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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민주연군에게 투항하는 국민당 기병대. 1948년 1월 신민(新民)현.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⑬ 동북 토비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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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초기인 1937년, 시인 원이둬(聞一多)는 학생들과 함께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윈난(雲南)성 쿤밍(昆明)까지 걸어갔다. 전쟁시절이다보니 별일을 다 겪었겠지만, 무슨 못볼 꼴을 봤는지 정부의 무능에 진절머리를 내며 토비(土匪)들에게 애정을 나타내는 일기를 남겼다. “무슨 놈에 나라가 이렇게 큰지 처음 알았다. 평소 떵떵거리며 거드름이나 피우던 것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야비한지도 직접 체험했다. 나라가 환난에 처하다보니, 평소 사람 값에도 못든다고 여겼던 토비(土匪)들이 저들보다 더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야, 토비가 인생의 목표였던 사람은 거의 없다. 난세의 부득이한 생존방법 중 하나였다.”
약탈이 직업인 지방 불법세력을 흔히들 토비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떼강도와 비슷하지만 워낙 강대한 지방 무장세력이다보니, 정부가 직접 나선다면 몰라도 현지 관원이나 군인들은 감히 손댈 엄두도 못냈다. 비록 불법조직이긴 했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다보니, 개중에는 규율이 엄하고 자존심이 강한 토비들도 많았다. 악질 지방 관리만 골라가며 터는가 하면,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과부가 생계를 꾸리는 집은 건드리지 않았다. 위법자는 법으로 다스리고, 부녀자 겁탈도 엄금했다. 여자 토비들도 많았다. 두목은 한결같이 머리(頭)가 잘 돌아가고, 안목(目)이 남달랐다. 평화시기라면 국가원수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준재들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는 됐다.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을 “마적과 진배 없는 집단”이었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해방 뒤 미 군정시기 경찰 최고급간부 한사람은 “나는 독립운동했다는 사람과 공산당, 그리고 먼지가 제일 싫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요즘 같으면 공산당 매도는 그렇다 치고라도, 독립운동가들을 욕보였다며 당장 목이 달아날 발언이었지만, 친일파였던 형님이 의열단원에게 죽는 바람에 다들 웃어넘겼다고 한다.
동북의 항일세력 중에는 토비 출신들도 많았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마덴산(馬占山)도 원래는 토비 두목이었다. 1931년 가을 일본 관동군이 동북을 점령하자 동북의 토비들은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성사되자 토비들도 자의반, 타의반, 항일전선에 합류했다.
동북에서는 토비를 마적이라고 불렀다. 현지 사정과 지리에 익숙한 토비들은 일본과의 무장투쟁에서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토비들이 항일투쟁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세력의 보존과 유지였다.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동북의 토비들은 확실한 관할 지역과 조직이 있었다. 일본의 동북 지배는 토비들의 이익을 위협했다. 일본 관동군은 시도 때도 없이 토비들을 소탕하고 토비들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
항일전에 나선 토비들은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변질됐다. 기율이 산만해지고 일본에 투항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일본도 이들을 적절히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토비에서 항일의 영웅으로 떠 올랐다가 민족의 죄인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일본군 따라 도시에 들어가면 고대광실을 차지하고 산해진미와 화류계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일본의 동북점령으로 국민당 정부가 동북에서 통치권을 상실하자 중공은 동북의 토비들을 주목했다. 이론가 후차오무(胡喬木)를 파견해 동북항일 의용군 24로군 결성에 성공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한때 일본과의 투쟁에서 반짝 했을 뿐,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은 토비 생활이 더 적성에 맞았다. 강력한 화력을 소유한 일본군보다는 지방 부호들을 습격하고, 부잣집 아들이나 부녀자를 납치한 뒤 돈 받고 풀어주는 일이 더 편했다. 일본군도 토비와 항일세력들을 엄밀히 구분했다. 직접 습격을 받거나 일본인의 재산을 위협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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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으로 끌려가는 토비 두목. ‘한간’(漢奸)이라는 죄명이 붙은 걸 보면 일제에 협력했던 토비로 추정된다. |
일본 패망뒤 동북에 토비 득실
가공할 화력으로 팔로군 공격
평양의 김일성 “토비 소탕” 지시
동북인민자치군 사령관 강신태
융원타오 손잡고 2년만에 소탕
중공, 민심 얻고 동북 입지 굳혔다
융원타오는 임종 앞두고도
한국전 북한군 총참모장이었던
강신태 전사를 애석해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당시 동북은 전 중국에서 유일하게 현대화된 곳이었다. 국·공 양당이 동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중공의 주축부대인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이 동북을 접수하기위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자 국민당도 뒤질세라 최정예군을 동북으로 투입했다. 당시 동북에는 20여만의 토비들이 있었다. 토비들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소련군에 대해 때가되면 떠날 사람들이라며 신경을 안썼다. 일본군이 떠났으니 우리세상이 왔다고 들썩거리던 토비들은 팔로군과 국민당 병력들이 몰려들자 긴장했다. “공비(共匪)들이 우리의 지반을 탈취하기 위해 이쪽으로 몰려왔다. 한판 겨루는 것외에는 별 방법이 없다.”
