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명덕로터리를 점령한다.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주의 수호의 햇불을 든 것이다. 이 날의 시위는 4.19의 도화선이 된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62년 4월 19일, 명덕로터리에는 학생들의 의거를 기념하는 탑이 세워진다. 그 이름 '2.28기념탑'.
2.28기념탑, 대구의 중심부인 명덕로터리에 있을 때에는 365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서구 두류공원 안에 있다. 이곳으로 옮겨진 뒤로는 생일날(2월 28일)에나 정치인과 고위관료들의 예방을 받을 뿐 그 외에는 거의 잊혀졌다.
달서구 성서를 지나 달성군 하빈으로 순회하는 역사문화 답사여정은 두류공원의 2.28탑에서 시작하면 안성마춤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2.28학생의거에 대해 잠시나마 되돌아볼 수 있고, 지하철 역에서 가까우니 접근성도 뛰어나다. 사통오달인 버스 노선도 답사여행 일행의 집합을 쉽게 해준다. 또, 몰고온 자가용들을 세워두기에 적합한 주차장이 탑 바로옆에 마련되어 있다는 점도 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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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동상과 시비 (두류공원)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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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2.28탑을 마주보고 있는 '인물동산'을 건너뛸 수는 없다. 이곳에는 이상화, 백기만, 이장희, 현진건 등 대구 지역을 대표할 만한 문화인물들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또 그들이 남긴 작품의 일부가 돌에 새겨져 조각작품의 멋을 뽐내며 곳곳에 서 있다. 비석 뒤에 약력도 쓰여 있기 때문에 조촐한 학습효과도 거둘 수 있다.
두류공원을 떠나 계명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간다. 대명동에 있던 본래의 계명대와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이 흔히 '성서 계대'라 부르는 이곳 교정은 넓은 잔디 구릉과 적벽돌 건물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낮에 보면 잘 가꾸어진 공원 같고, 밤에 보면 주민들의 운동을 위해 조성한 야간 산책로처럼 느껴진다.
계명대학교 교정에서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과, 박물관 건물 바로 뒤에 서 있는 석장승(石長丞)을 요모조모 살펴보아야 한다. 마을을 수호하고 나쁜 것들을 물리칠 동제(洞祭)의 막강한 신(神)이면서도 어쩐지 어리숙해 보이기도 하고 익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석장승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소박한 신앙심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성서 계대를 나와 성주 방면으로 출발하면, 금세 금호강에 가로얹혀 있는 다리를 건너 다사읍으로 들어간다. 다사읍은 금호강을 건너면서부터 점점 오르막이 심해지는 도로를 따라 좌우로 형성된 상가 건물들로 가득하다. 일단 상권 지대인 읍 중심부를 관통하여 오르막 거의 꼭대기까지 나아간다. 그 후, 성주로 가는 주도로를 버리고 오른쪽 1차선 도로로 접어든다. 농협 앞에는 '하빈'으로 간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하빈(河濱)은 '물가'라는 뜻이다. 과연 이름 그대로, 1차선 도로는 오른쪽에 금호강을 끼고 계속 이어진다. 이윽고 길은 삼거리가 된다. 왼쪽으로 가면 하빈에 닿는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을 한다. 이때 아주 천천히, 오른쪽 산비탈을 주목하면서 방어운전을 해야 한다. 길이 휙휙 굽기 때문에도 그렇게 조심을 해야 마땅하지만, 우측 도로변에 서 있는 아주 작은 화강암 비석을 발견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다.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그 작은 화강암 푯말은 신도비 역할을 하는 비석이다. '환산 이윤재 선생 묘소'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본디 붉은색 글자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페인트가 다 벗겨져 유심히 들여다 보아야만 읽어낼 수 있다. 만약 사진으로 찍어와서 글자를 판독할 생각이면 대용량으로 촬영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면에 띄워놓고도 읽어내지 못한다.
길을 안내하는 신도비가 그런 지경이니 묘소라고 해서 번듯하게 조성되어 있을 리가 없다. 묘소로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도 조악하다. 묘소에 이르러서도 그런 느낌은 마찬가지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1943년 옥사한 항일 민족지사의 묘소가 이 모양이라니, 도대체 이 나라의 정치인들과 지방 관료들에게는 알량한 애국심이라도 있기나 한지 묻고 싶다.
