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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랑의 묘소. 사진 우측 상단에 기도원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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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고, 그저 조선 말기, 부부가 들에 일을 나간 사이 집에 불이 났다. 일곱살 난 누나는 세살짜리 남동생을 살리려고 품에 안은 채 엎드려서 버텼다. 누나는 죽고 동생은 살아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동생은 뒷날 누나의 무덤 앞에 '義姉李娘之墓'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의로운 누나 이랑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에 따르면, 본디 이 무덤과 비석은 수성구에서 경북 청도로 넘어가는 중간쯤인 냉천동의 대로변에 있었다. '가창면 냉천동 길가에는 義姉李娘之墓라는 조그마한 비석이 서 있고' 하는 표현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랑지묘를 찾아가보면 결코 길가에서는 볼 수가 없다. 일반인은 다니지 않는,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좁은 산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가까스로 볼 수 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 무덤과 비석을 이런 외진 곳으로 옮겼을까.
아마도 신작로를 낸다고 그렇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길보다 정신이, 차보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을까. 수성구를 벗어나 달성군 가창면으로 가는 답사 여정의 첫머리에서, 이랑비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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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록마을 들머리의 풍경. 사진의 왼쪽 방향이 녹동서원과 남지장사로 가는 길이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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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비는 도로의 오른쪽 산비탈에 있다. 물론 대구에서 나가는 것을 기준으로 한 설정이다. 가창면 답사는 걸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를 몰고 도시를 빠져나갈 때의 오른쪽 면에 있는 것들부터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 반대편의 것들을 보는 식으로 여정을 잡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그래서 이랑비부터 보았다.
가창면 답사의 꽃은 말할 것도 없이 녹동서원이다. 수성구 만촌동의 모명재가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귀화가 낳은 유적이라면, 가창의 녹동서원은 일본국 장수 사야가(沙也加, 우리식 이름 김충선)의 귀화가 낳은 유적이니 좋은 대비가 된다. 그러나 그 둘이 쌍벽을 이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명재는 반쯤 허물어진 고가 한 채와 집 뒤의 무덤이 전부이지만, 녹동서원은 전혀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충선은 임란 때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쳐들어 왔다가 귀순한 사람이다. 본디 조선 정벌 전쟁에 반대했고, 평화를 사랑했으며, 당시 일본 국내의 집권 세력에 비판적이었던 장수로 전한다. 그는 귀화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물론 이괄의난, 병자호란 등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워 본래 조선인 출신 장수보다도 더 이름이 높을 지경이 된다. 그 결과, 녹동서원도 조선인 유생들이 상소하여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다.
녹동서원은 2011년 현재에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원 본채의 중건은 끝이 났고, 녹동사(鹿洞祀)는 막바지 마무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시관 겸 교육장인 충절관이 서원 본채 옆에 우뚝 건립되어 있고. 한일우호관이라는 이름의 현대식 건물도 산뜻하게 새로 신축되고 있는 중이다. 모명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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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동서원 (별관) 한일우호관 녹동서원은 본채도 새로 중창했지만, 그 옆에 신축 중인 서양식 건물 '한일우호관'도 한몫을 할 '물건'으로 기대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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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원에서 계속 산속으로 들어가면 남지장사가 나온다. 남지장사는 조선 초기의 고승인 무학대사가 수도를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킨 절로도 이름이 나 있다. 남지장사라는 이름은 팔공산의 북지장사에 견줘 그렇게 붙여졌다. 이 절은 684년(신문왕 4)에 창건된 신라 고찰로 전하지만, 우리나라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당시 건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남지장사에서는 특히 청련암이 볼 만하다. 대웅전, 극락전, 명부전 등 사찰의 본채들과는 상당히 떨어져서 외따로 오른쪽 산속에 지어져 있는 이 청련암은 밖에서 보면 그저 일반인의 가정집인 양 여겨질 만큼 특이한 건물이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 함부로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다.
고려 개국공신인 전이갑 전의갑 두 형제 장군을 기려 세워진 한천서원은 녹동서원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있다. 대략 이랑비와 도로를 직선으로 마주한 채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방하다. 이랑비와 마찬가지로, 역시 대도로변에서 한참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천서원의 지금 건물은 1838년(현종 4)에 창건된 당시의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150여 년 후인 1989년에 복원된 것이다. 그 탓인지 알 수 없으나 한천서원은 달성군청 홈페이지의 서원 소개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불우이웃' 신세가 되어 있다. 어쨌든 한천서원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하나 있으니, 안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명의의 기념식수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혹 고인돌에 관심이 많은 답사자라면, 한천서원으로 가는 우회전 길로 접어들기 직전에 있는 교회의 뒤쪽부터 가보아야겠다. 이 교회 뒤의 밭에 고인돌들이 널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일제 초기만 해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고창, 화순보다도 대구에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다더니, 이런 곳에까지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는 것을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이 곳이 시내에서 먼 덕에 고인돌들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고이 남아 있구나. 고인돌이 부잣집이나 관공서의 치장물로 잡혀 가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이 모양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누군가의 무덤이었거나 소중한 종교적 표식이었을 텐데, 이제는 그냥 못생긴 돌덩어리로 천대받고 있다니!
고인돌이나 한천서원을 보고 나면 이윽고 달성군 가창면의 거의 끝 부분에 와 있다. 그대로 달리면 수성구 안으로 진입한다. 하지만 한 곳 더 봐야할 답사지가 있다. 가창댐으로 들어가는 좌회전을 해서 조길방가옥으로 가야 한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00호인 조선 후기 초가집이다. 초가집이 이만큼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말끔하게 남아 있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 집을 지은 사람 조길방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조길방은 스스로도 건축을 마친 후 칠기나무로 된 보를 사용하여 집을 지은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하는데,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처럼, 정성을 쏟아 최선을 다했으니 그에게 유방백세(流芳百世)의 영예를 선사해도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조길방가옥 마루에 걸터앉아 시골에 사는 정취를 맛본다. 본채 오른쪽에는 가을이면 탐스러운 모과가 노랗게 무르익어 찾아온 사람들을 따사로이 반겨준다. 그보다 조금 늦은 만추에는 저 아래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밭두렁 위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홍시들이 고운 빛깔로 사람을 매혹한다. 언제나 쉬지 않고 콸콸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는 항상 깨어 있으라는 준엄한 꾸짖음 같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함안 조씨들은 지금부터 11대조 이전에 난리를 피해 이 산속으로 이주하여 왔다는데, 나는 그들이 200년도 더 이전에 버린 그 아비규환 속으로 하릴없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에, 조길방가옥에서 되돌아 나왔을 때 도로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는 폐교에 들러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가야겠다. 그 폐교를 보수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구미술광장이다. 미술하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날마다 작품을 만들어 전시해두는 곳이다. 운동장이었던 잔디밭에는 조각들이 세워져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입주 화가들의 그림이 가득한 이 대구미술광장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정녕 해법은 예술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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