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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의병관 대구 망우공원에 있다.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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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당시 전국의 의병은 2만2천명 정도였다. 그 중 절반이 넘는 1만2천여 명이 경상도 의병이었다. 경상도 의병들은 부산포로 올라와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의 진로를 막아 적의 수송로를 끊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일대가 침탈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마땅히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적의 머리를 올려 전공을 세움은 의리상 옳지 않은 일'이라는 홍의장군의 말처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도다'라고 토로한 경북 고령 출신 김면 장군의 말처럼 의병들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것은 4월 14일, 그로부터 불과 7일 후인 4월 21일 대구는 벌써 왜에 함락되었다. 왜의 침입 16일 후인 4월 30일에는 임금인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2일 후인 6월 27일 이승만 정부는 대전으로 옮겨갔고, 그 다음날인 6월 28일 이승만 정부는 한강의 다리를 폭파했다. 그래도 선조가 이승만보다는 나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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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의 공산성 자리 임진왜란 때 대구의 의병들은 주로 팔공산 공산성에서 활동을 했다. 공산성 주봉인 비로봉 정상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군사보호시설로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려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나제나 팔공산 일대는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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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왜군의 주력 부대가 북상을 할 때나 남으로 물러갈 때나 항상 지나가는 진군로였다. 명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지만 대구는 곡창 지대인 전라도와 통하는 지역이므로 군량을 준비하기에도 좋았다. 외국 군대가 번갈아 지나다녔다는 것은 결국 대구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는 '왜란 초에 벌써 왜적의 후방 기지로 되었으니까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이듬해 5월 왜군이 남으로 물러간 후에는 명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명군으로부터 입는 피해가 막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다. 왜군의 침공을 받은 대구부사 윤현(尹睍)이 공산성으로 물러났을 때 서사원은 거기 모여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왜군의 주력부대가 통과하고 또 후방부대가 주둔하는 곳이 바로 대구인 관계로 우리 의병이 거리낌없이 활약하기에는 무척 어려웠으므로, 당시 대구 지방의 의병 활동은 주로 팔공산 주봉의 공산성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서사원 의병장은 곡식 300섬을 청도의 오례산성에 보내어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의병들을 돕기도 했다.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이강(伊江)서원에서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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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의병장 우배선 장군의 모습 대구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박물관 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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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은 대구의 동북부에서 주로 활동한 의병장이었고, 남서부 일대에서는 우배선(禹拜善, 1569-1621) 의병장이 두드러지게 활동을 하였다. 우배선은 전란 당시 불과 24세의 백면서생이었던 관계로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종전 이후 국가 차원의 논공행상에서 '영남 3대 의병장'이라 칭송받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과 함께 1등공신으로 나란히 책봉될 만큼 공이 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55권 27년(1594) 9월 24일 기록에 보면 선조가 '우배선과 안신갑 같은 자는 용감하여 선전하였으므로 명하여 수령을 삼았다'고 말한 기록이 나온다.)
왜란 때의 의병장 중에서 대구와 연고가 있으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필마단기로 적진을 유린하고, 매복과 기습 등 다양한 전술전략에 능통하여 '신출귀몰', '천강(天降)장군', '홍의장군'의 신화성을 얻은 그는 국민 모두의 뇌리에 익숙한 의병장이다.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작전과 무용으로 왜적을 줄기차게 격파해 낸 그는 여러모로 '스타'성이 넘치는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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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우 장군의 동상 대구 망우공원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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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홍의장군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의병 활동도 경남 일대에서 펼쳤다. 의령 일대와 그 이웃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자신의 작전지역으로 삼았다. 1592년 5월 하순에는 함안군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쪽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데에 평상시보다 불편한 점이 없도록 만들었다.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홍의장군의 활약은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해낼 정도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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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우 장군이 영면하고 있는 달성군 구지 곽씨문중의 묘소 왼쪽은 묘소 입구에 세워진 구국창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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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의 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에 있다. 그의 묘소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그런데 홍의장군의 증조부로부터 5대에 걸친 현풍(玄風) 곽씨 문중의 선영 안에 들어가서도 장군의 묘소를 찾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장군이 죽으면서 남긴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는 유언 때문이다. 장례에 예식을 갖추지 말라고 하였으니 무덤 자체에는 결과적으로 봉분이 없어졌다. 무덤에 볼록한 봉우리가 없고 그냥 평지처럼 납작하다는 말이다. 웬만큼만 입신출세를 해도 축대를 구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왕릉만한 봉분을 쌓으려 드는 게 세속적 가치관에 젖은 인간군상들의 행태인데, 사재를 털어 의병활동을 한 1등 국가공신의 무덤은 그 바로 앞에 가서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어찌 그의 크고 넓은 뜻을 간단히 헤아릴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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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우 장군의 묘 봉분도 없이 초라하다. 그러나 후손들의 소홀한 섬김 때문이 아니라 장군이 그렇게 하도록 유언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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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답사에서 묘소 방문은 중요한 여정이다. 참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를 반추하면서 오늘의 내 삶을 돌이켜보는 것이야말로 역사여행만이 가지는 장점인 까닭이다. 즉, 장군의 무덤이 대구에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달성군 현풍곽씨인 홍의장군 곽재우는 대구 사람인 것이다.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역사여행은 먼저 의령의 생가를 방문하고 달성의 묘소를 참배한 후, 대구 시내 망우공원에 갖춰진 망우당기념관과 임란의병관을 둘러보면 좋다. 망우당기념관에서는 그가 쓰던 장검, 벼루, 마구 등의 유품과 일기, 문집 등을 볼 수 있고, 1층 임란역사관과 지하층 영상실로 이루어진 임란의병관에서는 왜란 7년의 역사를 체계적이고 실감나게 학습할 수 있다. 홍의장군의 묘소와 기념관이 대구에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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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연서원 곽재우 장군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달성군 유가의 달성지 바로 뒤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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