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들은 신의로써 교분을 맺고, 깊이 불법을 믿으며,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쳐 신라를 침범하는 무리를 쫓아내고 굴복시키기 위해서 임전무퇴의 용기로써 싸움터에 나갔다. (중략) 화랑도들은 산수를 찾아다니며 수련하는 가운데 인간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모든 편견을 초극하도록 깨우쳤고, 심지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관념까지도 넘어서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라는 사상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한국교육사>(박재문, 학지사, 2001)의 이 대목을 읽으면, 황산벌에서 관창과 반굴이 자원하여 죽는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국정토인 조국의 정신을 적들의 나라에 퍼뜨리기 위해 죽는 것은 (<한국교육사>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승에서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저승에서의 삶이 결정된다'고 본 신라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도 어린데다 뛰어난 무예를 갖추지도 못한 관창과 반굴 같은 청소년들이 단기필마로 적진을 향해 뛰어든 데에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라는 사상적 기반이 뒷받침이 되었던다는 말이다.
그러나 계백 장군은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계백은 어린 관창을 살려서 돌려보내는 등 정(情)을 베풀지만, '과정보다는 결과' '정보다는 이(理)를 중시'하는 신라의 장졸들이 죽어 돌아온 관창을 보고 그처럼 놀라운 적개심으로 들끓게 될 줄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관창을 저처럼 죽인 백잔(百殘)을 멸하여 그 땅을 불국정토로 편입시키겠다는 신라인들의 종교적 의분은 '백제인으로는 유일하게 한반도에 동상을 남긴' 계백 장군의 상상을 아스라히 뛰어넘는 경지였다.
신라인들은 그처럼 불교에 열심인 사람들이었다. '신라의 광개토대왕'인 진흥왕이 말년에 머리를 깎은 채 승복을 입고 살았다는 사실도 신라인들이 얼마나 불교에 깊게 귀의해 있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그것이 바로 신라의 서울인 경주는 물론이고, 대구 일원에까지 불교 유적이 그토록 많은 연유이다. 만방의 불국정토화를 염원한 신라인들은 대구의 3대 산인 팔공산, 비슬산, 앞산을 온통 불교유적지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대구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갓바위'
대구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은 단연 '갓바위'이다. 신라 말기인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돌부처는 높이 4m 정도의 석불상으로 850m 높이의 관봉 정상에 있다. 공식 명칭이 '관봉 석조여래좌상'인 이 석불은 우리나라 안에 하나밖에 없는, 산 봉(峰)우리에 있는 '갓[冠]을 쓴 부처'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 '갓을 쓴 부처'를 그냥 '갓바위'라 부른다. 신라 때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부처상만 조각되었고, 갓은 고려 때에 썼다.
갓바위는 순수 종교적 차원을 넘어 현실 세계의 복을 비는 한국불교의 기복(祈福)신앙적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 구실을 한다. 그래서 팔공산 뒤편 선본사 쪽에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는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주는' '경산 갓바위'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갓바위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경산시의 것임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많은 사찰들을 대표하는 절은 동화사와 은해사이다. 은해사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영천시 소재이니, 이 글에서는 동화사가 팔공산 최고의 절이라고 말하겠다. 여기서 '최고'라는 말은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가장 널리 알려졌고, 가장 많은 유적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동화사의 창건 연대는 불분명하다. 동화사 금당암 입구에 있는 '동화사 사적 비명'에는 소지왕 15년(439)에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이 법흥왕 14년(527)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만 흥덕왕 7년(832)에 심지(心地)대사가 새로 지은[重創] 것은 분명하다.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는 왕위쟁탈전 와중에 숙부인 흥덕왕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하고 출가하였는데, 세월이 흐른 후 팔공산에서 동화사를 중창할 때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나 절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라 지었다고 한다.
동화사에는 보물을 비롯한 불교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절 경내로 들어가는 일주문(봉황문) 바로 옆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좌상부터가 보물 243호이다. 이 마애불은 심지대사가 직접 정을 들고 새겼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당간지주,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비로암의 삼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석조부도 등도 국가 지정 보물이다. 또,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큰 불상으로 알려진 '남북통일발원약사여래석조대불(약칭 '통일대불')'도 있다. 높이가 무려 30m, 둘레가 16.5m에 이르는 이 대불은 1992년 11월 27일에 완공되었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봉서루 건물의 뒷면 벽에 있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이라는 편액도 유심히 보아야 할 사적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을 승병 지휘의 총본부로 삼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대웅전 좌후면에 있는 조사전(祖師殿)에 가면 '사명당대장 진영'이라는 제목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물론 조사전에는 극달화상, 심지대사 등 옛 고승들의 영정도 걸려 있다. 조사전 왼편의 오동나무 앞에는 대구시가 근래에 세운 '심지대사 나무'라는 팻말이 서 있다.
