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4.19는 대구의 명덕로터리에서 시작되었다 -2011/05/10-

思美 2011. 7. 1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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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대구의 명덕로터리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22) 민주화운동
정만진 (daeguedu) 기자

▲ 모교를 빛낸 인물 전두환 장군(대통령 역임)과 노태우 장군(대통령 역임)

의 사진이 나란히 게시되어 있는 대구의 모 고교 중앙 현관 풍경

ⓒ 정만진
 
 
추측하건대, 우리나라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은 말할 것이다. "대구는 민주화운동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하지만 아니다. 대구는 1960년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2.28학생의거가 일어났던 민주화의 성지(聖地)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뇌리 깊숙히 '대구는 민주화 운동과는 관련이 없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을까. "마산" 하면 '김주열'을 떠올리고, 광주항쟁 직전의 부마항쟁도 기억하면서, 어째서 "대구" 하면 4월혁명의 위대한 전초였던 2.28학생의거를 연상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인 '군사 독재의 본거지', '보수의 진원지' 같은 어두운 빛깔에만 주목하는 것일까.
 
대구의 모 고등학교에 가면 중앙 현관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건 근무하는 교직원이건, 아니면 교장실이나 행정실을 찾아온 방문자이건 가릴 것 없이 이 두 사람의 거대한 사진을 눈에 담지 않고는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의 사진은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위풍당당히 게시되어 있는 것일까. 학교가 두 사람의 사진 위에 커다랗게 내건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母校를 빛낸 同門>이기 때문이다.
      
'모교를 빛낸 동문' 전두환과 노태우
 
이렇게 고등학교 중앙 현관에 나란히 내걸린 두 사람의 사진은 대구 사람들의 인식을 잘 말해주는 상징으로 해석되지만, 상징은 또 있다. 그 상징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있다. 이 학교에는 대로변에서 잘 보이는 곳에 항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비가 하나 서 있다. 바로 그것이다.
 
항일운동 기념비는 일제 때 독립을 위해 대구사범학교(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오랫동안 투쟁하고 희생된 정신을 기려 세워진 것이다. 그 옆의 것에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비문의 주제문과 그 아래에 적힌 '대통령 박정희'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두 기념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박정희는 1942년 10월 당시 1년에 조선인은 1명 정도만 입학했던 일본육사에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이라는 혈서를 쓰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일본 육사 졸업 후 독립군들이 활약하던 만주에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로 근무했다.
 

▲ 나란히 선 두 기념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내에 나란히

선 두 기념비. 왼쪽 것은 박정희를, 오른쪽 것은 항일운동 학생들을 기리는

내용이다.

ⓒ 정만진
 
 
지금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두 개의 기념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부속학교가 아닌 본 학교, 즉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자체에도 그 흔적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건물의 현관 벽에 시퍼렇게 붙어 있는 흉상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시퍼렇게 붙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흉상의 실물 색깔이 시퍼렇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신 시대 이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지금의 이명박 정부 시절 그 어느 때에도 흔들림없이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 경북대 사대 구관 현관에 걸려 있는 '박정희 상' '용기 있는 혁명가

민족 중흥의 위대한 정치인' 등의 찬사가 흉상 아래에 각인되어 있다.

ⓒ 정만진
 

흉상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박정희 상(像)
대한민국 제5, 6, 7대 대통령
가난한 농민의 아들
성실한 교육자
용기 있는 혁명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인
193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모교를 위하여 이 교사(校舍)를 세우다
 

 

광야를 불태운 1960년 2월 28일의 대구 학생들

  

1960년 2월 27일, 이승만의 자유당은 대구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 대회를 열었다. 자유당은 관권을 동원하여 가구당 1명 이상씩을 강제로 유세장에 동원하였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이번에는 민주당이 유세를 열었다. 자유당은 학생들이 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요일인데도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강제 등교령을 내렸다. <대구시사>의 기록을 보면 '자유당의 불법적인 지시가 내려지자 각급 학교에서는 이 지시를 철저하게 수행하였다.'
 
하지만 자유당의 지시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복무한 학교들은 갑자기 임시 시험을 친다, 단체 영화관람을 한다, 심지어 토끼사냥을 간다 등의 어처구니 없는 핑계를 대면서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비록 어렸지만 자신들마저 정치도구로 희생시키려 하는 어른들에게 한없이 분노하고 절망했다. 경북고등학교 800여 학생이 앞장을 서자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상고 등의 고교생들은 물론 일부 중학생들까지 명덕네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경북도청(대구와 경북이 분리되기 이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 왼쪽). 오른쪽 사진은 대구 시내의 한가운데인 중앙통에서의 시위 장면. (사진은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의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에 실린 것을 스캔했다.)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는 이 날의 의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유당 정권의 강계를 파악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었고, 그 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학생들은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숱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중략)
 
2.28의거는 광야를 불태우는 한 알의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3.15 마산의거, 4.19 대학생시위,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이어져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 최초의 민권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2.28 대구학생 민주의거는 가난과 독재, 부정과 불의에 항거한 대구 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해방과 더불어 수입한 서양식 민주주의의 한국판을 선구한 사건이었다.
 
