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침 나무'는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 있다. 달성공원 가운데의 커다란 회화나무에 '서침 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 초기의 '큰 선비' 서침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세종 때 조정에서 달성 서씨 소유인 달성(지금의 달성공원) 일대를 국가에 헌납하면 그 대신 남산동 일대의 땅을 주고 자손에게 큰 벼슬에 내리겠다는 제안이 서씨 문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서침 선생은 그를 사양하는 대신 대구 일원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환곡의 이자)을 줄여달라고 청원하여 성사시킨다. 이에 대구 사람들은 서침 선생을 숭앙하게 되었고, 지금도 달성공원 안의 회화나무 고목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억하고 있다.
'최제우 나무'는 중구 종로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동학 교주 최제우가 종로초등학교 바로 옆 경상감영에서 지금의 반월당 관덕정 자리로 끌려가 처형된 역사적 사실을 기려, 1864년 3월 10일 당일의 그 참형을 지켜보았을 법한 거목 느티나무에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처럼 역사적 인물을 기려 나무에 사람의 이름을 붙인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대구 출신의 천재 서양화가 이인성을 기려 천주교 대구대교구 안에 '이인성 나무'가 생긴 것도 그 예의 한 가지이다. 비슬산의 고승 도성을 기려 유가사 뒤편 도성암 대웅전 옆에 '도성 나무'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이다. 파계사 진동루 앞 '영조 나무'도 그렇고, 동화사 칠성각 옆에 동화사를 창건한 것으로 여겨지는 심지대사를 기리는 오동나무 '심지 나무'가 탄생한 것도 역시 그렇다. 평광동 입구 삼거리의 고목에 '(효자) 강순향 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탄생 설화'는 다른 나무들과 같다.
순종 나무, 광복 소나무... 대구 나무마다 깃든 '한국의 역사'
이런 나무들은 그 본인들이 직접 심었거나, 역사적으로 구체적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식재한 것은 아니다. 사실(史實)과 그 현장이 가지는 연관성을 되새기기 위해 각각의 나무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보잘 것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나무 자체와 역사의 당사자들이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성공원 서침 나무 앞쪽에 있는 '순종 나무'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나무는 순종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1909년 1월 12일 이등박문과 순종이 대구를 방문하였다가 달성공원에 들러 기념식수를 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향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일본측 사료에 남아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언론이나 글에서 그 근거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 공인을 받지는 못한 실정이지만, 달성공원의 두 나무가 모두 향나무라는 점, 수령이 부합한다는 점, 그리고 나란히 식재되어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순종이 직접 심은 나무로 대략 인정되고 있다.
심은 사람이 좀 더 분명하게 인정되는 나무 중에서 그 위용이 특별히 대단한 것에는 도동서원의 '김굉필 나무'가 있다. 도동서원이 사액을 받은 것을 기념하여 김굉필의 외손자 정구 당시 안동부사가 심은 이 나무는 그 모양새부터가 보통의 은행나무들과는 다르다. 보통의 은행나무들이 직립의 면모만 보여주는데 반해 김굉필 나무는 마치 반송처럼 휘황찬란하게 가지를 뻗쳐 보는 이들의 눈과 가슴을 마냥 시리게 해준다. 국가사적이자 보물인 도동서원의 본 건물과 사당, 장원(담장)들을 보면서도 그 대단함을 느끼지 못하는 방문객들마저도 이 은행나무를 보고는 찬탄을 연발한다. 고목 한 그루가 사람들에게 주는 정서적 연대감은 정말 상상 이상의 경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김굉필 나무 앞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본인이 직접 심은 나무 중에서 답사객들을 지극한 황홀경으로 안내해주는 최고의 나무로는 동구 평광동 끝자락에 있는 '광복 소나무'를 들 만하다. '광복' 소나무라는 이름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 나무는 1945년에 심은 것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나라와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을 기념하여 우하정, 우채정 등 이 마을 청년들이 심었다.
