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숙종때 더욱 튼튼하고 안전한 북한산성을 다시 쌓았다.
북한산 등반은 백운대보다 행궁지를 찾아보는 것이 먼저인 것같다.
해서 처음 북한산을 오르는 친구와 행궁지를 찾았다.
행궁지부터는 임금이 궁에서 행궁으로 행차하실 때 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거꾸로 대남성을 거쳐 구기분소로 내려왔다.
북한산성분소 -> 중성문 -> 비석거리 -> 행궁지 -> 대남문 -> 문수봉 -> 문수사 ->구기분소
10:30 12:00 12;40 13:20~15:20 16:30 16:40 17:10 18:40
==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조했다. 이 성은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구실을 했으며, 근초고왕의 북진정책하에서는 북정군(北征軍)의 중심요새지가 되기도 했다.
삼국이 모두 군사요지로 여겨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는데,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뒤 553년(진흥왕 14)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북한산성을 차지하고서 진흥왕순수비를 여기에 세웠다. 603년(진평왕 25)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했으나 곧 격퇴당했다. 또한 661년(무열왕 8)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20여 일 동안 포위 공격했을 때 성주 동타천(冬陀川)이 성 안의 주민을 동원해 끝까지 성을 지켰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 : 임금의 棺)을 옮긴 일이 있는데 이때 성을 증축했으며, 1232년(고종 19)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을 벌였다. 1387년(우왕 13) 개축했다.
조선시대에는 양 난을 겪은 뒤 도성 외곽성을 강화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1711년(숙종 37)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둘레 7,620보(3,716m)의 석성을 완성시켰다. 건축물로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북문 등 13개의 성문,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軍倉),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개는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다음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서)==
구름속 노적봉.
물봉선.
물방울다이아 바위.
칠유암.
좀깨잎나무.
누리장나무.
둥근잎유홍초.
복상나무.
중성문. 대서문쪽이 완만하여 성을 하나 더 쌓아 놓았다.
중성문옆 계곡에 나무를 쌓아 적의 침입을 막았던 흔적이 바위에 계단으로 남아있다..
시구문.
비석거리.
북한산 산영루자리.
행궁지에는 궁궐은 간데없고 며느리밑씻개를 닮은 고마리만 무성했다.
행궁지에 두루미천남성도.
행궁지에 남아있는 기와조각.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대남문.
문수봉 용혈.
문수봉에서 바라본 백운대, 인수봉, 노적봉.
문수사 입구.
삼각산천연문수동굴.
'사미인곡(思美in谷)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왕산 -2012/10/13- (0) | 2012.10.14 |
---|---|
북한산 족두리봉 비봉 -2012/09/15- (0) | 2012.09.16 |
불암산 -2012/06/19- (0) | 2012.06.21 |
강화도 마니산 -2012/01/21- (0) | 2012.01.24 |
북한산 원효봉 -2011/11/12- (0) | 2011.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