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내 무덤은 볼품없이 납작하게 만들어라" -2011/06/25-

思美 2011. 7. 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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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은 볼품없이 납작하게 만들어라"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35) 구지면 일원
정만진 (daeguedu) 기자
달성군 구지면 일원으로 떠나는 답사여행은, 동구 일원을 두고 여정을 짤 때와 흡사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동구 일원을 둘러볼 때 팔공산을 별도의 독립된 답사지로 제외했듯이 구지면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슬산, 그렇다. 비슬산 답사는 구지면 일원을 둘러보는 여정에서 제외하여 독립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만에 둘러보는 일이 불가능하다.
 
비슬산은 유가사나 소재사에서 대견사지로 올라가는 남쪽과, 용연사 석조계단을 볼 수 있는 서쪽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단숨에 둘러보기가 곤란하다. 용연사는 비슬산 답사에서 분리하여 현풍과 구지를 살피는 여정에 넣는 게 좋다. 용연사- 논공 천황당- 현풍향교와 석빙고- 구지 도동서원- 홍의장군 묘소, 이렇게 다니면 시간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멋진 답사 여정이 되기 때문이다.
   

 

 

 

 

용연사 석조계단
ⓒ 정만진
 
용연사에서 특별히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문화유산은 1673년(현종 14)에 건조된 석조계단이다. '석조'라면 돌로 만들었다는 뜻이고, 뒤에 '계단'이 붙었으니 그렇다면 석조계단은 돌로 만든 계단? 얼마나 어마어마한 돌계단이기에 나라의 보물(제 539호)로까지 지정되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아니다. 용연사의 계단은 밟고 올라가는 층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계단(階段)이 아니라 계단(戒壇)이다. 계단은 불교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戒) 의식을 실시하는 높은 곳[壇]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도사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불상 없는 법당에서 통유리를 보고 합장하네
 
용연사의 석조계단은 대웅전과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적멸보궁 뒤편에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니 법당 안에 불상은 없다. 그렇다면 합장은 어떻게 하나? 적멸보궁 안에 들어가보면, 보통의 금당이면 불상이 있을 자리 뒤의 벽을 없앤 대신 통유리를 달아 그리로 계단이 잘 보이도록 해놓았다. 신도들은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석조계단 우측의 석가모니 사리 안치 지점을 향해 소원을 빈다. 이 희귀한 정경을 보는 것이 용연사를 찾아오는 최고의 덕목이 아닐까. 극락전만 물끄러미 바라보다 휙 돌아서는 답사객들을 남몰래 탓해본다.       

 

 

 
 

논공 천왕당
ⓒ 정만진
 
용연사 극락전과 적멸보궁 사이를 지날 때 유심히 보면, 비슬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안내판 하나가 아주 작은 덩치를 하고 서 있다. 용연사에서 내려와 반송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가다가 왼편의 김흥리로 들어가면 거기서도 비슬산으로 갈 수 있다. 그 길은 임도인데, 초곡산성 옆구리를 거쳐 유가사까지 이어진다.
 
김흥마을을 왼쪽에 두고, 아니 비슬산을 왼쪽에 끼고 논공으로 들어가는 고개를 넘는다.  논공읍 북리 462번지에 있는 천왕당을 찾아가는 길이다. 천왕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당(祭堂)이다. 천왕당을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흔히 서낭당이라 불러왔다. 서낭당의 한자식 표기는 성황당(城隍堂)으로, 정비석이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 이래 더 많이 알려졌다.
 
논공천왕당은 논공가톨릭병원 맞은편의 불쑥 솟은 봉우리 꼭대기에 있다. 논공 읍내가 초행길인 답사객은, 천왕당이 길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느라 헤맬 공산이 크다. 언뜻 생각하면 민속문화재인 만큼 논공천왕당이 제법 그럴 듯한 옛날식 종교시설이 아닐까 싶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주 작다.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보면 어른의 어깨 밑으로 오는 아주 작고 앙증맞은 집 하나가 고목 아래에 놓여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논공천왕당이다. 1853년에 처음 지어졌고, 지금 자리에 옮겨져 새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1924년이다.   
 
 

도동서원
ⓒ 정만진
 
용연사와 논공천왕당을 둘러보면서 몸을 풀었다면, 이제부터가 오늘 여정의 본격적인 답사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이름을 가진 도동서원으로 향하고,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이니 어찌 대단하지 아니한가. 대구로 돌아가는 길에 들르게 될 현풍석빙고 또한 국가 지정 보물 673호이니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다.
 
도동서원의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제 350호이다. 조선 5현(五賢)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김굉필 선생을 모시는 이 도동서원은 낙동강을 바라보는 천혜의 굽이 안에 너무나 조용히 앉아 있다. 그 까닭에, 답사객들은 갑자사화(1504년)와 무오사화(1498년)의 참혹을 깜빡 잊기 일쑤이다. 흔히들 서원 앞의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며 "이 나무, 김굉필 선생이 심은 거야. 500년도 더 되었어!"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데 그친다는 말이다.
 
