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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조계산 선암사 -2011/08/07-

思美 2011. 8. 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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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를 맞아 순천 선암사를 찾았다.

여태 보아왔던 절과는 달리 뭔가 고즈넉하고 넉넉했다.

정원에서 풀을 뽑던 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저기 저 꽃이 상사화가 맞나요?"

"왜 상사화라 부르는지 아시나요?"

"꽃과 잎이 평생 못만나 그런다고 책에서 읽었습니다만.."

"참 아름답지요. 한송이 캐 가실렵니까?"

"아닙니다."

"저 꽃처럼 되기 싫으시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아 네"

팔상전앞에서 기다리는 집사람에게로 뛰어갔다.

 

 

 삼나무.

 

 보물제400호 승선교.

 

 

 

 일주문 (전남지방문화재 제96호) : 기둥이 측면에서 보아 하나라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일주문은 누문인 강선루를 지나 처음으로 들어서는 문으로 실질적인 사찰의 경역을 의미한다.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외 4출목으로 다포식 건물이다. 일주문의 양쪽으로 담장이 연결되었고 돌계단으로 층계를 연결한 형식이다.
일주문 입구의 현판에는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기록하고 있고 뒷면에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이 절의 옛 산명과 사찰명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 조계문(曹溪門)이라고도 한다.

 만세루 : 만세루는 선암사의 강당 및 포행하는 공간에 해당하는 건물로서 수많은 학승들이 여기서 강학을 하였던 건물이다.
1824년에 대웅전과 함께 해붕,눌암스님 등이 중창한 건물로 익공형의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인 목조건물이다.

 대웅전[大雄殿] 보물1311호
사찰의 주불전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잇는 중심축에 위치한다. 대웅전은 선암사의 흥망과 함께하여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후 현종 원년(1660) 경잠(敬岑), 경준(敬俊), 문정(文正)의 3대사가 주축이 되어 중수하였으나 1759년의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1760년에 상월(霜月), 서악(西岳) 등에 의하여 다시 중건되었다.
그 후 1823년의 화재로 대웅전이 다시 타자 1824년 현재의 대웅전 건물을 중건하였다. 정유재란 이전에는 대웅전 자리에 2층의 미륵전이 존재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식의 팔작지붕집으로 장엄하고 화려하다. 높직한 다듬돌 기단위에 주좌가 뚜렷한 원형주석(圓形柱石)을 놓고 민흘림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배치하고 그 위로 공포를 짜 올렸는데 출목수는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매우 화려하다.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아직도 그 문양이 선명하다. 통문(通門)을 연결하는 대들보는 굵고 박공면에서 합각부분까지 용문양으로 장식하여 걸쳤다.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후불탱화에는 영산회상도를 모셨다.

 

 선암사 구시

 상사화 :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핀다.

 

 

 

 선암사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원통전, 각황전 담길따라 자라는 매화나무 50여주.

 원통전[圓通殿] 전남지방문화재 제169호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을 지닌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이다. 관세음보살님을 모신다고해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선암사 원통전은 숙종 24년(1698)에 호암약휴대사가 중창하였고 그 뒤 1759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1761년에 상월과 사악스님 등에 의하여 재중창하였다. 순조24년(1824)에 해붕, 눌암, 익종 세 대사가 중수하였고, 1923년에 운악당돈각(雲岳堂頓覺)의 유촉(遺囑)으로 금 1,000여원을 희사하여 1923년에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의 관세음보살님은 호암스님께서 조계산 배바위에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100일기도를 하였으나 친견하지 못하여 떨어져 죽으려 했다. 홀연 누군가 나타나 대사를 구해주었는데 그가 바로 관세음보살님이었다고 한다. 대사는 원통전을 중창하고 직접 친견한 관세음보살님을 모셨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丁)자형 건물로 정면에 기둥과 활주를 내어 처마선을 길게 돌출(突出)시켰다. 내진과 외진으로 나뉘어 내진의 배면 한쪽을 막아 불상을 안치하는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내진간의 배면 이외에는 모두 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고적도보에 나타난 사진으로 보면 외부벽에는 배면에만 벽이 있고 전면과 양 측면에는 벽이 없이 창문으로 개방되고 계자난간을 설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본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건물로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를 내어 사찰건축에서는 보기드믄 정(丁)자형 평면을 이룬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전면은 약1m정도 되는 축대를 쌓았고, 양 면과 후면은 외벌대로 되어있다. 초석은 덤벙주초와 일부는 원형 다듬돌로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위로는 주두를 얹고 창방으로 걸었으며 창방과 장성(長舌) 사이에 화반 동자주가 있다. 화반의 위로는 장설, 도리, 서까래 순으로 짜져 있다. 내부는 보가 없는 무량구조(無粱構造)로서 이 지방에서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구조 형식에 속한다. 내진과 외진은 간단한 벽과 문으로 구분되어 내진은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외진의 천장은 우물반지로 짜여져 있으며 내진의 천장은 촐목을 연결시켜 천정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전면의 돌출로 합각이 3곳인 팔작지붕으로 겹치마로 되어 있다.
전면에는 양쪽으로 쌍여닫이문과 중앙에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있고 양측면에는 쌍여닫이문이 하나씩 있다.
중앙의 사각합문에는 빗살문과 모란꽃살문을 달고 있다.
내부에는 '인(人)', '천(天)','대복전(大福田)'이라는 순조친필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이는 정조임금이 후사가 없자 선암사 원통전과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순조를 낳자 금병풍, 은향로 등을 포함하여 선암사에 하사한 것이다.

