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대구와 상관 없는 역사 인물이 '대구 사람'? -2011/07/08-

思美 2011. 7. 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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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와 상관 없는 역사 인물이 '대구 사람'?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37)
정만진 (daeguedu) 기자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시비.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이다.
ⓒ 정만진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은 '사람'이 남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를 다니는 것은 결국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심지어 전래의 명승이나 보호받아야 할 천혜의 자연자원을 찾아다니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곳들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좋아하는 곳, 또는 대단한 곳이지만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므로 주체는 역시 사람이다.

 

'대구의 인물'이 갖춰야 할 조건

 

 

대구의 역사 전공자들이 공동집필한 어떤 전문서는 김유신을 '대구의 인물'이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런가. 김유신이 대구의 인물이 되려면 그와 관련되는 '유물'이 있어야 한다. 생가, 공부한 장소, 기거한 집, 일한 곳, 일화가 깃든 장소, 무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김유신의 생가와 태실은 충청북도 진천에 있고, 공부하고 일하고 묻힌 곳은 경상북도 경산(석굴, 병영터 등)과 경주(단석산, 집터, 무덤 등) 등지에 산재해 있으며, 격전의 현장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대구에는 아무것도 없다.

 

서거정도 마찬가지이다. 대구광역시가 펴낸 <대구의 문화인물>은 그를 첫 번째로 등재하지만, 그 역시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대구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무덤을 남긴 바도 없다. 그가 달성(達城) 서씨(徐氏)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턱대고 '대구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거정을 '대구의 인물'이라고 평가하면 달성서씨 문중이 좋아할 일도 아니다. 왜 그런가. <동문선> 등을 편찬하여 국사에 이름을 남긴 그에게 '달성 서씨를 빛낸 인물'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면 그것은 문중을 알리는 데 바로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의 인물'이라고 하면 그를 직접 드높이는 평가가 된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닌 '대구의 인물' 칭호는, 고등학교를 다닌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존명을 들어본 바 있는, 서거정에 대한 엉거주춤한 규정이 될 뿐이다.

 

 

김유신 생가. 뒤에 보이는 산에 그의 태실이 있다.
ⓒ 정만진
 

출생했다고 '대구 사람'은 아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을 경인(京人)이라고 규정한다. 김유신은 진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대략 15세가 될 때까지 거주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김부식은 그를 진천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활동한 지역이 어디인지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김유신은 당연히 경주 사람이다.

 

서거정은 물론 서울 사람이다. <대구의 문화인물>은 서거정의 유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묘소가 경산시에 있다'고 소개한다. 본인의 무덤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산시가 대구인 것도 아니다. 경상북도 경산시이다. 이런 어불성설이 대구시가 공식으로 펴낸 책에 버젓이 실려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원효, 김유신, 설총, 서거정 등을 대구 사람이라면서, 타지인들에게 그들의 유적을 보러 대구로 오라면 과연 누가 오겠나. 아무런 유적도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데 그들이 바보인가. '대구 사람 아무개가 남긴 이러저러한 유적이 있으니 꼭 한번 찾아 주십사' 하고 타지인에게 홍보를 하려면 가시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신숭겸 장군 동상
ⓒ 정만진
 

왕건과 신숭겸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 역시 김유신이나 서거정처럼 대구 출신도 아니고, 대구에 거주한 바도 없으며, 묘소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독좌암, 연경, 무태, 불로동, 반야월, 안심, 왕굴, 안일사, 은적사, 임휴사, 왕산, 파군재 등 왕건과 관련되는 '곳'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신숭겸과 관련해서도 유허비, 사당, 지묘동 등 역사의 흔적이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충분히 '대구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 사육신 박팽년이 '대구의 인물'이다. 그 역시 대구에서 출생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고, 묘소를 남기지도 않았지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대구의 인물이다. 그는 자손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에 남겼다. 사육신 중 그 누구도 직계 남자 자손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만은 유일하게, 그것도 대구에 아들을 남겼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면서 사당 육신사도 남겼다. 이만 하면 모든 국민들을 향해 '대구에 한번 들러주십사' 홍보하고도 남을 만한 역사유적이라 하겠다.