김굉필 선생의 묘소가 도동서원 뒤편 산자락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혹시 묘소조차도 관광지로만 인식하는 무례한 사람이 있어 함부로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겨대면 난감한 일인 까닭이다. 그런 이에게는 재빨리 친절을 베풀어, 서원에서 왼쪽으로 올라 다람재에 가면 보기드문 절경을 볼 수 있다고 자상하게 안내를 해야 한다. 실제로 다람재에 올라 낙동강과 첩첩산중에 에워싸인 도동서원 전경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즐겁게 한다'는 말의 유래가 헤아려질 만큼 유쾌한 경험이니, 그렇게 유혹(?)을 한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될 소지는 없다.   
 

 

 

 

 

홍의장군의 무덤이 있는 곽씨 문중 묘소 (왼쪽은 입구의 창의구국 비)
ⓒ 정만진
 
도동서원에서 구지면 소재지로 나오면 길은 세 갈래로 나뉘어진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현풍읍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홍의장군 묘소에 닿는다. 장군의 묘소는 오르막을 이루던 도로가 갑자기 뚝 떨어지면서 내리막으로 돌변을 하는 급한 굽잇길의 옆구리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유념해서 찾지 않다가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나 묘소 옆 도로를 지났으면서도 홍의장군께 재배를 하지 못했대서야 누가 믿겠는가.
 
 

▲ 곽재우 장군의 무덤 묘비에 '곽재우' 또는 '郭再祐'라 쓰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묘역 안에 들어서고도 찾지 못하는 방문객이 한둘이 아니다.
ⓒ 정만진
 
도로변에 바로 붙은 홍의장군의 묘소는 알고 보면 정말 찾기가 쉽다. 만약 구지에서 달려와 그냥 지나쳤다 하더라도, 돌아가는 길에는 저절로 눈에 들어오니 찾을 것도 없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광활한 주차장이 도로변에 마련되어 있고, 장군의 문중에서 산비탈 전체를 묘역으로 꾸며 놓았으니 아니 보고 지나가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묘역 안으로 들어온 이후이다. 장군의 묘소를  찾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정말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사전지식이란 임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장군이 홍의장군 곽재우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름이 한자로 '郭再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무덤에 봉분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왜군들이 왕릉을 파헤치고 종묘를 불살랐는데 신하된 자의 무덤을 어찌 번듯하게 꾸밀 수 있겠느냐는 것이 장군의 충정이었다. 그 때문에 '아무려면 홍의장군인데 묘소가 제일 그럴 듯하지 않겠나' 식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곽씨 문중의 묘역 안으로 들어가도 장군의 무덤을 찾지 못한다. 가장 낮은, 제일 볼품없는 무덤이 바로 장군의 것임을 그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묘비에서 '재우' 또는 '再祐' 두 글자를 찾는 사람도 낭패를 면할 수 없다. 그런 글자가 새겨져 있는 묘비는 아무데도 없다. 장군의 묘비에는 '忠翼'(충익) 두 글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장군의 시호가 충익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력으로 묘소를 찾아내지 못한다. 
 
 

한창 이건 공사 중인 현풍곽씨12정려각
ⓒ 정만진
 

홍의장군 묘소를 참배하고 대구로 돌아가는 길에 현풍 읍내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국가 보물인 석빙고를 비롯하여 현풍향교와 포교당, 그리고 읍내로 진입하기 거의 직전 지점에  있는 현풍곽씨12정려각을 보기 위해서이다.

 
구지면 소재지를 왼편에 두고 현풍으로 오다 보면, 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가는 표식이 보이는 지점 쯤의 좌측에 제법 그럴 듯한 건축물 하나가 나타난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와가인데 가로로만 길쭉할 뿐 그외의 장식은 전혀 없다. 정말 특이하다. 12개나 되는 정려를 한곳에 모아서 넣으려니 건물이 그렇게 길다랗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이 건물이 바로 현풍 곽씨들이 자랑하는 12정려각이다. 한 성씨의 집성촌에서 이토록 많은 정려가 탄생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예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옮겨짓는 중이라 현풍곽씨12정려각은 현장에 가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2011년 6월 10일 기준).
 

 

현풍 석빙고
ⓒ 정만진
 

현풍 읍내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볼거리는 석빙고이다. "석빙고" 하면 경주의 것만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소식이겠지만, 대구 인근에는 창녕과 청도, 그리고 현풍에도 석빙고가 있다. 현풍석빙고는 달성문화원 건물 뒤편의 언덕 아래 개울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찾는 것이 좋다. 또, 석빙고 앞에는 차량 진입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일찌감치 현풍초등학교 인근의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한 후 걷는 것이 좋다. 그래봐야 100m 안팎이다.
 
현풍 석빙고는 국가 지정 보물 제 673호로 경주의 것보다 이른 173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경주는 1733년). 작은 시골이었던 현풍에까지 석빙고가 만들어진 까닭은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주목받을 만한 일이다. 물론 대구에도 석빙고가 있었다. 하지만 읍성 파괴 때 같이 헐려버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비석만 남아 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만약 지금쯤이 시장기가 진동할 무렵이라면 저 유명한 '현풍곰탕'을 한 그릇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행의 재미 중 한 가지가 바로 각 지방 고유의 맛을 즐기는 일 아닌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구경을 다 마치고 나서 곰탕 한 그릇 먹기로서니 누가 그것을 지나친 호사라 탓하리. 혹, 홍의장군께서 꾸짖으실지도 모르니 아까 묘소에 찾아뵈었을 때 소주 한 잔 올리는 예의 정도는 진작에 갖추었어야 옳으리라.
2011.06.25 12:20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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