 

 

▲ 2.28기념탑의 본래 모습과 위치 1962년 4월 19일 완공된 2.28민주의거기념탑은 그 날의 시위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명덕로터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탑은 그로부터 27년 7개월 후인 1989년 11월 14일 철거되었고, 두류공원으로 이전되면서 시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사진은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발간한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의 화보에 실린 것을 스캔했다.)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2.28기념탑이 사라진 명덕로터리의 풍경 2.28기념탑이 사라진 명덕로터리에는 한나라당이 내건 와 진보싱당과 민주노동당이 내건 <소수 위한 기숙사 취소하고 모두 위한 의무급식 식시하라> 현수막이 좌우 대칭으로 걸려 있다.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여성의 왼쪽에) 2.28기념탑이 두류공원으로 옮겨갔다는 내용을 알리는 표지석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이 사진이 곧 대구의 '오늘'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듯하다.
ⓒ 정만진
 

그러나 2.28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갔다. 그렇게 된 데 결정적 악영향을 끼친 것은 기념탑을 인적이 한산한 두류공원 안으로 옮겨버린 대구시의 처사였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을 보면 '대구시는 대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가운데 (중략) 차량도 급증하면서 명덕로터리 일대에 교통체증이 발생하자 (2.28기념탑) 이전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0년 시위의 주동자였던 이대우(경북고), 최용호(대구고) 등은 대구시의 방침에 반대한다. 이는 경북일보가 주최한 2.28 제29주년 기념좌담회(1989년 2월 28일)에 잘 나타나 있다.

 

이대우 : 프랑스 같은 데는 도로와 건물을 옮길지라도 기념비적인 것은 보존한다. 부산의 안락동 충렬탑은 부산 교통에 방해가 되지만 누구 하나 옮기자는 의견이 없다. (중략) 2.28기념탑이 학생 데모의 의미를 주니까 당국이 옮길 찬스를 노리다가 시민들이 교통방해를 내세우자 장소를 갑자기 옮기려 하고 있다.

 

최용호 : 그렇다. 탑만 옮긴다면 의미가 없다. 더욱이 교통해소를 위해 옮기는 것이 아니라 좀 더 2.28정신을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겠다.

 

그러나 반대의견은 끝내 묵살되었다. 1989년 11월 14일 2.28기념탑은 대구시에 의해 철거되었고, 1990년 2월 28일 두류공원 안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가야 볼 수 있는 2.28기념탑이 시민들의 정신 속에 굳건히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그것이 명덕로터리에 버티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2.28기념탑 철거와 이전은 대구시민들의 정신세계에 깊게 뿌리내려온,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는 올곧은 정의감이 안개처럼 소멸되도록 만든 정치적 상징조작이었던 것이다. 

 

▲ 2.28을 기념하는 석조물들의 현주소 명덕로터리에 있던 2.28기념탑은 두류공원으로 옮겨진 후 시민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졌다. 지금 명덕로터리에는 횡단보도 앞에 기념탑이 옮겨갔다는 표지석이 있지만 아무의 눈길도 끌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에 불과하다. 사진 가운데와 오른쪽것은 경북고와 대구고 교정에 세워진 2.28기념탑이다.
ⓒ 정만진
 

 

2.28정신 되살리려는 기념사업회의 활동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의장 안인욱)는 2010년 12월 30일 <2.28기념사업50주년>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그 동안 수집되었던 2.28 관련 자료들을 총망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3.15, 4.19, 부마항쟁, 6.10항쟁만 들어 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2.28이 추가되도록 국회를 추동함으로써 향후 2.28정신을 되살리는 여러 사업들에 추진력이 실릴 계기를 마련하였다. 

 

2.28대구민주운동은 '이승만 정권이 1960년 실시한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2월 28일 야당 후보의 선거 유세가 대구 시내에서 계획되자 일요일인데도 학생들을 등교하도록 지시한 것이 발단이 된 사건(으로) 독재정권의 노골적 선거 개입에 항거해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등 대구 시내 8개 고교 학생 수백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는 4.19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조선일보 2005년 3월 2일자).' 따라서 대구시는 4.19의 도화선이 된 2.28을 국민들이 두루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국민들은 대구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샘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의 표지와 안인욱 의장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는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을 2010년 12월 30일에 펴냄으로써 그 동안 모은 자료를 총정리했다. 사진은 책의 표지로, 안인욱 기념사업회 의장의 사진을 기자가 표지에 넣어 재편집한 것이다.
ⓒ 정만진
 

▲ 2.28기념탑 지금은 두류공원 안에 있다. 명덕로터리에 있을 때에는 오며가며 수많은 시민들이 자연스레 '2.28'을 접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먹고 찾아오는 극소수의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2.28기념탑은 있는 둥 마는 둥 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 정만진
 

2011.05.10 15:18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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