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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10경 서거정의 '대구 10경' 중 연구산(현재 제일여중 자리)의 봄하늘(사진은 그 자리에 있는 거북바위), 침산 노을(사진은 침산공원에서 바라보는 와룡산 방향의 낙조), 금호강 뱃놀이(사진은 반야월 인근의 금호강), 도동 측백수림의 풍경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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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고위 관료였던 서거정, <동문선>을 편찬한 문인이기도 하다. 그는 조상의 고향인 대구를 사랑하여 아름다운 명소 10곳을 정하고, 그 곳을 각각 읊은[詠] 시 10수를 남겼다. 이를 흔히 '대구 10영(詠)'이라 한다. '대구 10영'은 금호강의 뱃놀이, 입암 낚시, 금학루 밝은달, 남소의 연꽃, 노원의 송별, 거북산 봄구름, 북벽의 향림, 침산의 저녁놀, 동화사의 스님 방문, 팔공산에 쌓인 눈이다.
서거정의 '대구 10영' 아직도 유효한가
금호강의 뱃놀이? 쪽배는 간신히 다닐 수 있을지 몰라도 황포돛대같이 제법 품새 멋진 배는 결코 띄울 수 없는 금호강을 외지인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는 없다. 설혹 무지막지하게 강바닥을 파서 소규모 유람선을 운행하더라도 덕지덕지 늘어선 아파트와 희뿌연 연기를 숭숭 품어내는 공장들로 가득찬 강변 풍경을 보러 그 배를 탈 사람이 있을 리도 없다.
거북산 봄구름? 지금의 중구 봉산동 제일여중 자리에서 봄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말한다. 북벽의 향림?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동구 도동의 측백나무 숲을 말한다. 침산의 저녁놀? 북구 오봉산에서 바라보는 달서구 와룡산 방향의 저녁 낙조를 상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지인을 초청하여 자랑할 만한 수준급은 아니다.
삿갓처럼 생긴 입암에서 낚시를? 입암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고, 안다 한들 지금의 신천이나 금호강에 낚시의 즐거움을 만끽할 명소는 없다. 금학루 밝은 달, 남소의 연꽃? 이 역시 어디인지 불분명할 뿐더러, 예전과 달리 거대 도시가 된 대구에서 새삼스럽게 명월과 연꽃 감상의 호사를 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팔달교 주변인 노원에서 정든 사람과 송별? 강 한복판을 가득 메운 비닐 하우스와 폭주하는 차량들의 굉음도 문제이지만 이제는 노원동이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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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동봉과 비로봉 중간에 있는 거대 석불(사진 왼쪽), 서봉에서 바라본 비로봉과 동봉의 설경(사진 오른쪽, 위), 염불암이 보이는 풍경(사진 오른쪽, 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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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팔공산에 쌓인 눈을 완상하는 즐거움과 동화사의 스님을 방문하는 일은 지금도 유효하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나라가 알아주는 명산인 팔공산을, 그것도 하얗게 눈이 내린 날 찾아 설경을 즐기는 일은 외지인에게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무수한 불교 유적을 안고 있는 팔공산의 대표 사찰 동화사로 발걸음을 하고 스님을 만나는 일 또한 대구 일대에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즐거움이다.
고려 시대 외적의 침입에 시달린 대구사람들의 한이 하얗게 내려쌓인 듯 적설이 겹겹으로 가득한 팔공산 정상의 겨울 풍광과, 신라 시대의 보물들이 단아하게 남아 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훈련지였다는 역사적 증거물도 뚜렷하게 보관되어 있는 동화사의 웅혼한 아름다움은 서거정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변함없이 그 빼어남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대구 10경' 새로 정해야
서거정의 '대구 10영'은 눈 쌓인 산, 뱃놀이하는 강, 봄 완상, 낚시, 노을, 달구경, 연꽃, 나무, 나루의 이별, 사찰 들로, 소재가 서로 중복되지 않고 계절도 골고루 섞여 있다. 그러나 외지인의 발걸음을 재촉할 만큼 눈부신 절경이거나 신이(神異)한 면모들은 아니다. 그저 대구사람들이 벗끼리 가족끼리 일상의 노곤함을 달래려고 찾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물론 걸어서 다녀야 했던 당시의 사정상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서거정 이후 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가 정한 10경을 계속 반추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시대가 변한 만큼 넓이와 깊이가 다른 현대판 대구 10경을 정해야 한다. 면적도 모습도 상전벽해한 21세기의 대구에 걸맞은 10곳을 외지인들에게 추천하자는 말이다.