 

 

육신사 현판. 박정희의 글씨, 이른바 '사령관체'이다.
ⓒ 정만진
 

 

 

조선 후기로 들면, 홍의장군 곽재우야말로 '대구의 인물'이다. 그는 경남 출생이지만 의병활동의 장소, 묘소, 사당, 유품(망우공원의 기념관) 등의 '관광자원'을 대구에 선사했다. 동학교주 최제우를 홍의장군과 견줘보자. 최제우는 비록 지금의 관덕정 자리인 아미산에서 처형을 당했지만 그 외의 유적이 없어 대구의 인물이라고 자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동상이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지만 그것은 '아전인수'일 수도 있으므로 타지인을 설득해낼 만한 사료가 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홍의장군의 동상을 세워놓고 그것을 근거로 곽재우 장군을 대구의 인물이라고 강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홍의장군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 김충선 또한 '대구의 인물'로 규정할 만하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가등청정의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곧 투항하여 도리어 왜적 격퇴에 큰 공을 세웠고, 그 이후에도 이괄의 난이며 병자호란 등에서 큰 전공을 일구어낸 '특이한' 무장이다. 나중에 김씨 성을 하사받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살게 되고, 후손들이 녹동서원을 세워 그를 배향하고 있다. 녹동서원은 해마다 상당수 일본인 참배객들이 방문하는 '동아시아적' 명소이기도 한다. 근래에는 한일우호관도 새로 건축하였다.
 
 

녹동서원
ⓒ 정만진
 
 
타지 출생도 얼마든지 '대구의 인물'
 
조선 말기를 대표할 만한 대구의 인물은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이다. 그는 서울 태생이지만 대구에 거주하면서 구한말의 대표적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고택(상화고택 앞)과 묘소(범물동)가 대구에 남아 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의 가시적 유산이 남아 있지 않아 그를 관광상품화하기에는 많이 모자란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20세기 들면서 대구가 자랑할 만한 대표적 인물은 이상화 시인이다. 그는 대구 태생에, 공부도 대구에서 했고, 실제로 거주했으며, 교사 생활도 했다. 묘소도 대구에 있고, 그를 기려 세워진 달성공원의 시비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기념비적 '물건'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상을 가다듬은 들판도 대구시 수성구 들안길로 알려진다. 그런 점에서, 민족시인 이상화만큼 완벽하게 '대구의 인물'인 사람은 달리 찾기가 어렵다고 할 만하다.
 
대구직할시(지금의 대구광역시)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 전통과 문물> 중 제 3장 '고장을 빛낸 사람' 편을 보면 20명이 거론되어 있다. 서거정, 서병오, 이시영, 이윤재, 이갑성, 서상일, 이인, 이상정, 이상화, 이상백, 윤홍열, 박태원, 백기만, 박경원, 현진건, 이장희, 현제명, 이인성, 김용조, 서동균, 이렇게 순서대로 소개된다. 독립운동가, 예술가, 정치인, 여류비행사, 사회운동가, 한글학자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상대적 장점 지닌 인물 내세워 홍보해야
 
 

(위) 김영랑 생가 (아래) 상화 고택
ⓒ 정만진
 
관광객을 모으기 위한 홍보자료를 제작할 때 누구를 내세우는 것이 옳을까? 예로, 김영랑과 이상화를 견주어 보자. 김영랑은 전라도를 대표하는 교과서적 현대시인이다. 대구는 이상화다. 시인의 유적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을 권유하면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중 1인을 선택하라고 제시하면 과연 어느 쪽의 선호도가 높을까.
 
강진의 김영랑 생가는 복원한 초가집이다. 대구의 상화 고택은 시인이 생전에 기거한 실제의 집이다. 그 차이 때문이 아니라, 상화는 거의 매일 일제 경찰에 불려다닌 평생의 독립운동가이자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대표적 저항시로 각인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민족시인으로, 김영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상화를 '대구의 인물'로 당당하게 내세우면서, 고택, 묘소, 달성공원 시비, 들안길, 교남학교 등을 엮어 격조높은 관광명소로 부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구시는 왕건, 박팽년, 곽재우, 김충선, 이상화, 이렇게 다섯 분과 관련되는 '사람 중심' 관광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건물이나 사적지를 훑어보는 수준을 뛰어넘어 재미와 내용이 가득한 '물건'을 내놓아야 한다. 대구와 거의 아무런 연관도 없는 역사인물을 무턱대고 끌어들여 '대구 사람이야' 식으로 강변하는 행위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2011.07.08 12:05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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