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경주 출생 최제우, 대구에서 죽었다 -2011/02/28-

思美 2011. 7. 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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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출생 최제우, 대구에서 죽었다
-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17)
정만진 (daeguedu) 기자
 

▲ 최제우 동상 달성공원의 관풍루 인근에 있다.
ⓒ 정만진
 
수운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 교조(敎祖)이다. 그의 동상이 대구에 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외래종교에 밀려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민족종교 동학을 창시한 인물의 동상이 어째서 이곳 대구에 우뚝 건립되어 있을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전국 방방골골의 초등학교마다 세워진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므로,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것은 새삼 눈이 가는 일이다. 
 
종교에서 교조의 죽음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동학 교조 최제우는 대구에서 죽었다. 거주지인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잡혀 경상감영으로 끌려와 있던 중 44세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처형당한 것이다. 그는 "등불은 물 위에 밝게 어리되 물과 어긋남이 없고, 기둥은 말라보이나 힘이 남아 있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면서 "높이 날고 멀리 뛰라(高飛遠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최후의 시간을 보낸 처형장은 대구 중심가의 제법 가파른 언덕 위에 있다.
 

▲ 관덕정 약전골목 입구의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병원(지금은 폐원 상태) 뒤에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지만, 그보다도 최제우가 처형된 곳으로 이름이 높다.
ⓒ 정만진
 

약전골목에서 동아쇼핑센터로 나와 대도로를 건너 적십자병원 바로 뒤 오르막길로 100미터만 올라가면 금세 그가 죽임을 당한 처형장에 닿는다. 흔히 사람들은 그곳을 "관덕정"이라 부른다. 종교 때문에 죽은 이들을 기려 건립된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웅장한 건물이 거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관덕정이 마치 수운의 순교와 연관이 있는 듯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그 건물은 최제우를 섬겨 세워진 것이 아니라 천주교도들의 순교를 기려 건립되었다.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덕정 일대는 지금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 높은 지대가 아니지만, 교통과 이동수단이 사뭇 달랐던 예전에는 그곳도 상당히 가파른 언덕배기로 여겨졌을 터이다. 실제로 그곳의 옛 지명은 아미산(峨嵋山)이었다. 아미산은 조선 시대에 군사들을 조련하는 훈련장이자 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는데, '좌도난정(左道亂正, 左는 邪의 뜻)'이란 엄청난 죄목을 가졌던 사상범 수운도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수운은 그렇게 대구에서 죽었으니 그의 동상이 대구에 세워진 것이야 하등 뜻밖의 일도 아닌 셈이다.
   

 

▲ 최제우 동상 관풍루에서 바라본 최제우 동상. 달성공원 내부를 향해 서 있다. 좌우의 향나무가 장엄하다.
ⓒ 정만진
 
최제우의 동상은 달성공원 관풍루 바로 앞에 세워져 있다. 마치 '높이 날고. 멀리 뛰라!'하고 소리높여 외치는 듯 그는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공원 입장객들 상당수는 수운을 만나지도 못하는 채로 멀리 사라져 간다. 그들이 동물 구경에 여념이 없고, 동상 자체도 말끔하게 자란 향나무들로 좌우가 웅혼하게 가려져 있어 어쩔 도리가 없다. 민족종교 동학이 세를 잃어 교조가 처형당한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실정이니, 성지도 아닌 달성공원에나마 동상이 세워진 것도 감지덕지를 해야 할 일인가.
 
수운이 경상감영에서 처형장인 아미산으로 끌려가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의 처형장이 아미산 관덕정 자리가 아니라 지금의 병무청 뒤 전동(前洞) 일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운을 아미산까지 압송하다가는 운집한 추종자들에게 탈취당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걱정한 나머지 경상감영 바로앞[前] 군영(軍營) 자리[洞]에서 형을 집행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물론 통설은 관덕장 자리를 수운의 처형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찌 사람들만 그의 처형을 지켜보았을까! 지금의 병무청 주변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높고 우람한 고목들도 그의 죽음을 생생히 보았을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로초등학교 교정 복판에 버티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수운 최제우의 자취는 없어졌고, 같이 숨쉬고 웃고 울었던 당대의 남녀노소도 모두 죽어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하늘과 땅과 바람과 나무 들만은 여전히 그의 죽음을 증언하리라, 대구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 최제우 나무 사진은 경상감영 자리 옆에 있는 종로초등학교 전경이다. 최제우가 감영에서 처형장인 관덕정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아마도 이 나무는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나무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정만진
 
수운이 죽자 제자들은 그의 주검을 거두어 경산 자인을 거쳐 경주에 당도한 후 용담정 아래에서 장례를 지낸다. 그 날이 3월 17일. 사교(邪敎)를 일으켜 민심을 혼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던 그는 1907년 순종 임금으로부터 사면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3.1운동으로 이어진 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냉동설한보다도 더 엄혹한 식민지 시대와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을 거치면서 무성한 잎새 다 잃어버린 채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버렸다. 봄이 오면 다시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인가.
2011.02.28 19:04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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