봉서루 앞에서 왼쪽으로 금당암 뒤편으로 난 작은 고개를 넘은 다음 다시 오른쪽으로 오르면 염불암을 거쳐 동봉에 이르는 팔공산의 대표적 등산로가 이어진다. 염불암 뒤편에는 커다란 바위에는 양면에 마애여래와 마애보살의 좌상이 각각 새겨져 있다. 염불암 뒤에는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한 후 도망쳐 와서 홀로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는 일인석(一人石)도 있다.
염불암을 지나 계속 오르면 동봉에 닿는다. 동봉 바로 아래에는, 염불암에서 하산하지 않고 이곳까지 올라온 이들에 대한 예의인 양 높이가 6m나 되는 거대한 화강암 석불이 동봉을 등진 채 버티고 서서 환영을 해준다. 팔공산 최고봉을 등진 채 이 거대 석불 앞에 서 있노라면, 해발 1155m나 되는 이 높은 곳에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새겨놓고 날마다 올라와 기도를 한 신라인들의 신앙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영조대왕의 도포와 글씨가 남아 있는 파계사
파계사도 심지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창건하였다고 하니 동화사가 중창된 때보다 앞선 기록이다. 절 이름에 들어 있는 파계는 승려의 일탈을 말하는 파계(破戒)가 아니라 '계곡물[溪]을 잡는다[把]'는 뜻의 파계(把溪)를 가리킨다. 절 주위로 아홉 갈래나 흐르는 계곡의 물줄기가 너무도 요란하여 땅의 기운을 빼앗아가므로 이를 억누르기 위해 사찰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전한다.
파계사는 이른바 왕실의 원당(願堂)사찰이다. 왕실에서 무엇인가를 빌 때 찾는 절이라는 뜻이다. 1693년(숙종 19) 10월 5일 밤 승려가 대전에 들어오는 꿈을 꾼 숙종은 파계사의 영원(靈源)선사가 묘향산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대문 밖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숙종은 영원선사에게 왕자의 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했고, 결과적으로 영조가 태어났다.
숙종은 영원선사에게 현응(玄應)이라는 호를 내린다. 숙종은 현응대사에게 파계사 주변 40리의 세금을 거둘 권한을 주지만, 대사는 조세권 대신 왕실 역대 임금의 위패를 파계사에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그리하여 1696년(숙종 22) '영조를 위해 기도하는' 기영각(祈永閣)이 원통전 왼편에 지어졌고, 1704년(숙종 30)에는 11세의 영조가 쓴 자응전(慈應殿) 편액도 하사되었다. 또 1732년(영조 8)에는 영종의 어의(御衣)가 하사되기도 했다. 사정이 그랬으므로, 불교를 억압하던 양반들도 파계사에만은 감히 무례하게 굴지 못하였다. 지금도 파계사 성전암 법당에는 영조의 '慈應殿' 편액이 걸려 있으며, 영조대왕의 도포도 본래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파계사에는 절에서 흔히 보는 대웅전이 없다.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기 때문인데, 흔히 관음전이라 부르는 절집에 파계사는 원통전(圓通殿)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원통'은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준말로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의 불격을 표시하는 용어이다. 원통전 안에는 보물 제 992호인 목조 관세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선덕여왕의 원당 부인사, 소장 대장경 대부분 불타
팔공산에는 갓바위와 동화사, 그리고 파계사 외에 부인사와 송림사도 버티고 있다. 부인사는 선덕여왕을 모신 선덕묘(善德廟)가 있고, 6천여 권의 초조 대장경을 판각하여 소장하고 있었지만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 침입 때에 대부분 불에 타버린 사찰로 유명하다. 그러나 부인사는 한때 39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이 참여하는 승시(僧市)가 섰으며,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를 한 거찰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몽고의 침탈과 왜구의 도발을 겪으면서 폐허처럼 변하여 경내가 대부분 포도밭으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현존 건물들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스러운 전통미를 맛보기 어렵다.
