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유적·문화 답사로 보는 '대구의풍경'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에 피어난 서양종교의 흔적 -2011/07/09-

思美 2011. 7. 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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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에 피어난 서양종교의 흔적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38)
정만진 (daeguedu) 기자
 

성모당
ⓒ 정만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225-1번지에 가면 성모당(聖母堂)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는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성모당은 프랑스 남서부 루르드 시의 마사비엘에 있는 '성모 동굴'을 본떠 지어졌다.
 
성모당은 루르드 성모동굴의 것과 크기는 물론 바위의 세부적인 형상까지도 똑 같다. 건물 내부는 당연히 동굴처럼 꾸며져 있고, 마리아상은 절벽 중간 지점의 움푹 파인 암굴 안에 모셔져 있다. 건물 상단에 쓰인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 1918'은 대략 '1911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 1918'의 의미로, 성모당이 세워진 내력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1911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이던 드망즈 대주교는 "성모님의 도우심에 의해 주교관과 신학교 건축 및 주교좌 성당의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성모께 봉헌하고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본뜬 성모당을 지어 모든 사람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서원한다. 이 소원은 다 이루어졌고, 마침내 성모당이 1918년 10월에 세워졌던 것이다.
  

 

 

 

 

(왼쪽) 성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앞의 나무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이 심은 것이다. (오른쪽) 사르뜨르 성바오로수녀원.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고 있다.
ⓒ 정만진
 
 
그런데 대구교구청(계산성당 소재), 성모당, 유스티노 신학교, 사르뜨르 성바오로 수녀원이 지어진 데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이 큰 역할을 했다. 대구교구 초대 신도회장이었던 그는 수만 평의 땅을 교구 사업을 위해 봉헌하였고, 천주교 건물들을 이 땅위에 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들 건물 중 그 어느 것 하나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1913년 타계하고 말았다. 국가사적 제 290호인 계산성당, 대구 문화재자료 제 3호인 성유스티노 신학교, 대구 문화재자료 제 24호인 사르뜨르 성바오로 수녀원, 대구 유형문화재 제 29호인 성모당에 깃든 서상돈 선생의 마음을,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왼쪽 사진) 계산성당. 증축을 거쳐 1918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사진은 제일교회 옆 삼일운동로에서 내려다 본 광경이다. (오른쪽 사진) 제일교회. 1933년 9월에 완공된 이 예배당은 1995년 4월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화재로 내부가 모두 소실되었고, 그 후 동산동 선교사주택 뒤편으로 다시 웅장하게 지어 옮겨졌다.
ⓒ 정만진
 
 
제일교회는 1897년에 창립되었는데, 이듬해인 1898년 기와집 4동을 구입하여 교회당으로 썼다. 그 후 1908년 전통적 양식과 서구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140여 평 규모의 새 예배당을 지었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교인 수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1933년 다시 새 건물을 지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평 448평의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리고 1937년에는 이주열(李主悅)의 봉헌으로 종탑을 증축하였다. 2층으로 지어진 서양식 교회 건물로는 한강 이남 최초의 건물이었다.
 
한식 기와집이던 계산성당이 1900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된 것처럼, 제일교회도 원인 모를 화재로 내부가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95년 4월의 일이다. 그리하여 대구 3.1운동의 주도자였던 제일교회는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 머르타 브루엔(Martha S.Bruen)이 세웠던 신명여자소학교(지금의 신명고와 성명여중)와 선교사 주택들 사이로 옮겨가 거대한 새 예배당을 지었다. 약전골목 한 가운데에 있는, 대구 유형문화재 제 30호인 본 예배당은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구시 중구 동산동의 선교사 주택.
ⓒ 정만진
 
새 제일교회 일대의 길에는 역사적인 이름이 붙어 있다. '대구 3.1운동로'이다. 계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서문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시위 군중은 선교사 주택 사이로 난 만세로를 따라 행진하여 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이 길에는 또 미국 미조리주에서 옮겨와 심은 대구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도 있고, '동무 생각' 등을 작곡한 박태준의 노래비도 근래 세워져 있다.
 
아름다운 선교사 주택들이 있고, 3.1운동로가 있고, 역사를 자랑하는 사과나무도 있고, 박태원의 음악적 추억도 깃들어 있고,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자 중고교도 있고, 1898년 10월에 개원한 제중원(지금의 동산병원)도 있는 이 언덕은 근래 들어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있다. 물론 그렇게 불러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계산성당, 대구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계성학교, 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이 지척에 있고, 나라 안의 거대 재래시장인 서문시장도 길 하나 건너에 있다.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을 거닐면서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 생각'을 나직한 목소리로 한번 흥얼거려 보자.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새 뛸 적에
나는 멀리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태준 노래비
ⓒ 정만진
 
2011.07.09 14:07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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