물론 자연경관만 그럴 듯한 10곳을 골라 '대구 10경'으로 지정하는 것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다. 음악 분수를 설치한 수성못 야경, 아이들 놀이시설이 주축인 두류공원의 타워 야경, 축구장인 대구 스타디움, 오래된 재래시장일 뿐인 서문시장, 잔재만 남은 도동 측백수림, 유적이 없는 국채보상공원 등을 대구의 대표 명물로 내세우는 것도 궁색하다. 대구에만 있는, 혹은 다른 곳에도 있지만 대구의 것이 훨씬 돋보이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그리고 자연유산으로 현대판 대구 10경을 새로 지정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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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슬산 암괴류 비슬산 암괴류는 집채보다 더 큰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자연유산이다. 암괴류 바로 앞 천길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대견사지 3층석탑이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적셔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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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은 정상 일대의 물경 100만㎡에 이르는 광활한 고위평탄면을 자랑한다. 이만큼 꼭대기 정상부가 넓고 편편한 산은 보기 드물다. 게다가 비슬산의 고위평탄면은 봄이 오면 사람이 발을 디딜 틈도 없을 만큼 가득 피어나는 참꽃 군락의 장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을이면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털구름 상공까지 뒤덮는 듯한 고위평탄면의 금빛 억새숲 비경은 보는 이의 눈조차 시리게 한다.
그러나 빼어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는 이유만으로 비슬산을 대구의 대표 명소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발상이다. 비슬산에는 인류가 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2km나 되는 거리를 뒤덮은 채 경사 15도로 기울어진 채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8만 년- 1만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에 형성된 비슬산 암괴류(岩塊流), 바로 그것이다. 영국 다트무어, 미국 시에라네바다, 호주 타스마니아 암괴류가 유명하지만 비슬산 암괴류는 그것들을 단연 능가한다.
특히 답사객들은 신라 고찰 유가사나 소재사에서 1시간 남짓 걸어올라 정상 인근의 대견사지에 도달한 즈음, 절터 일대를 뒤덮고 있는 집채 크기 이상의 바윗덩어리 군집- 토르(Tor, 탑바위, 바위산) 집단 앞에서 그만 말을 잊는다. 온 세계가 그 형성과정에 학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비슬산 암괴류, 다른 곳에서는 이만한 장엄을 결코 볼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이다.
'비슬산 암괴류'는, 빙하기가 끝날 무렵 지표면의 흙이 씻겨 내려가자 산비탈 땅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둥글둥글한 바위[岩]덩어리[塊]들이 흘러[流]내리면서 차곡차곡 쌓은 듯 남아 계곡을 이룬 암괴류(Block stream) 그 자체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산만큼 커다란 바위들의 군집인 토르, 각이 진 작은 바위들이 30도 내외의 급경사를 이룬 채 무수히 모여 있는 애추(Talus, 너덜겅) 들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비슬산은 암괴류, 토르, 애추, 고위평탄면 등등 화강암 지형의 온갖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천혜의 자연학습장인 것이다.
