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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일암 전경. 왕건이 숨어 있던 곳이기도 하고, 대구 지역의 항일 운동 발생지이기도 하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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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을 연재하고 있는 중에 "왕굴 못 찾겠던데요?"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들었다. "한글학자 이윤재 선생 묘소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약도 좀 보내줄 수 있습니까?"는 주문도 몇 번 들어왔다.
사실 왕굴은 찾기가 쉽지 않다. 앞산에 있고, 안일암 뒤에 있다니까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필자도 왕굴을 찾아 안일암 뒤쪽 산비탈을 다섯 번 헤맨 끝에 발견(?)했으니 그리 간단한 탐험(?)은 아닌 것이다.
일단 안일암에 가야 한다. 대구 시민이 아니라도 안일암 정도를 못 찾을 일은 없다. 앞산순환도로를 달리다 보면 길가에 갈색의 '안일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제 안지랑골 입구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서 오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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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굴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돌탑. 무지무지하게 큰 이 돌탑은 개인이나 몇 사람이 쌓을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다. 누가 쌓았을까.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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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앞산 안내판을 읽으면서 발생한다. 이정표가 길 안내를 그르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읽는 답사자가 헷갈리고 말기 때문이다. 안내판의 앞산 전체 약도를 본 답사자는 누구나 이렇게 판단하게 되어 있다.
'안일암을 지나 돌탑이 나오면 그 돌탑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올라간다. 능선 90% 정도 높이에 왕굴이 있다. 여기서 1km 정도 거리다. 30분이면 닿겠구나.'
잘못 읽은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해석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면 왕굴은 없다. 왜 그런가. 실제로 왕굴에 가 보지 않은 독자는 필자의 이 글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왕굴은 안일암보다 약 500m 위에 있다. '그 정도야 문제도 아니지!' 안일암 앞에서 약수를 한 바가지 떠 마신 다음 모두들 호기롭게 출발한다. 조금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돌탑이 나타났다. 사람 키의 한 배 반 정도 높이에 푸른 이끼가 예시롭지 않게 낀 것이 고풍스러우면서도 뭔가 역사성을 지닌 듯 느껴진다. 더욱 길찾기에 자신감이 생긴 답사자는 그 돌탑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의심없이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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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굴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돌탑. (오른쪽처럼) 사람이 서 있는 사진을 봐야 그 크기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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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미터는 충분히 온 듯한데 왕굴은 없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앞산 능선이 희끗희끗하게 나무 사이로 비친다. 아마 90부 능선 근처인 듯하다. 그렇다면 왕굴도 이 근처에 있는 게 틀림없다.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졌지만 새로 기운을 추스린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금세 능선 꼭대기에 닿았다. 그렇다면 이건 아니다. 분명히 안내판에는 능선 정상 가기 조금 전에 왕굴이 있었다. 그때 문득 오른쪽에 뭔가가 보인다. 비석 같다. 저거야!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10미터 정도 들어가본다. 굴이다. 생각보다는 좀 작지만 분명히 굴이다.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린 흔적도 완연하다. 요즘 왕굴에는 치성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하지만 곰곰 헤아려보니 이건 왕굴이 아니다. 대구경북역사연구회가 펴낸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본 사진에는 왕굴 앞에 안내판이 있었다. 그 안내판은 돌더미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왕굴 앞으로 난 산길은 끝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여기는 안내판이 없고, 동굴 앞에 돌더미도 없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산길도 없는 막힌 곳이다. 여긴 아니야!
안일암까지 도로 내려왔다. 해가 저물어갔던 것이다. 며칠 뒤 다시 갔다. 이번에는 그 산길 중간쯤에서 오른쪽 절벽 쪽을 더듬었다. 굴이니까 아무래도 절벽 어딘가에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왕굴은 없었다. 그 날도 그 즈음에 하산을 했다. 퇴근 후 찾아가니 일몰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 다음에는 좀 더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좁은 산길을 하나 발견했다. 누군가가 길 위에 아까시나무 벤 것들을 얹어 통행을 가로막아 놓았다. 이것 봐라? 요즘 앞산공원관리사무소에서 샛길 통행을 막아 자연을 보호하는 정책을 편다더니 이게 바로 그것인가?
