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유흥업소 불빛 가득한 '빼앗긴 들'... 안타깝다 -2011/04/07-

思美 2011. 7. 1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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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업소 불빛 가득한 '빼앗긴 들'... 안타깝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19) 항일유적
정만진 (daeguedu) 기자
▲ 안일암 왕건이 숨어 있었다는 왕굴 앞에서 내려다 본 안일암 풍경. 이 암자에서 대구의 항일운동이 시작되었다.
ⓒ 정만진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까지 번진 구한말의 대표적 항일운동이다. 그러나 망국 직전이었으므로 황제와 중앙정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국채보상운동을 하는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순종이 담배를 끊은 것이 도움의 전부였다. 결국 일제의 교묘한 탄압에 시달린 끝에 국채보상운동은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대구 지역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진다. 1915년 1월 서상일, 윤상태 등이 왕건이 피신해 숨어 지냈던 앞산 안일암에 모여 국권 회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하면서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이 그 첫걸음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은 경남 창원 진동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앞장서는 등 활발한 민족운동을 하던 중 1919년 6월 일제에 발각돼 해산된다.
 

▲ 대구지역 3.1운동의 중심이었던 계성학교 본관 건물 아래의 지하실에서 대구 경북 지역에 뿌려진 3.1운동 궐기 전단이 인쇄되었다.
ⓒ 정만진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3·1운동, 대구라고 예외일 리가 없다. 대구의 3·1운동은 3월 8일에 서문시장에서 시작된다. 그 날은 나라 안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큰시장인 대구의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서문시장 장날에는 사람들이 정말 구름같이 모여든다는 데에 착안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그 날 그 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계성학교 자체가 서문시장과 담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독립선언문 등 만세운동 준비물을 들키지 않고 운반하는 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계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은 대구 3·1운동의 주동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계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교사(校舍) 지하의 인쇄실에서 독립선언문을 '가리방'으로 긁어 그것을 경북 지역에 배달하는 등 대구 3·1운동의 주역 역할을 했다. 지금도 계성학교의 적벽돌 고색창연한 본관 건물 앞에 가면 3·1만세운동을 위해 학교 본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프린트하여 대구와 경북 지역에 배포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 3.1운동로 3.1운동 때 대구시민들이 행진한 길이다. 계산성당 건너 제일교회 건물 옆을 지나는 골목길이다. 올라가면 동산병원 구내로 들어선다.
ⓒ 정만진
 

서문시장의 만세운동에는 계성학교 인근의 신명여학교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대구고보 학생들도 앞장을 섰다. 만세 군중은 동산병원 옆 선교사 집단 거주 지역 사이로 난, 지금은 '3·1운동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오르막 샛길을 넘어 현재의 대구백화점까지 밀려갔다. 그러나 기관총을 발사하며 저지하는 일제 헌병들의 무력 행사 앞에서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틀 뒤인 10일에는 남문시장 장날이었다. 체포되지 않은 계성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된 대구 3·1운동은 이곳에서 재현되었다. 이 날 대구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남성정교회(지금의 제일교회) 김태련 장로의 아들 김용해가 만세운동 현장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다. 대구 3·1운동은 74명의 투옥자와 무수한 부상자를 낳은 채 그렇게 막을 내렸다. 

 

 

 

▲ 대구3.1운동의 주역들 이만집과 김태련. 대구YMCA의 초대 이사장과 총무였다. 김태련은 대구 만세시위 와중에 아들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사진은 <대구YMCA80년사>에 실린 것이다.
ⓒ 정만진
 
대구의 항일운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분이 동암(東庵) 서상일 선생이다. 1887년에 태어나 1962년에 타계한 서상일은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무장 항일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제가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우자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을 규합한 후 대구구락부를 만든다.
 
그리고 '청년들을 교육하고 각종 강연회를 열 수 있는 민족의식의 구심점'을 구축하기 위해 1922년 달성공원 앞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 등을 두루 갖춘 조양회관을 지었다. 서상일은 '아침해가 가장 먼저 비치는 곳'이라는 뜻의 조양(朝陽)회관 공사비의 대부분을 혼자서 부담하였다. 애국애족 청년들의 집합장소였던 조양회관은 식민지 시대 내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는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을 듣고 제일 먼저 거리로 뒤어나와 만세를 외친 이들도 바로 이곳에 모여 있던 청년들이었다. 조양회관이 지금의 자리인 망우공원 비탈로 옮겨진 때는 1982년이다.
 