게다가 전국적 봄철 명소인 참꽃 군락지 끝자락의 대견사지에 올라, 불당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광활한 절터의 마지막 벼랑 끝에 애처롭게 버티고 있는 3층석탑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속에 솟구치는 애잔한 물결에 문득 눈시울이 젖는다. 아득한 벼랑을 눈앞에 내려둔 채 멀고 먼 가야산 자락을 아스라히 응시하는 비슬산 꼭대기 이 자리에, 과연 누가, 무엇 때문에 절을 짓고 3층석탑을 세우는 공덕을 쌓았단 말인가. 켜켜이 이어지는 산줄기 위로 쏟아지듯 햇살이 빛날 때든, 흰눈발과 안개에 자욱하니 가려 한치 앞 벼랑조차 보이지 않을 때든, 도무지 원근을 구분할 수 없는 아득한 경치를 전망으로 삼고 있는 이 산상(山上)에, 금세 넘어질 듯 가녀린 3층석탑이며 이제는 무너져 자취도 사라져버린 불당을 세운 이의 마음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정녕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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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바위 늦은 오후, 노을이 밀려오는 무렵의 갓바위부처 관봉석조여래좌상의 오른편에서 사진을 찍으면 불상이 입체적으로 새겨진 거대한 바위 아래에 있는, 촛불이 가득 켜진 함까지 같이 찍힌다. 배경을 이루고 있는 팔공산 자락의 늦은 오후 풍광은 석조불상 앞 10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바라보는 경치인데 위의 사진에서는 합성하여 불상 바로 뒤에 넣었다. 바위와 불상이 워낙 크기 때문에 (사람이 선 채로 쳐다볼 때 전체 높이가 5.6m) 본래는 갓바위부처 위와 좌우로는 하늘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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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 시대를 대표하는 대구의 유산이 비슬산이라면,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대구의 유산은 단연 '갓바위'이다. 산정 일대에 팔공산 관봉석조여래좌상만큼 커다란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머리에 갓을 씌운 절세명소는 대구 말고는 달리 또 없기 때문이다. 행정적 소재지는 경산시이지만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자연스레 대구의 홍보대사를 자임하고 있는 갓바위, 샤머니즘적 원시 기복신앙으로 무장한 현대인들이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천둥 번개가 치나 가리지 않고 오늘도 오르고 있는 관봉석조여래좌상, 대구에 남은 신라를 증언해준다. (등산로 입구에 보물 석탑을 지닌 선본사가 있고, 인근에 원효대사와 김유신 장군이 수도를 했다는 불굴사도 있다. 좀 떨어진 곳에는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사찰을 대표하는 은해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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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동수대전(지금의 대구 동구 지묘동 일대에서 벌어진 견훤과 왕건의 일대혈전)에서 패한 왕건은 대구에 패주의 여러 발자취를 남겼다. (사진 위, 왼쪽) 심숭겸유적지 (오른쪽) 앞산 안일사 (아래, 왼쪽) 혼자 앉아 있었던 독좌암 (오른쪽) 앞산 왕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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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대구의 유산은 '왕건'이다. 견훤과의 동수대전에서 참패를 하고 간신히 목숨을 구해 허겁지겁 도주한 그의 행로는 대구에 남은 고려 유산의 으뜸이다. 파군재, 왕산, 독좌암, 불로동, 연경, 무태, 전탄, 시량리, 안심, 반야월, 반월당, 은적사, 임휴사, 안일암 등 '왕건의 길'에는 그의 고단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앞산에 있는 왕굴도 그가 견훤의 추격군을 피해 숨어 지냈던 동굴로 이름이 높다. 물론 첫손가락에 꼽힐 답사 장소는 동구 지저동 왕산 아래에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는 신숭겸장군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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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 사육신 유적 (사진 위, 왼쪽) 육신사 편액 (오른쪽) 육신사가 있는 묘골마을 전경 (아래, 왼쪽) 사육신의 직계 남자자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손자 박비가 지은 태고정 (오른쪽) 사육신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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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대구의 유산은 육신사이다. 사육신의 직계 남자 후손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천우신조로 박팽년의 손자 박비만 살아남았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에 99칸 종택과 사육신을 기리는 사당을 세웠다. 육신사는 묘골마을 맨 뒤에 있으며,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경건한 장소로 점점 이름을 높여가고 있다. 보물인 태고정, 교육관인 사육신기념관이 있고, 인근에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삼가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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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곽재우 장군의 동상(망우공원), 묘지(달성군 구지), 임진왜란의병관(망우공원). 