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본 항복 직전의 단둥 부두 풍경. 멀리 압록강 철교가 보인다. 동북전쟁 시절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임강(臨江)과 중강, 장백(長白)과 혜산, 도문(圖們)과 남양 등에 여러개의 교량이 있었다. 그중 사진에서 보는 단둥의 압록강 철교를 통해 가장 많은 전략물자가 동북으로 건너갔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⑧ 중국 국공내전과 북한의 지원
신중국 개국 10대 주역 중 한 사람인 샤오징광은 30년간 해군사령관을 지냈다. 회고록을 집필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북전쟁 시절 북한과의 관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해군 시절 마오쩌둥과 샤오징광의 모습. 연도 미상. |
악전고투하던 중공은
천윈을 평양에 파견했다
당시 북에는 일본군이 놓고 간
총과 탄약, 폭약이 쌓여있었다
김일성은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후 중국은 수십년동안
“조선이 우리 투쟁에 기여한 바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북한의 공헌을 치켜세웠다 바로 지난 일요일(13일), 시진핑 중국 주석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재추대축하전문을 보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또다시 추대되신 데 대해 축하를 보낸다. 형제적 조선 인민이 당신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국가건설과 경제발전의 여러 분야에서 반드시 새롭고 보다 큰 성과를 이룩하리라 믿는다. 전통적인 중조(북) 친선은 두 나라 노세대 영도자들께서 친히 마련하고 키워주신 것이며 우리의 귀중한 공동의 재부이다. 중국은 전통적인 친선협조관계를 끊임없이 공고히 하고 발전시켜 두 나라와 두 나라 인민들에게 복리를 가져다주며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다” 수십년간 북한에 보낸 축하전문과 다를게 하나도 없는 내용이다 보니 형식에 불과하다는 우리 언론들의 해설이 제발 맞았으면 하면서도 뭔가 씁쓸함을 감추기 힘들다. 몇십년간, 북한이 중국에게 뭘 그렇게 도와줬을까. 구체적인 설명이 빈약하다 보니 우리의 청·장년층은 물론이고 중국의 당이나 정부 관계자들조차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중국의 고위 간부들에게 간략하나마 구술을 남긴 사람은 저우언라이가 유일하다. 북한군 남침 직후인 1950년 7월8일, 저우언라이는 북한주재 대리대사로 부임하는 차이청원(柴成文) 등에게 이유를 설명한 적이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가 등등할 때였다. “김일성 동지를 만나면 위대한 승리에 대한 축하인사부터 해라.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도와준 조선의 당과 인민들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꼭 전해라. 너희들은 동북전쟁 참전 경험이 없기 때문에 1946년과 47년 동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잘 모른다. 동북전쟁중 ‘사보임강(四保臨江)’과 ‘삼하강남(三下江南)’ 전역(戰役)의 승리는 조선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당시 조선은 우리의 든든한 후방기지였다. 군인가족과 부상병을 돌봐주고, 전략물자 지원과 수송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조선동지들이 중국혁명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는 말 안해도 잘 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도와주기까지 했다. 어느 시대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평양에 와서 김일성을 만난 차이청원은 지난날 중국을 지원해준 데 대한 감사를 표하며 저우언라이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차이청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웃으며 짤막하게 몇마디로 답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해방 직후라 우리 동지들이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할 때였다. 그러다 보니 중국 동지들에게 고생만 시켰다.” 1946년 봄, 동북에서 국민당군을 상대로 악전고투중이던 중공이 조직부장 천윈과 후일의 해군 사령관 사오징광, 주리츠(현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주자무의 부친)를 평양에 파견했다는 사실을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다. 천윈이 “상하이에서 선적한 전략물자가 일본을 경유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하자 김일성은 선뜻 응했다. 마오쩌둥이 요구한 무기지원 요청도 김일성은 군말 없이 수락했다. 천윈은 감격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영원히 잊지않겠다”며 사오징광과 주리츠를 평양에 남겨놓고 동북으로 돌아갔다. 당시 북한에는 일본 침략자들이 놓고 간 무기와 탄약이 창고에 쌓여있었다. 김일성은 “현재 중국혁명이 곤경에 처해있다.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모른체 할수없다. 보관중인 무기와 탄약을 파악해라. 10만명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무상으로 중국에 지원하겠다.” 북한 내부에서도 “우리 형편에 10만명 분은 과하다”며 “1만명 분만 보내자”는 주장이 많았지만 김일성은 “이왕 돕겠다면 성심성의껏 지원해야 한다. 성의에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라”며 굽히지 않았다. 중국에 퍼주고 나면 정규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평양학원 학생들에게 나눠줄 무기가 부족하다고 해도 듣지 않았다. 중국 쪽 문헌을 보면 북한의 전폭적 지원과 관련해 당시 생존해있던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보현(1871~1955)도 한몫했다고 한다. “하루는 대동강을 건너던 김보현이 일본군들이 수장시킨 무기와 탄약더미를 발견했다. 김일성은 평양학원 간부들에게 빨리 대동강에 가서 무기와 탄약을 건져오라고 지시했다. 평양학원은 강에서 건져온 무기와 탄약으로 군사훈련을 계속했다.” 이런 내용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그대로 믿기에는 허술한 점이 많지만 당시 북한도 무기와 탄약 사정이 충분치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무기수송을 동북항일연군 출신 오백룡과 강상호에게 일임했다. 1946년 8월26일, 남양철도 경비대장이 탑승한 특별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둥(丹東)에 진입했다. 김일성은 10만여정의 총과 탄약 외에 교량과 철도 폭파에 쓰라며 일제 폭약도 보냈다. 일제가 나진(羅津) 질소비료공장에서 생산하던 황색폭약은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북한에서 보내온 무기를 받은 동북민주연군 지린(吉林)군구와 랴오닝(遼寧)군구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기분배를 담당했던 간부 한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각목과 화승총을 무기랍시고 들고다니던 전사들은 날이 샐 때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북한의 지원은 계속됐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