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우리나라를 다녀갔던 프랑스 여행가 샤를 바라는 대구읍성을 보고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고 극찬한다. 그러나 이름높은 친일파였던 대구군수 박중양은 1906년 이후 대구읍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읍성 밖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일본인들이 '성곽을 부숴버려야 장사가 잘 된다'면서 청탁을 하자, 박중양은 조정이 읍성 파괴를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밤에 성곽을 무너뜨려버리는 무도한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대구읍성의 파괴는 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 단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황제의 명령까지 거스른 채 대구읍성을 파괴했던 박중양이 벌을 받기는커녕 이등박문의 지원을 받아 평안북도 관찰사로 영전했다. 실제로 대구읍성이 파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10년 경술국치의 비극이 찾아온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금수강산 이 나라가 '왜구'라며 줄곧 낮춰보았던 섬나라 열도의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넘겨주며 합병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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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공원 대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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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 지경이 되자 한말(韓末) 자주(自主) 자강(自强)운동의 대표적 횃불인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라[國]의 빚[債] 1300만원을 갚을 수 있다면 대한의 자주 자강이 가능하다고 본 애국 백성들이, 대구에서 최초로 궐기한 이래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떨쳐 일어났다. 나라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획기적 국민운동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최초(!)로 불붙은 것이다.
1907년(광무 11년) 2월, 서상돈(徐相敦)과 김광제(金光濟) 공동명의로 된 격문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서'가 발표된다.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격문 중 일부를 <대구의 향기>에서 찾아 다시 읽어보자.
(전략) 일본이 청로전쟁에서 소(小)로서 대(大)를 이긴 것은 바로 병정들 가운데 결사대가 있어 혈우육풍(血雨肉風)이 휘몰아치는 적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마치 즐거운 낙지(樂地)로 가는 것과 같이 했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은 또 그들대로 패물을 팔고 부녀자들은 반지를 팔아 군비에 보태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함으로써 마침내 큰 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없겠는가! (중략)
지금 국채 1,300만원은 우리 한제국의 존립과 직결된 것이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금 나라의 국고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해결할 도리가 없는 형편이다. 이것을 나라에서 갚기를 기다린다면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나라나 우리 민족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 국채를 갚는 방법의 하나로 크게 노고하지 않고 또 자기 재산의 손해봄 없이 크게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2천만 동포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이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원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국민된 당연한 의무로 잠깐 동안 이같은 실천을 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의 결사대나 부녀들이 패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과 비교할 때 얼마나 가벼운 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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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공원 달구벌대종 밤에 본 풍경이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제야의 종' 행사가 벌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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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300만 원은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거금이었다. <대구의 향기>에 따르면 이 국채는 '한국의 자율적 의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군사적 압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정부의 강요로 인한 것'이었다.
2월 21일 대구에서 민의소(民議所)가 창립되어 첫 회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500원이 즉각 모금되었다. 500원은 당시 정부예산 1300만원의 약 0.004%이다. 2010년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1년 예산 300조의 0.004%인) 120억이라는 거액이 한 자리에서 갹출된 것이다. 대구의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의 반응과 기대는 너무나 뜨거웠다. 고종도 금연을 선언했다.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은 앞다투어 관련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여 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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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공원 야경 길가에 늘어선 나무에 휘황한 불을 달아놓는 것이 국채보상공원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다. 국채보상공원에는 국체보상운동을 증언하는 '증거물'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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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일제 통감부는 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맡은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고 간부들을 위협하다가 마침내 1908년 7월 12일 신문사 총무 양기택을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 양기택은 네 차례 공판 끝에 9월 29일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그 이후 운동은 열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일제의 간교한 저지책이 결국 성공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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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공원의 낮과 밤 (사진 왼쪽) 낮에 본 국채보상공원의 풍경. 사진만으로도 국채보상공원의 규모와 수준이 충분히 가늠된다. (오른쪽) 밤에 본, 국채보상공원 안의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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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향기>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비록 그 끝은 흐지부지되었으나 나라를 빼앗을 정도의 막강한 힘과 간교(奸巧)를 함께 행사한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던 만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節米)로 되찾으려던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자주자강 운동은 영원히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고, 한국과 한민족이 존속하는 한 이 국민운동의 발상지였던 대구는 길이길이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기억될 것이다'하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흔적을 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곧 이어 식민지로 전락했으니 그렇게 되고 만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그저 시내 중심가에 작은 공원을 하나 만들어 놓고 국채보상공원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나간 과거에 역사적 가정을 덧붙여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만약 대구에 국채보상운동을 뚜렷하게 증언하는 유적이 무엇 하나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다만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어내었던 서상돈의 무덤이 수성구 범물동 공원묘지에 고이 남아 있어 그나마 후손들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준다. 특히 그의 무덤은 너무나 초라하여 담배 끊고 비녀 뽑아 나라를 지키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엿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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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그의 묘소는 대구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서상돈은 당시 거부였지만 묘소는 화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초라할 지경이어서 그의 정신세계를 잘 나타내주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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