아래 사진은 도동서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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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비극인 임진왜란 시기를 증언하는 대구의 대표 유산은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특히 그의 묘소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삼천리 강산에 구국의 횃불을 뜨겁게 드날렸던 임란 의병들, 그 중에서도 특히 모든 사람들의 뇌리 속에 신격화된 민족영웅의 이미지로 살아 있는 홍의장군의 묘는 중언부언할 것 없는 국가적 역사여행지이다. (묘소 인근에는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엄청난 뜻을 지닌 도동서원도 있다.) 그리고 홍의장군을 기려 망우공원에 세워진 기념관도 방문할 만하다. 그곳에는 장군이 썼던 장검 등을 볼 수 있다. 같은 공원 안에 있는 임란의병관에서는 왜란의 내용을 아주 소상하게 학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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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장 김충선 김충선은 왜장이었지만 조선에 귀화했다.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그를 기리는 녹동서원과 충절관(사진 오른쪽, 아래)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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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이 남겨준 또 한 곳의 방문 장소를 짚어야겠다.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녹동서원과 충절관이다. 이 두 곳은 왜군 장수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귀화하여 오히려 조선에 많은 공을 세운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이자 기념관이다. 임란 때 귀화한 명나라 장군 두사충도 수성구 만촌동에 묘소와 사당을 남기고 있지만, 유명세와 침략군인 왜군 장수의 귀화였다는 점에서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은 대구의 10대 명소로 추천받아 마땅할 것이다. (인근에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인 조길방가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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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시인 이상화 전국 최초로 건립된 상화시비(달성공원 소재), 고택(중구), 묘지(달성군 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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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대구의 유산은 '민족시인 이상화'이다. 시내 중심가에 이상화 고택이 있다. 그 고택은 기념관 기능도 해준다. 상화고택 바로 옆집은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서상돈 고가이다. 고택 인근의 달성공원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시비인 상화시비를 볼 수 있다. 상화의 묘는 달성군 화원에 있는데, 그의 옆에는 친형인 독립군 이상정 장군이 나란히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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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령시 (사진 오른쪽, 위) 중구 약전골목에 있는, 갖가지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약령시문화원 내부 (아래) 약전골목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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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고택 뒤로 펼쳐지는 약령시 또한 대구를 대표하는 역사유적이자 문화유산이다. 흔히 약전골목이라 부르는 이 거리는 400년 전에 형성된 약재 상가의 운집으로, 답사객을 위해 '약령시 한의약 문화관'도 건립되어 있다. 한방체험실까지 갖춰진 한의약문화관은 대구 아닌 다른 곳에서는 들러볼 수 없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시대별로 빙하기의 비슬산, 신라시대의 갓바위, 고려시대의 왕건, 조선시대의 육신사, 임진왜란기의 홍의장군 묘소와 녹동서원, 일제시대의 이상화, 그리고 약령시, 이렇게 여덟 곳을 대구의 대표적 답사지로 추천하였다. 여기에 서거정이 말한 10영 중 팔공산과 동화사를 한 곳으로 묶어서 아홉 번째 대표지로 올려야겠다. 서거정은 둘을 각각 별도의 명승으로 쳤지만, 동화사가 팔공산의 품 안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둘은 묶어서 10경의 한 자리로 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동화사에는 예술적 가치는 없지만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 하나로 손님을 끌어모으는 통일대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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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사 (사진 왼쪽) 동화사 대웅전 (중앙) 통일대불 (오른쪽, 위) 동화사를 승병 훈련장으로 삼아 임란시 왜적을 물리친 사명대사의 초상 (아래) 신라 때 보물인 비로암 3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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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현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곳을 추천해야겠다. '들안길'이다. 