정통 정권이었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을 공비(共匪)라고 비하할 때였다. 토비들의 공격에 신경을 쓰기는 국민당군도 마찬가지였다. 중공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가며 토비들을 소탕했다. 그 과정을 통해 동북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중공이 2년만에 동북의 토비를 소멸해 민심을 얻고 세를 확장할 줄은 국공 양당 모두가 상상도 못했다.
김일성은 동북의 토비 소탕에도 일조를 했다. 동북 해방 직후 만주국의 경찰과 헌병, 특무요원들은 토비들을 회유하느라 혈안이 돼있었다. 동북에 진주한 국민당도 토비들을 ‘정치토비’로 변신시키기 위해 지혜를 짜냈다. 아편 거래를 묵인하고 웬만한 불법행위도 눈감아 줬다. 현지 사정에 밝은 토비들은 팔로군을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무기를 탈취하고, 납치한 팔로군을 엄동설한에 발가벗겨 산속에 내동댕이 쳤다. 평양의 김일성은 동북에 잔류중인 동북항일연군 출신 지휘관들에게 7가지를 지시했다. 그중 여섯번째가 토비소탕이었다.
1945년 가을 무렵, 남만 지구에는 유난히 토비들이 많았다. 동북에 산재해있던 토비들의 4분의1에 달하는 약 5만명이 이 지역에 몰려있었다. 퉁화(通化), 선양(瀋陽), 안둥(安東:현재의 단둥) 일대가 주 활동 무대였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무장한 토비들의 화력은 팔로군을 능가했다. 옌볜(延邊)지구에만 해도 약 1만3000명의 토비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온 중공의 동북민주연군을 위협했다. 김일성은 이 지역의 토비 토벌을 김책과 의논했다. 김책이 88국제여단 출신 강신태를 추천하자 김일성도 동의했다. 김일성이 자신의 최측근인 강신태를 염두에 두고도 김책의 의견을 물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때 김책은 강신태의 스승이었다. 이때 강신태는 옌볜에 있었다.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을 준비하던 김일성은 동북에 파견할 옌볜분견대를 조직했다. 박락권, 지병학, 최광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옌볜분견대의 인솔자로 강신태를 지명했다. 1945년 9월5일, 하바로프스크의 88국제여단 부대를 출발한 강신태는 13일만인 9월18일 옌지(延吉)에 도착했다. 10월20일, 중공 동북국은 중공 옌볜위원회 설립을 비준하며 강신태를 서기에 임명했다. 강신태는 옌볜 주둔 소련홍군 경비사령부 부사령관직도 겸했다. 뒤이어 11월 초, 동북국은 옌볜과 안둥을 총괄할 옌안 지구 서기로 웡원타오(雍文濤)를 파견해 동북인민자치군 옌볜국 분구 설립을 서둘렀다. 사령관에 임명된 강신태는 정치위원 웡원타오와 함께 옌볜지구 건군과 토비소탕을 준비했다.
강신태는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계속된 토비 소탕을 국·공전쟁에서 맹위를 떨치게되는 이홍광 지대(토비토벌 당시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 경기도 용인 출신인 이홍광은 조선인 중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최고위직이었다. 압록강을 넘나들며 평안도 일대의 일본군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35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마오쩌둥도 추도사를 발표했다.)와 항일영웅 양정위(楊靖宇)를 기리기위해 설립한 양정위 지대와 연합으로 전개했다. 지안(輯安), 퉁화(通化), 린장(臨江), 창바이(長白) 일대의 토비들과 백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뤘다. 토비 5백여명을 사살하고 4백여명을 포로로 했다. 투항한 천여명은 동북 민주연군에 편입시켰다. 강신태는 1천300여명의 토비들을 총 한방 안쏘고 귀순시킬 정도로 협상에도 능했다. 김일성이 지시하고 강신태가 집행한 남만 지역의 토비 소탕이 아니었다면 장백산 지역에 중공이 최초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97년 9월, 광저우(廣州)의 간부요양 시설에서 중공중앙 고문위원회 위원 웡원타오가 86세로 사망했다. 반세기 전, 동북에서 강신태의 토비 소탕을 거들었던 웡원타오는 죽는 날까지 강신태를 잊지 못했다. 임종을 앞두고도 자손들에게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총참모장으로 참전해 폭사한 강신태(강건)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