▲ 광복회관 보통 '조양회관'이라 부른다. 망우공원에 있다.
ⓒ 정만진
 

그런가 하면, 대구의 항일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뒷날 '주먹대(隊) 사건', '연구회 사건', 'RS사건' 등으로 불리게 되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28년에 105명이나 일제 경찰에 잡혀 구속 또는 불구속 송치된 것만 보아도 그 규모가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하지만 대구사범학교 교사들은 좌절하지 않고 1930년 연구회를 결성하여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다시 37명이 구속된다. 대구사범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은 면면히 이어져 1941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가르치던 국민학생들까지 합쳐 300여 명이나 검거되기도 한다.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교정에는 그들의 꿋꿋한 항일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 기념비 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있다.
ⓒ 정만진
 
▲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기리는 탑 대구상고 야구장 뒤편, 달서공고 정문 앞 인근에 있다.
ⓒ 정만진
 
술집 가득한 '빼앗긴 들'... 항일운동가들 이름 잊혀진 지 오래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중략)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대구 출생 항일운동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마도 민족시인 이상화일 것이다.물론 그가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기 때문은 아니고, 울분과 격정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덕분이다.
 
그가 한때 살았던 집은 대구 시내 중심가인 반월당 지역에 자리한 채 '상화고택'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고, 달성공원에 있는 '상화시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시비(詩碑)로 이름이 드높다. 또한 그의 묘소도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어 관심을 가진 방문객들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독립군 장군이었던 형 이상정과 상화 시인이 나란히 누워 있지만 타지 사람들은 물론 대구 시민들 중에도 그의 묘소가 시내에 있다는 사실을 별로 알지 못한다.
  
▲ 민족시인 이상화와 독립군 이상정 장군의 묘소 형제가 나란히 누워 있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 정만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무대는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과 상동 일대, 즉 수성못 아래의 너른 벌판(속칭 '들안길')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화가 잠깐 교사로 근무했던 교남학교(지금은 만촌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신세계아파트를 남긴 대륜고등학교) 일대는 당시 그냥 허허벌판이었으니, 시인은 그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며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목청껏 토로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들판에 가보면 민족 자주의 흔적도 상화의 자취도 찾을 길 없고, 오직 술집과 모텔, 대형식당들만 가득 들어차 있다. 유흥업소의 불빛과 취객의 호기가 허공을 찌르는 '빼앗긴 들'에 서면 "이상화는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으니 그 이름이나마 알겠지만, 그의 형 이상정을 비롯하여 이윤재, 이시영 등 생애를 바친 항일투사들의 노고는 과연 누가 기릴 것인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고 이상화는 목이 찢어지도록 외쳤지만, 그 들에 지금은 '봄' 대신 여관과 대형식당들이 가득 들어찼다.
ⓒ 정만진
 

사정이 그러한 판에 이상화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대구가 낳은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기리는 기념탑도 앞산공원 초입에 있지만, 눈여겨 보는 이 드물고, 한글학자 이윤재의 무덤도 금호강변 산비탈에 버려진 듯 초췌한 모습으로 나무그늘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백기만 등 숱한 항일운동가들의 이름은 잊혀진 지 오래이고, 그들을 한꺼번에 모신 선열공원도 마련되기는 했지만 그 이름을 작은 동명에서 따와 신암선열공원이라 짓는 바람에 저절로 외형적 권위마저 잃어버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래서야 어떻게 대구의 정신이 살아 펄펄 역사를 이루며 먼 훗날까지 면면히 이어질 것인가.
 
▲ 백기만과 이시영 신암선열공원에 있는 백기만의 묘소와 앞산공원 입구에 있는 이시영 기념탑(오른쪽)
ⓒ 정만진
 

▲ 한글학자 이윤재의 묘 이곳 지리를 어지간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정만진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서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이 북경성보다도 아름답다는 평판을 얻었던 읍성을 파괴하고도 당당하게 '대구시민'으로 거주했던 곳이다. 하지만 대구는 이상정 이상화 형제, 이시영, 이윤재, 서상일, 백기만 등등 뜨거운 불덩이와도 같은 독립투사들을 낳음으로써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얻었다.

 

항일 유적들의 초췌한 면모들을 보면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항일 운동가를 기리는 운동이 전개되어 시민정신이 펄펄 살아숨쉬는 대구를 가꾸어가야 마땅하다. 이런저런 친일파의 후손들이 예나 이제나 대구의 권력 중심을 틀어쥐고 있어서야 어찌 달구벌에 앞날이 있을 것인가! '빼앗긴 들'을 되찾았으니 이제는 들판에 곡식을 심고 나무를 심자! 

2011.04.07 10:30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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