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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거점 ‘김일성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 모체가 됐다 -한겨레 2014/08/19-

思美 2014. 9. 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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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거점 ‘김일성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 모체가 됐다
한겨레  

마오쩌둥은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 출신들을 환대했다. 1964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외무상 박성철(사진 한가운데) 일행을 접견하는 마오쩌둥.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⑭ ‘88국제여단’의 항일유격전

북·중 우호관계의 출발점은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이다. 1937년부터 8년간 전개된 중국 항일전쟁의 지도자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였다. 장제스나 국민당 원로들은 북한의 지배층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흔히들 우스개 소리로 “놀던 동네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알고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많다.

1928년 12월28일, 동북 전역에 중국 국민당의 상징인 청천백일기가 펄럭였다. 이날을 계기로 50만에 육박하던 동북군도 국민당군에 편입됐다. 1931년 가을, 일본 관동군이 무력으로 동북을 강점했을 때 장제스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했다. 동북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막강전력을 자랑하던 동북군은 하루 아침에 왜적의 침입에 저항을 포기한 군대로 전락했다. 국민당 중앙군의 공세에 쫓겨 옌안(延安)에 안착한 중공 중앙 홍군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였다. 장제스는 동북에서 철수한 동북군을 시안(西安)에 배치한 후, 옌안의 홍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시안과 옌안은 거기서 거기였다. 위기에 몰린 중공은 선전전과 동북군과의 연합에 치중했다.

동북을 총 한방 안쏘고 일본에게 내주자 온 중국이 들썩거렸다. 중공의 지하당원이나 지지자들 중에는 선전의 고수들이 많았다. 중공은 국민당 통치에 염증을 느낀 진보적 지식인들도 적절히 활용했다. 말로만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회유도 수월했다. 동북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항일 무장세력의 기개를 찬양하는 글과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현재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이 동북의 엄동설한에서 흰눈에 붉은 피를 뿌린 항일의용군의 처절한 투쟁을 영화화한, <풍운아녀(風雲兒女)>의 주제곡인 것을 보면 당시 중국인들의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항일전쟁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제 나라 땅에 들어온 남의 나라 군대를 내쫓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부의 암덩어리인 중공 홍군을 먼저 정리하고 일본과 일전을 겨루겠다는 장제스의 기본전략인 ‘안내양외(安內攘外)’는 더이상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민심이 따르지 않다보니 정책의 옳고 그름은 둘째 문제였다. 중공 지도부는 공공외교에도 능했다.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 등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정당성과 존재 이유를 외부세계에 알리는데도 성공했다.

근거지 동북을 떠나 유랑민 신세가 된 동북군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장제스는 이들에게 무기나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장제스의 옌안 공격 명령에 “같은 민족끼리 싸우느니, 고향에 돌아가 일본군과 싸우다 죽겠다”며 머뭇거렸다. 이 틈을 중공이 파고들었다. 훗날 6·25전쟁 휴전회담과 제네바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李克農) 등이 동북군의 고급지휘관과 접촉했다. 일선 지휘관들이 호응할 기색을 보이자 전국의 2인자나 다름없던 동북군 최고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국·공이 연합해 항일전쟁을 수행해야한다는 저우언라이의 의견에 장쉐량도 동의했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과 북한 주둔 소련군 지휘관들. 맨 위 왼쪽 첫째가 최석천(최용건). 1945년 가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1931년 일본의 중국 동북 침략에도
국민당은 저항없이 철수명령 내려
중공은 반발여론 이용 선전전 치중
항일전쟁 촉구 시위가 잇따르고
결국 1936년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하지만 세력이 약화된 항일연군은
소련에 건너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김일성 등 주축 ‘88국제여단’ 창립
1천여차례 동북 침투전 승승장구
이후 중공과의 돈독함이 이어졌다

 

1936년 12월 장쉐량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항일전쟁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국·공 양당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된 장제스는 일본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단, 자신에게 총뿌리를 들이댄 장쉐량은 연금하고 동북군도 해산시켰다. 동북인들의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불만은 해소할 방법이 없을지경으로 악화됐다.

중국과 일본이 전면전에 돌입하자, 동북의 일본 관동군은 긴장했다. 만주군과 합세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열을 올렸다. 조선인 항일무장세력들은 관동군의 큰 골칫거리였다. 이들을 소탕하기위해 조선 출신들로 구성된 특설대까지 만들 정도였다. 자의건 타의건, 훗날 후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인물들이 속출했다.