누군가가 참배를 한 뒤 두고간 꽃송이들이 바짝 마른 채 무덤 옆을 뒹굴고 있다. 묘소 옆에는 앞뒤 모두 한글로만 쓰여진 비석이 서 있다. 과연 한글학자의 묘비답다. 글은 김윤경 선생이 썼다.
이윤재 선생 묘소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언덕을 넘으면 하빈면 소재지에 닿는다. 면 소재지 중심가에서 왼쪽으로 달려 육신사를 찾는 것이 오늘 답사 여정의 꽃이다.
하빈면 소재지에서 육신사를 찾아가는 일은 쉽다. 낯선 농촌 지역에서 생소한 답사지를 간단히 찾아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여기서만은 단연 예외이다. 무작정 직진을 하다보면 '육신사' 현판을 단 커다란 불이문이 도로 위의 하늘을 가로막고 서 있기 때문이다. 불이문은, 이 마을 사람들이 육신사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단숨에 알게 해주는 표지물이다.
육신사가 있는 묘골 마을 들머리에는 사육신기념관이 있다. 사육신기념관은 2010년에 개관을 했다. 단체 방문객 교육장으로도 쓰이는 그 건물의 앞이 바로 주차장이다. 교육장으로서는 위치를 잘 잡은 셈이다.
사육신기념관 앞에서 고개를 들면 단연 눈길을 끄는 멋진 옛날 기와집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눈에 꽉 차게 들어온다. 담대한 소나무들이 좌우로 장승처럼 자라 있고, 들판 같은 마당은 고운 잔디로 말끔하게 빛나고 있다.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가 1644년(인조 22)에 지은 충효당이다.
육신사의 현판은 박정희의 사령관체 글씨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1778년 건물인 도곡재와 부속건물인 숭절당 등등 품격을 뽐내는 와가들이 좌우로 줄을 짓고 서 있다. 그 와가들을 사열하다 보면 이윽고 육신사(六臣祀) 현판이 달린 외삼문에 닿는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사당인 숭정사, 그리고 오른쪽에 보물 제 554호인 태고정이 나타난다.
외삼문 앞에 서서 '六臣祀' 세 글자가 이른바 '사령관체'라 불리는 박정희의 글씨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는 일은 '역사의 역설'이다. 쿠데타를 뒤집으려다 죽은 이들이 사육신이다. 박정희는 그 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고 장기간에 걸쳐 독재를 했다. 그가 왜 자신과 반대되는 길을 걸은 사육신들을 기려 육신사의 현판 글씨를 썼는지, 정말 헤아리기 어려운 난제다.
생각해 볼 것이 하나 더 있다.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의 현판에는 응당 '육신사'나 '六臣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崇正祀'가 새겨져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행과 함께, 특히 가족답사라면 자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에 잠겨보시라. 역사문화 여행객다운 교육적 활동의 실천이다. 물론 답은, 이 사당이 사육신만 모시지 않고, 사육신과 행동을 같이하다 동시에 처형당한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도 같이 제향하기 때문이다.
육신사에서 되돌아나와 불이문을 지나면서 바로 우회전하면 곧장 삼가헌이 나타난다. 불과 200m 거리이다. 길가의 삼가헌 이정표에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04호라는 글자들이 선명하다.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가 1769년(영조 45)에 세운 삼가헌은 담장 너머 서편에 연꽃이 가득한 연못과 하엽정(荷葉亭)이라는 정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 옛날집은 검소하고 단아한 기운으로 꽉 차 있다. 중문채가 특이하게도 초가집이고, 본채도 ㅁ자형이기는 하지만 두 동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느낌이란 게 꼭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그것을 정답으로 확언할 수는 없다.
연꽃이 필 무렵 다시 한번 이곳을 찾으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이제 발길을 돌리는 답사객들이 많다. 그러나 아직 한 곳이 더 남았다. 한 곳 더 들른 다음 이곳을 떠나는 것이 하빈을 찾은 답사자가 갖추어야 할 역사적 예의이다. 삼가헌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 산비탈 대숲 옆으로 보이는 낙빈서원에 꼭 가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낙빈서원은 육신사의 전신이다. 지금은 비록 전성기의 위용을 꿈결처럼 잃었지만, 그래도 육신사를 낳은 모태인데 마냥 가볍게 대할 수는 없다. 낙빈서원 마루에 걸터앉은 채 정정한 대숲에 이는 푸른 바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도시민에게는 너무나 지나친 호사이리라. 만약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사육신은커녕 생육신도 절대 되지 않았을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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