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思美 세상

“중공 승리해야 조선 해방” 조선인에게 투항이란 없었다 -한겨레 2014/09/02-

思美 2014. 9. 2. 10:59
728x90
반응형

 
“중공 승리해야 조선 해방” 조선인에게 투항이란 없었다
한겨레  

평양으로 부임하는 초대 북한 주재 중국대사 니즈량(왼쪽 넷째)을 환송하는 중국 외교관들. 왼쪽 셋째가 외교부 판공청 주임 왕빙난(王炳男), 오른쪽 둘째는 훗날 초대 유엔대사와 외교부장을 역임하게 되는 차오관화(喬冠華). 북한의 초대 주중대사 이주연의 모습(왼쪽 둘째)도 보인다. 1950년 8월 베이징역.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⑮ 중공 산하 조선인 부대

현대 중국의 경우, 정당과 정당 간의 합작은 성공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중국의 대표적 혁명정당인 국민당과 공산당도 예외가 아니다. 2차례 합작을 했지만, 뭔가 될 것 같다가도 결국은 피 비린내를 뿌리고 국민들만 골탕먹였다.

그런 와중에서 중국에 와 있던 우리 혁명가들도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북-중 관계의 뿌리도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밀월관계만 유지한 건 아니었다. 그 연원이 현 북한 정권의 주축이 된 동북항일연군과 88여단 출신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워낙 복잡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들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차피 인간이 만든 일,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1923년 6월, 중국 공산당은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듬해 1월20일, 광둥성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전국대표자대회도 공산당원이 기초한 반제반봉건 선언을 통과시켰다. 1921년 창당 이후 180여차례의 파업을 주도한 솜씨를 무시할 수 없었다. 30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회의는 10명의 공산당원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나 후보위원에 선출했다. 국민당에 입당한 중공 당원들은 조직부장과 농민부장, 선전부장 대리 등 요직을 독차지했다.

1차 국공합작의 막이 오르자 전국에 산재해 있던 국민당 지부는 중공 당원과 국민당 좌파를 중심으로 개편됐다. 그러다 보니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던 국민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합작의 최대 명분은 북방의 군벌세력 타도였다. 국공 양당을 중심으로 국민혁명군이 편성되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조선 청년들이 대거 북벌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인들은 고약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조선 청년들을 선봉에 내세웠다.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청년들은 삼천리강산을 그리며 남의 나라 땅에 선혈을 뿌렸다. 그래도 일제의 야욕에 혀를 깨물지언정, 세상물정 몰랐던 지도자들을 못나디못난 것들이라고 원망하지는 않았다.

모든 연합이 그런 것처럼, 국공합작도 오래가지 않았다. 1927년 7월, 3년 6개월 만에 금이 갔다. 합작이 파열되고 중공이 무장폭동을 일으키자 조선 혁명가들도 분열됐다. 일부는 공산당 근거지로 향하고, 일부는 상하이나 베이징 주변에서 반일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1937년 국공은 다시 연합했다. 1차와 달리 2차 합작의 명분은 항일전쟁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 조선 혁명가들은 환호했다. 항일전쟁 8년간 중공은 시종일관 동방 각 민족의 단결과 반파시스트 전선의 구축을 주장했다.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후베이성 우한에 와 있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연석회의를 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회의는 각 조직의 연합에 성공했다. 조선민족연합전선 명의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우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조선의용대도 우한에서 철수했다. 광시성 구이린(桂林)과 허난성 뤄양, 산베이(陝北)지역으로 흩어졌다. 산베이의 옌안 지역으로 철수한 조선 청년들은 거의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공이 이끌던 항일대열에 숫자를 더했다.

항일투쟁 명분 ‘2차 국공합작’에
조선 혁명가들 연합부대 조직
중공 참모장 “반파시스트 새 일꾼”