땟국이 줄줄흐르는, 개털 옷을 걸친 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 전사들과 일본 군복을 뽐내는 조선인 청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영광과 치욕의 개인사를 만들어 나갔다. 박한종, 이홍광, 이민환의 뒤를 이어 유만희, 이복림, 서광해, 황옥청, 장흥덕 등 조선팔도에서 몰려온 열혈 청년들이 동북의 눈밭에서 숨을 거두고, 다른편에 서있던 사람들의 견장은 점점 무거워졌다.

1939년 늦가을, 동북 목단강변의 허름한 상가에서 동북 항일연군의 역사에 남을 회의가 열렸다. 70여개 현에 달했던 항일연군의 활동무대가 10개에도 못미칠 정도로 위축돼 있던 때였다. 신중국 설립 후, 중앙군사위원과 운남성 부주석을 겸하게 되는 저우바오중(周保中)과 항일연군 총 정치부 주임 리자오린(李兆麟), 중공 만주성 위원회 상무위원 펑중윈(馮仲雲;신중국 수리부 부부장과 하얼빈 공업대학 총장, 베이징 도서관 관장 등을 역임), 동북항련 제3방면군 사령관 천한장(陳翰章), 경북 선산 출신 허형식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저우바오중은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현재 동북항일연군은 2천명도 채 남지않았다. 마오쩌둥이 <논지구전(論持久戰)>에서 설파한 전략 사상을 행동에 옮기자.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강 건너 소련으로 가서 원동(遠東)지역에 야영을 설치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자.”

1940년 3월19일, 소련군 원동변방군 사령부는 중국 손님 3명을 맞이했다. 저우바오중은 소련 측 정치위원에게 곤경에 처한 동북항일연군의 실정을 설명하며 중·소 국경지역에 야영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소련 측도 동북에 주둔하는 일본 관동군의 전략과 군사정보에 정통한 동북항일연군의 협조가 절실했다. 동의를 안할 이유가 없었다. 11월 하순,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흑룡강을 건너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김일성도 저우바오중과 함께 소련 행을 택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총지휘자 양징위(楊靖宇)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양징위는 고집이 셌다. 무슨일이 있어도 중국을 떠나지 않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40년 2월18일, 양징위는 끝까지 곁을 지키던 조선인 경호원과 함께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소련에서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양징위와 억지로라도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소련생활을 시작한 동북항일연군은 남북 두곳에 야영(野營)을 건설했다. 북야영은 강신태(1945년 강건으로 개명), 남야영은 중국인 지칭(季靑)을 책임자로 선출했다. 소련 측의 보급은 부족함이 없었다. 항일연군들은 오랜만에 따듯하게 입고 편한 신발을 신었다. 빵과 고기도 실컷 먹었다. 소련 교관들은 별 이상한 교육을 다 시켰다. 유격전에 대비한 교량폭파와 적진 침투에 필요한 낙하산 훈련은 필수였다. 촬영, 측량, 정찰까지 익히며 동북항일연군의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정식으로 ‘항일연군 교도여단’을 출범시켰다. 정식 명칭은 ‘소련 원동방면군 제 88보병여단’, 혹은 ‘8641보병특별여단’이었다. ‘88국제여단’이라고도 불렀다.

동북에 흩어져있던 김책, 안길, 최석천(1945년 최용건으로 개명), 김일성, 최현, 강신태 등이 몰려있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의 모체나 다름없었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작렬하는 폭파음에 산하가 진동하면, 도처에서 왕샤오밍 얘기로 시간 가는줄 모른다”던 왕샤오밍(王效明)을 비롯해, 펑중윈, 차이스룽(柴世榮) 등과 인연을 맺었다.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들은 틈만나면 동북에 침투해 소규모 유격전을 벌였다.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1260여차례에 걸친 유격전에서 인명 희생은 2백여명에 불과했다고한다. 여단 내에는 4명의 영장(營長)이 있었다. 제1영장이 김일성이었다. 차이스룽, 왕밍꾸이(王明貴), 왕샤오밍 등 나머지 세명의 영장 중 차이스룽은 1944년 소련에서 세상을 떠났고, 왕밍꾸이와 왕샤오밍은 1955년 소장 계급장을 받았다. 각 영의 정치위원 중 세명이 안길, 강신태, 김책 등 조선인이었다. 직급은 최석천이 여단의 부참모장으로 제일 높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자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 소속 중국인 선발대는 57개 소조로 나뉘어 동북의 중소 도시로 잠입했다. 소련 군복에 소련군 군관 계급장을 착용한 선발대원들은 러시아어에 능했다. 동북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소련군과 협조가 잘됐다. 국민당이 발 빠르게 소련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중공의 홍군과 신4군이 동북으로 밀려오는 것을 묵인하기까지는 이들의 도움이 컸다. 이쯤되면 동북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중공이 김일성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김일성이 중공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4-08-18 오후 07:38:20 기사수정 : 2014-08-18 오후 09: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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