'광복 소나무'는 대구시 문화재자료 13호인 첨백당 바로 앞에 심어져 있다. 첨백당은 효자 우효증과 선비 우명식을 기리기 위해 1896년(고종 33)에 후손들이 지은 집이다. 집 좌우로는 당시에 심은 우람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고, 작은 연못과 깔끔한 담장도 준비되어 있어 답사객의 눈길을 끄는 집이다. 게다가 '광복 소나무' 덕분에 운치도 한결 멋지게 살아날 뿐더러 역사적 교훈까지 강렬하게 각인되어 점점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근래 들면서 첨백당에는 서울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오고 있다. 꼭 첨백당 때문은 아니고, 약 100m 인근에 있는 색다른 나무 한 그루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덕분이다. '광복 소나무'를 심은 당사자들 5인 중 한 사람인 우채정씨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이 나무는 그의 선친이 1935년에 심은 우리나라 최고령 홍옥나무이다. 이 홍옥나무는 고령의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아직도 해마다 상당량의 빨간 열매를 출산하고 있어 관상용으로도 충분히 위세를 자랑한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가지를 받치는 지렛대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아득한 세월의 무게를 저절로 짐작하게 해주는 고목이지만, 사과의 빛깔만은 과연 홍옥답게 너무나 빨갛고 선명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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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광동 우채정 씨 집의 우리나라 최고령 홍옥 사과나무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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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의 측백수림은 '대구의 자랑'
이제 천연기념물 또는 천연기념물급 나무를 살펴보자. 먼저 동구 내곡동의 모감주나무 군락이다. '대구시 기념물 8호'인 내곡동의 모감주 군락은 약 35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4그루와 5~10년생 약 100그루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들 자생한 것이다. 4그루의 모감주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안면도의 것들보다도 수령이 오래되었고, 나무 둘레도 31~45㎝로 크며, 높이도 8~10m로 웅장하다. 어째서 내곡동의 모감주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대구시청 홈페이지 등에 아무 언급이 없지만, 염주를 만드는 재료로 유명한 내곡동의 모감주나무 군락은 한번 방문하여 꼭 눈여겨 볼 만한 천연의 나무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 비하면 동구 도동의 측백수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당당히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의 영광을 뽐내고 있다. 물론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최고 보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도동 측백수림이 천연기념물 1호라고 해서 국가 제1일의 수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측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남방 한계선에 엄청난 군락을 이룬 채 자생하고 있는 도동의 측백수림을 두고 '답사객의 발길을 유혹하는 대구의 자랑'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도동 측백수림은 조선 초의 고위 관리인 서거정이 '대구 10경'으로 꼽은 것으로 보아 이미 그 당시에도 대단한 '울창함'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 그리고 해방 정국을 거치는 어수선한 틈을 타 남벌되면서 수천 그루에 이르렀던 도동 측백나무들은 크게 훼손되었다. 심지어 일제는 측백나무들을 마구 뽑아내고 그 자리에 전쟁용 석굴까지 조성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수림은 직접 답사하여 생생하게 확인하지 않고 사진만 보고도 전쟁 동굴을 판 일제의 참상이 너무나 선명히 드러나,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은 결코 잃어서 안 될 소중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학습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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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동 측백수림. 사진 가운데에 일제가 판 전쟁용 동굴이 뚜렷하게 보인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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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동 모감주나무와 도동 측백수림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대구시 기념물 10호'로 지정된 북구 국우동의 탱자나무도 소홀히 대해 무방한 그런 수준은 아니다. 비록 주위가 산만하고 스산하여 지방기념물다운 풍치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탱자나무를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되는 이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인 강화도의 그것과 거의 비견되는 수준이라는 중평이다. 얼키설키 뒤엉킨 가지에 무성하게 매달린 노란 탱자 열매는 정말 장관이다.
마지막으로, 나무 그 자체는 아니지만 유적이 나무와 어우러져 뿜어내는 멋진 풍경 한 곳을 말하고 싶다. 바로 평광 끝의 시량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 유허비각이다. 이 비각은 사과밭의 끝자락과 산비탈의 솔밭 사이에 있는데, 솔밭에서 내려다보면 두 그루의 웅장한 소나무 사이에 앉아 있는 품새로 자못 서기롭고, 사과밭 안에서 올려다보면 구불구불한 나뭇가지와 사과열매랑 어우러진 풍경이 말 그대로 전원의 평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비록 소나무와 사과나무 자체는 수백 년 세월을 자랑하는 기념물 수준이 아니지만, 인간의 역사가 깃든 유허비를 안고 있으면서 수려한 풍치를 뽐낸다는 점에서 이곳의 나무들은 왕건이 쉬다가 도망쳤다는 시량리를 더욱 답사지답게 만들어주는 '화룡점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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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숭겸 유허비(동구 평광동 시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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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광동 시량리 신숭겸장군유허비. 사과밭 끝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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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사이로 신숭겸장군유허비각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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