선덕여왕을 기리는 뜻에서 부인사(夫人寺)라 불리기도 하고, 대장경과 관련하여 부인사(符仁寺, 부적 부, 어질 인)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절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가 한 가지 숨겨져 있다. 1193년(명종 23)에 김사미와 효심이 운문(청도)와 초전(성주)에서 각각 일으킨 민란에 부인사 승려들이 적극 동참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1203년(신종 9)에도 무신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교를 탄압하는 무신정권에 대항, 농민 및 노예 등과 결합하여 일으킨 부인사 승려들의 반란은 실패했고, 처형되거나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옛날에는 승려들이 전쟁에 자주 가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동화사를 승병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총본부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동화사의 승려들은 이미 동수대전 때에도 개입하여 견훤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왕건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부인사의 승려들도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부인사 승려들의 반란에는 동화사 승려들도 동참을 했다. 지금은 동화사와 갓바위가 현생의 이익을 준다는 약사불을 주로 섬기고 있지만, 본래 팔공산의 사찰들은 기독교의 메시아에 해당하는 미륵불을 믿었다. 미륵불은 모든 중생들을 빠짐없이 구제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상낙원의 행복을 구가하게 해줄 미래의 부처이다. 팔공산 승려들은 먼 미래의 종교적 일은 미륵불에게 의지한 채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슴없이 전쟁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5층전탑으로 이름높은 송림사
팔공산에서 부인사를 거쳐 파계사를 둘러본 다음 계속 직진을 하면 송림사에 닿는다. 송림사에 가기 직전인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기성동 삼거리(1028번지)에는 국가 보물 510호인 3층석탑이 밭 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다. 속명이 법성탑(法聖塔)인 것으로 보아 아주 옛날 이 일대에는 법성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듯하다.
법성탑의 소재지가 대구광역시가 아닌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송림사의 주소도 대구가 아니라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동 92-1번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글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구시민들이 팔공산 너머의 은해사(영천)나 삼존석굴(군위)과는 달리 송림사만은 '대구의 것'이라고 굳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도 없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히 언급을 할까 한다.
서기 544년(진흥왕 5)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송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 불상이 있다. 그 불상이 점잖게 앉아 있는 대웅전의 현판은 숙종의 글씨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송림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송림사는 보물 제 189호인 5층전탑 덕분에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7기의 전탑 중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정평을 얻은 이 탑을 보러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절 이름과는 달리 주위에 울창한 솔숲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절도 부인사 등과 마찬가지로 몽고의 침입 때 전소되고 임진왜란 때 또 다시 불에 타는 바람에 모든 건물들을 새로 지었으니, 그 이전에는 황홀한 솔숲 속에 아름다운 전탑까지 거느린 아름다운 절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슬산과 앞산에도 불교의 흔적은 많다
비슬산은 대구에서 팔공산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명산이지만, 남아 있는 사찰들은 팔공산에 비해 위풍이 한참 모자란다. 보물 제 539호인 석조계단(戒壇)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진 용연사가 가장 유명하고, 그 이외에도 황금빛 지붕이 특색인 유가사, 비슬산 자연휴양림 입구의 소재사 등이 있다.
신라 고찰인 용연사 인근에는 용이 사는 굴이 있었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지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비슬산 최고봉인 천왕봉 둘레는 아름다운 구슬[瑜] 같은 암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부처[伽]를 닮은 듯 했다. 그래서 천왕봉 아래에 창건된 절에 유가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재사는 모든 재(災)앙을 소(消)멸시켜 주는 절이라는 뜻이다. 이 세 절에는 모두 비슬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없어진 대견사라는 절이 용연사, 유가사, 소재사보다도 더욱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다'는 <삼국지연의>의 표현처럼, 어찌된 일인지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은 '대견사지(址)'가 살아 있는 이 세 절들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유는 따져보면 네 가지 정도.
첫째, 세 절이 비슬산 기슭에 있는 데 비해 대견사지는 정상 인근에 있어 어느 경로로 올랐든 모든 등산객들이 찾게 되어 있다. 둘째, 대견사지에는 무너졌다가 복원된 3층석탑이 1기 남아 있는데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아찔한 절벽 끝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애잔하게 울려준다. 셋째, 대견사지 일대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암괴류 분포지여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 넷째, 대견사지의 배경을 이루는 암괴류 위에 올라서면 특히 봄철에는 수만 평에 이르는 참꽃 군락이 하늘을 물들이듯 피어난 장관을 볼 수가 있다.
앞산은 대구 시내의 중심에 있는 산이다. 옛날에는 왕건이 도망쳐 와 숨어 있었을 정도로 거리도 멀었고 제법 험준한 산이었겠지만, 교통이 발달하고 거주지가 넓어진 지금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산 주위를 고층 아파트들이 에워쌌으니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왕건이 숨어 지냈다는 역사의 전설이 남아 있는 만큼 불교의 유적은 곳곳에 스며 있다. 왕건이 숨어서[隱] 지낸 흔적(跡)을 뜻하는 은적사(隱跡寺), 그가 안(安)전하고 편[逸]하게 지냈다는 의미의 안일암(安逸庵), 잠시[臨] 머물면서 쉬다가[休] 간 절이라는 임휴사(臨休寺)는 모두 왕건과 연관이 있는 절들이다. 은적사 대웅전 옆과, 안일암에서 앞산 정상으로 한참 올라간 지점에는 왕건이 숨어 있었다는 왕굴도 각각 있다. 이 유적들은 동화사의 스님들이 견훤의 편을 든 것과는 달리 앞산의 승려들은 그 반대인 왕건쪽 성향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사료(史料)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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