 

 

 

 선암사의 상선원인 칠전선원 현판에는 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이라 쓰여있어 선암사 선방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응진당[應眞堂]
응진당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상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유마경(維摩經)』,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등에서 나오는 제자를 모셔야 하나 조선시대에는 16나한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나한전, 영산전이라고 부른다.
나한은 득도(得道)한 수도자들인 성사과중(聖四課中) 최상의 경지에 이른 분들을 말하며 응진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16나한들은 특별히 석가의 수기를 받아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하지 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들이다.
응진당은 선암사의 경역내에서 가장 뒤쪽에 있는 별도로 설치된 조그마한 승원이다.
응진당이 본 승원영역의 주불전이고 중심축 좌축에 달마전(達磨殿), 우측에 진영당(眞影堂)이 배치되어 있다.
응진당은 1798년에 해붕스님에 의하여 중창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기와집이다.
깬돌을 교사형식으로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기둥을 세웠다. 주칸(主問)은 기둥위에 창방을 걸치고 그 위에 화반을 놓은 다음 소로를 얹어 뜬 장혀를 받치고 있다.
선암사의 각종 전각에서처럼 이 건물도 주심포 형식을 하면서 익공형식이 가미된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후기에 나타난 일반적인 형식으로 전형적인 주심포와 다포를 혼합하여 변용시킨 예라 하겠다.
또한 벽면에서 일출목(一出目)이 튀어나오고 그 위에 장혀받침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어 단출한 소규모 전각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외진(外陳)의 평주 사이에는 굵은 대들보를 걸치고 어칸에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좌우측의 퇴칸에는 와형문양이 장식된 널판을 천장으로 설치하였다. 측면은 내진에 고주를 두개 세우고 그 위에 중보를 걸친 다음 마루대공을 세워 장혀받침과 종도리를 걸쳤다. 배면은 외1출목의 강직하고 견고한 주심포형식의 포작을 하고 있다.
선암사의 응진당에는 삼존불과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삼존은 석가모니와 협시인 미륵과 제화갈라보살이다.

 진영각[眞影堂]
칠전구역의 응진당 우측에 중심축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는 건물로 선암사의 중창주나 크게 깨달은 스님의 진영을 모셔놓은 곳이다.
다른 이름으로 영각(影閣)이라고도 한다. 두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기단 속에 주초가 묻혀있고 원형기둥이 그 위에 서있다. 기둥위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민도리 형식으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을한 특이한 형태의 지붕이다.
양 측면 평보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기둥 2개가 세워져 중보를 받치고 있으며 위에 마루대공을 세운다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 건물은 1798년에 눌암스님과 해붕스님에 의하여 중창된 건물이다.

 미타전[彌陀殿]
응진당 우측에 나란히 위치한 요사형식의 승방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인 건물이다. 미타전은 대웅전과 함께 조선시대 사찰에서 2대불전의 위치를 점한 중요한 전각이다. 선암사의 칠전영역에서의 미타전은 원래 미타전이 갖는 전각의 의미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 같다.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위에는 특별한 공포형식을 취하지 않는 민도리집이다. 가구구조는 양쪽에 평주를 세우고 이들 사이에 대들보를 걸친 다음 그 위에 마루대공을 세워 장혀받침을 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실의 구성은 원래 좌측 2칸을 방으로, 우측을 부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98년에 눌암스님과 해붕스님에 의하여 중창된 건물이다.

 

 

 

 

 

 해우소[解憂所] 전남문화재자료 제214호
대변소는 一자형 건물의 북측 중앙에 출입용으로 맞배지붕을 붙여 T자형을 이루고 있다. 단순한 사찰의 화장실이지만 형태에서는 퍽이나 흥미롭다. 보통 사람들은 사찰의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는 정랑(淨廊), 청측, 뒷간이라고 부른다.
전체적으로 목재를 사용하여 일견 불편할 것 같으면서도 고풍이 있고, 지면에서 높아 악취를 멀리 하였으며 통풍이 잘되도록 전후에 살창을 두어 화장실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지혜로움을 보이고 있다. 특히 바닥의 짜임이 우수하고 남녀의 구분이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점이 흥미롭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분미물은 퇴비로 사용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이다. 이 건물은 정유재란때 초토화 되었으나 불에 타지 않은 몇몇 건물 중의 하나로 전한다.

 운수암.

선암사 중수비.

 삼인당(三印塘) 지방유형문화재 제46호 :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사적에 따르면 신라 경문왕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라 전한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저 멀리 승선교가 보이고, 왼쪽 앞엔 쪽동백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으며, 지금도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지고있다.
삼창주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께서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셨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조선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한다.
1660년에 경준(敬俊), 경잠(敬岑), 문정(文正) 세분의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庵), 도선암(道詵庵)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스님과 서악(西岳)스님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스님은 중창불사 뿐만아니라 1734-35년 두 차례에 거쳐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임금은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海鵬), 눌암(訥庵).익종(益宗)스님 등이 제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 -금봉기림(錦峯基林) 등의 4대 명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써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수도도량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선암사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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