로 보인다. <대구시사>가  '930년 정월에 들어서면서 고려는 경상도 지역에서의 세를 만회하고 역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고 기술하는 것을 보면 그 두어 해 전인 928년(공산대전 참패 바로 이듬해)에 어떻게 팔공산에 왕건의 지원을 받은 사찰이 지어질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싸움터의 이동 과정도 왕건의 염불암 일인석 설화와는 별로 일치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왕건과 견훤이 처음으로 맞붙은 곳은 은해사 앞 태조지(太祖旨)였다. 경주에서 돌아오던 견훤군과 그리로 가던 왕건군이 거기서 맞닥뜨린 것이다. 하지만 정벌에서 대승을 거둔 견훤군의 기세를 먼 길을 와 피로까지 겹친 왕건군은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왕건군은 살내까지 밀렸다. 그때 신숭겸의 지원군이 왔고, 이에 세가 불어난 왕건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하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용포를 대신 입고 견훤군을 속임으로써 죽음으로 시간을 벌어준 신숭겸 장군 등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게 된다.

 

왕건은 어느 쪽으로 도망을 갈 것인가. 왕건군은 금호강 방향, 견훤군은 팔공산 방향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왕건이 갈 곳은 염불암이 있는 팔공산 쪽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있는 금호강 쪽이다. 파군재에서 뒤로 물러나 봉무동 독좌암, 평광동 시량리, 불로동, 안심과 반야월, 거기서 금호강을 따라 반월당 일대를 거쳐 앞산(안일암, 은적사, 임휴사)으로, 다시 성주 방향으로 도망을 갔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요약하면, 팔공산 염불암 일인석(一人石)은 왕건이 도망가다가 앉았던 바위라고 보기 어렵다.

 

해안 관련 : 해안(解顔)도 왕건과는 무관한 지명인데, 뒷날 동수대전 이후 민간에서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파군재에서 제법 멀리 도망쳐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자 줄곧 굳었던 왕건의 얼굴[顔]이 풀렸다[解]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해안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만, <삼국사기>는 지명과 인명을 중국식으로 많이 바꾼 신라 경덕왕 때 '雉省火縣'의 이름이 '解顔縣'으로 변경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안의 지명이 왕건의 옛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의 한 가지 예로 보면 되겠다.

 

태조지 관련 : 왕건군은 신라로 가던 중 은해사 앞 태조지(太祖旨)에서 왕건군과 처음으로 격돌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은해사 앞에서 태조지란 이름의 지명을 찾을 수는 없다. <대구시사>는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태조지는) 고을(영천)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조그만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는 대목을 지적하면서 '태조지는 은해 입구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는 그러한 지명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 왕건에서 이름이 유래된 초례봉 정상 대구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최씨종가가 있는 마을) 뒤에 초례봉이 있다. 초례(제사醮, 예의禮)는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왕건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이래로 이 산봉우리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초례봉으로 알려졌다. 오른쪽 사진의 정상 표지석 뒤로 멀리 하얗게 보이는 산줄기가 팔공산의 (왼쪽부터) 서봉, 비로봉, 동봉이다.
ⓒ 정만진
 

 

2011.01.19 17:07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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