수성못 아래 넓은 '들'판 '안'에 있는 '길'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들판이 아니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애끓는 명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적 소재가 된 너른 들판이 지금은 150여 거대 식당들이 운집한 특이 명소로 변해 있다. 거대 식당이 한곳에 그토록 운집한 것이 무슨 대구의 자랑거리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지만, 갓바위처럼 다른 곳에 없고 여기에만 있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관광지의 장점을 충분히 갖춘 것이니 애써 의미를 낮출 필요가 없다. 대구 밖에서 손님이 오면 들안길로 모셔 150여 식당 중 한곳에서 접대를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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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안길과 수성못 150여 대형식당으로 시가지를 이룬 들안길 야경(사진 위, 좌우). 수성못에서 수성동 대구은행과 범어로타리에 이르는 길이 온통 식당으로 가득차 있다. 수성못을 만든 일본인 수기임태랑의 묘소(사진 아래, 왼쪽). 비행기를 통째로 가져다 놓은 식당(사진 아래, 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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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등 증거물 거의 없어 안타까워 |
'증거물'을 지니고 있지 못해 대구를 상징하는 답사지로 내세울 수 없는 안타까운 것들도 있다. 국채보상운동, 10월사건(항쟁?), 60년대 교원노조, 2․28, 지하철 폭발, 투표 성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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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공원의 달구벌대종(왼쪽), 왜관 구철교 폭파 장면 대구 중심가의 소공원인 국채보상공원에 마련된 달구벌대종 야경(왼쪽)과 경북 칠곡 왜관 구철교 폭파 광경(다부동 전적기념관 전시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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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충분한 증거물을 보유하고 있지만 (팔공산 능선 정상에 있는 갓바위와 달리) 고개를 완전히 넘어 경북 안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대구의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인 것도 있다. 다부동 전적지가 바로 그곳이다. 게다가 다부동 전적지 답사 여정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왜관 구철교가 더 더욱 경북의 것이기 때문에 '다부동= 대구' 공식화는 지나친 아전인수이다. 만약 다부동 전적지를 대구의 것으로 친다면 영천 은해사 거조암, 군위 삼존석불 같은 '국보'를 대구의 유산으로 넣고 싶은 욕심까지 생겨날 테니, 그렇게 확대를 좋아하다가는 '2011 대구 방문의 해'가 아니라 '2011 경북 방문의 해'가 되어버릴 것이다. |
현대판 '대구 10경' 답사 주요 여정 |
제 1경 비슬산 : 유가사- 대견봉(비슬산 정상)- 고위평탄면- 참꽃 군락지- 대견사지
제 2경 갓바위 : 선본사- 갓바위 (-불굴사 혹은 은해사)
제 3경 왕 건 : 신숭겸장군 유적지- 독좌암- 불로동- 앞산 왕굴
제 4경 육신사 : 묘골마을(사육신기념관- 충효당- 도곡재- 태고정- 육신사)- 삼가헌
제 5경 곽재우 : 홍의장군 묘소- (도동서원-) 망우공원 동상- 망우당기념관- 임란의병관
제 6경 김충선 : 녹동서원- 충의관 (-조길방가옥)
제 7경 이상화 : 상화고택- 서상돈고택- (서문시장-) 달성공원- 묘소
제 8경 약령시 : 약전골목- 한의약문화관- 한약재 도매시장
제 9경 팔공산 : 동화사(마애불- 조사전- 통일대불- 비로암)- 염불암- 정상
제10경 들안길 : 수성못(수기임태랑 묘소, 뱃놀이)- 들안길 (-만찬) |
'대구 10영' 지정한 서거정, '대구 사람'인가? |
대구직할시가 1982년 펴낸 <대구의 향기>는 서거정을 '고장을 빛낸 사람' 제일 앞에 올려놓고 있다. 대구광역시가 2007년 펴낸 <대구의 문화인물>도 역시 서거정을 책 첫머리에 소개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고관대작으로 <동문선> 등을 저술한 서거정이 역사상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서거정은 대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증조할아버지 서익진(徐益進), 할아버지 서의(徐義), 형 서거광(徐居廣)이 경산 자인에 살았고, 아버지 서미성(徐彌性)이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그곳에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구시는 줄기차게 자체 홍보물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서거정을 대구를 빛낸 대표 인물로 홍보하고 있다.
<대구의 문화인물>은 다음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서거정을 대구의 인물로 규정한다. 첫째, '서거정은 달성을 세거지로 한 대구 토성(土姓)인 대구(또는 달성) 서씨 출신'이다. 둘째, '지역 출신 인사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동향 선배로서 그들을 밀어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본관지 대구를 "내 고향"이라 부르면서 유명한 <대구 10영(詠)> 등 친향(親鄕)에 대한 애틋한 감정의 흔적들을 군데군데 남겨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논거는 서거정을 대구 역사의 대표적 인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언해준다. 조상이 대구 근교에 살았고 본관이 대구(또는 달성)이면 그는 대구 사람인가? 과거에 급제한 대구 청년을 후원해 주었으면 그는 대구사람인가? 본관지 대구에 애틋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그를 '대구 사람' 운운하는 것은 견강부회의 논리적 비약이 아닌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