“인간지옥”이라던 국공내전에선
중공과 떼려는 국민군 회유 안통해
중공 8개 대대 중 조선인 부대만
투항하지 않고 버텼단 기록도

특수한 시대, 특수한 환경이 만든
민족성 강한 부대가 조선인 부대였다

중국의 항일전쟁 3년이 지난 1940년, 중국의 홍색 근거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 청년 40명은 중공이 홍군으로 불리었던 시절 중공과 함께 국민당군과 싸웠던 조선 출신 노전사(老戰士)들과 손을 잡았다.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의 지도 아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화베이(華北)와 화중(華中)지역에서 항일에 가담했던 조선 청년들도 화베이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했다. 화베이 조선청년연합회는 성립 반년 만에 국민당의 전시수도 충칭과 뤄양에서 온 조선 혁명단체의 청년들을 끌어들여 조선의용군을 발족시켰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 중국 쪽에서 발행한 신사군 자료집에 조선의용군 화중지대가 신사군 지휘관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조선인 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신사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해, 항일민주근거지를 보위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항일민주근거지는 신사군의 국토이지만, 조선 혁명가들에겐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1942년 7월, 조선청년연합회는 조직을 확대했다. 조선독립동맹을 출범시켰다. 부르기 쉽게 옌안독립동맹이라고 부르는 조선독립동맹 예하의 무장세력이 조선의용군이었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참모장 예젠잉(葉劍英)이 “조선의용군은 조선 혁명역량의 중추세력이다. 반파시스트 투쟁의 새로운 일꾼들이다. 팔로군, 신사군과 이상적인 배합”이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의용군은 중공의 기대를 충족시킨 듯하다. 마오쩌둥과 함께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설립했고, 자오스옌(趙世炎:전 중국 총리 리펑의 외삼촌),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프랑스에서 소년공산당을 결성했던 옌안 시인 샤오싼(蕭三)은 조선의용군을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국제종대(國際縱隊)에 비유했다.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남겼다.

1945년 11월, 국민당군과 일전을 앞두고 동북으로 이동하는 신사군. 상인으로 변장한 조선 혁명가들도 이런 모습으로 동북으로 가는 관문인 산하이관을 넘었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소외되기 쉬운 지역인 변구(邊區)에 주력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 변두리 지역도 조선 혁명가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조선독립동맹과 화베이 조선의용군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조선 교민들의 진입을 환영했다. 근거지의 학교에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 청년들에게 적당한 학교를 알선하고 학비도 받지 않았다. 조선의용군이나 팔로군, 신사군에 참가를 희망하는 조선 청년들에겐 소개장까지 써줬다. 중공은 “조선 민족의 해방과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1945년 2월5일, 옌안에 조선혁명을 위한 군사정치학교인 ‘조선군정대학’(朝鮮軍政大學)을 설립했다. 조선의용군은 중공과 팔로군의 지도를 받기는 했지만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쯤 되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중공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짐작이 간다. 항일투쟁에서 중공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과 직결된다고 확신해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이 투항하자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는 옌안의 조선군정대학 재학생 275명과 조선인 간부 40여명을 팔로군 포병사령관 김무정의 인솔하에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주더의 명령으로 동북에 들어온 조선인 전사들은 병력을 확충했다. 88여단 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의 기록에 따르면, 국공내전이 치열하던 1947년 당시 린뱌오가 지휘하던 동북민주연군(중공 제4야전군의 전신)의 정규군 부대에는 약 12만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한다. 지방 부대에 소속된 조선인까지 합하면 25만여명의 조선인들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과 벌인 전투에 참전했다.

조선인 부대는 특수한 시대에,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낸, 민족성이 강한 부대였다. 장제스의 국민당 부대에 대한 입장이 확고했고 전투력도 강했다. 평생 국공전쟁만 연구한 한 중국 학자의 글을 인용한다. “동북의 국공내전은 인간지옥이이었다. 잔혹하고 치열한 전투가 연일 벌어졌다. 국민당의 회유도 만만치 않았다. 중공 판스(磐石)현 대대에 3개 중대가 있었다. 그중 2개 중대가 조선인 부대였다. 1946년 봄, 대대가 철수하자 한족(漢族) 부대가 동요했다. 반란을 일으킬 기색이 엿보이자 현 위원회가 직접 나섰다. 조선인 부대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조선인 부대는 단숨에 한족 부대를 평정했다. 둔화(敦化)현에는 중공 무장대대가 8개 있었다. 1946년 12월17일, 7개 대대가 국민당 쪽에 투항했다. 끝까지 남은 유일한 대대가 조선인 대대였다.”

조선인 부대는 의지가 강했다. 국민당 정부의 동북지역 최고 지휘부인 동북행영(東北行營)은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선양에 조선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중공과 조선인 부대를 이간질시켰다. 1947년 장제스에게 보낸 보고서가 몇 년전 빛을 봤다. “조선인들을 중공과 떼어놓기 위한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 쪽으로 올 듯 하다가 결국은 우리를 배신한다. 정말 교활하고 신의가 없는 민족이다. 희생만 크고 성과는 미미하다. 조선인들만 전담할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

동북에서 승리한 중공 제4야전군은 여세를 몰아 화베이를 점령하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서 신중국 개국선언을 만천하에 알렸다. 1년 전 정권을 수립한 북한이 소련에 이어 두번째로 신중국을 승인했다. 서로 대사를 파견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순탄치는 못했다. 3년간 대사가 부임도 못하는 등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4-09-01 오후 07:35:29 기사수정 : 2014-09-01 오후 09:32:32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