그러고 보니 안일암 지나서는 '왕굴'로 가는 이정표가 없었다. 안일암 200m 아래에 왕굴까지 700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왕굴 가는 길은 주등산로가 아니라 샛길이다. 그래서 다시는 이정표도 없고, 이렇게 가시덤불로 막아 놓았나 보다.
아까시나무를 치우고 전진한다. 불과 50미터도 아니 들어갔는데 굴이 있다. 여기다! 쾌재를 부르며 다가섰다. 제법 큰 굴이다. 굴 안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고, 작은 책상까지 하나 있다. 그런데 촛불 흔적은 없다. 가만 보니 소줏병도 뒹굴고 있다.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굴 앞으로 난 길도 책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좁고, 안내판도 없다. 역시 하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 찾아올 때마다 늦은 시간에 온 탓에 오가는 등산객도 거의 없어서 마땅히 물어볼 곳도 없었다. 그런데 일이 꼬인 것이 엉뚱한 데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안일암 야경이나 찍어보려고 땀을 식히고 있는 중에 할머니 불신도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한 사람이 '저 우(위)에 돌탑 있제? 그건 째매하다(작다). 더 올라가면 이따만한(이렇게 큰) 거 있다.' 하자, 상대가 '그런나? 나는 저쪽 무당골에는 댕기도(다녀도) 이 골짝은 안 올라가봐서 모르겠다'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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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굴 찾는 약도/ 앞산 안일암 뒤의 작은 돌탑을 보고 그 오른쪽 길로 들어가 왕굴을 찾다가 고생만 할지도 모르는 분을 위해 엉성한 약도를 제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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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이 하나 더 있다고? 이런 낭패가! 어둠이 천천히 밀려 오는 시점이었지만 도저히 내려갈 마음이 나지를 않았다. 여기서 대략 500미터 올라가면 왕굴이 있다는 얘긴데 어떻게 안 보고 내려간단 말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서 올라갔다. 100미터 정도 올라가니 케이블카로 가는 주등산로 오른쪽으로 샛길 하나가 나타났다. 빨리 가자. 캄캄해지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
다시 100미터. 정말 무지무지하게 큰 돌탑이 나타났다. 사람 키의 다섯 배 이상 커 보이는 괴물 같은 돌탑이다. 일찍이 이렇게 큰 돌탑은 본 적이 없다. 안일암 바로 뒤에 있는 돌탑만 믿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갔으니 어찌 왕굴을 찾을 수 있었을까. 거대한 돌탑 오른쪽으로 난 오르막을 부지런히 올랐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이라 금세 숨은 거칠어졌고, 진득한 땀이 펑펑 솟아나기 시작했다.
왕굴이다! 안내판이 흐릿한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산길도 왕굴을 지나 앞으로 계속 이어진다. 굴 안에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촛불이 그 길을 비추고 있다. 아아, 왕건이 여기 숨어서 지냈구나. 견훤군의 추격과 수색을 피하느라 이 안지랑골까지 찾아들었다가, 안일암에 있기도 두려워 결국 예까지 올라와 은신을 했구나.
사진을 찍는다. 이미 어두워져서 셔터가 눌러지지 않는다. 길은 완연히 어둠에 휩싸였다. 밝을 때 다시 와야겠다. 자칫 하다가는 하산길에 구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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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굴. 지금은 민속신앙의 현장이 되어 있다. 촛불이 켜져 있는 왕굴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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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휴일이 왔다. 대낮에 사진기를 챙겨들고 왕굴로 갔다. 왕굴 옆에는 안일암 지붕을 지나 시내 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바위도 있었다. 아마 왕건도 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견훤군이 저 대구벌을 지나 이리로 다가오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리라. 지금은 빌딩숲이 되어 사람의 이동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저 편편한 들판에 지나지 않았으니 기병과 보병이 뒤섞인 군대가 진격해 온다면 충분히 보이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그 이후 종종 왕굴에 갔다. 22년 이상이나 군주로 모셨던 궁예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왕건, 29명이나 되는 비를 거느린 왕건,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公州)강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등을 담은 <훈요십조>를 남긴 왕건, 그런 왕건을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왕굴을 찾았다. 왕굴 앞에 서면, 참고 견디는 마음을 평상심으로 간직해야겠다는 각오가 들어 좋았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쳐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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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굴 밖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대구 시가지 풍경. 왕건은 왕굴에 숨어 있으면서 가끔 밖으로 나와 멀리 대구들판을 가로질러 견훤군이 오는지 살펴보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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