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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중공의 ‘북한화교 동원 공작’ 전폭적 지원

思美 2014. 7. 3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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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중공의 ‘북한화교 동원 공작’ 전폭적 지원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⑪ 북한 전역에 ‘화교위원회’ 설립
한겨레 노형석 기자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할 때 지안(輯安)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저우언라이는 지안까지 마중을 나왔다. 1953년 가을, 지안역에 도착한 김일성 일행을 저우언라이가 맞고 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나온 동북인민정부 주석 가오강(高崗; 저우언라이 뒤 안경 쓴 사람)과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김일성 뒤)의 모습도 보인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⑪ 북한 전역에 ‘화교위원회’ 설립

1992년 봄쯤으로 기억된다. 홍콩에서 알고 지내던 중국의 유명 잡지 편집인의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어제 왕멍(王蒙)이 서울에 갔다. 한국이 초행이다. 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연락이 올테니 만나봐라. 한나절 같이보내며 이런저런 얘기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연락했다. ”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 왕멍에 대해서는 간간히 이름만 들었을 뿐, 아는게 거의 없을 때였다. 89년 천안문사태로 실각한 자오즈양이 권좌에 있던 시절 문화부장을 지냈다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

중국의 지식인 중에는 대한족주의자(大漢族主義者)들이 수두룩하다.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본명보다 김용(金鏞)이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무협소설가 차량융(査良鏞)이나, 철학자 펑요란(馮友蘭), 명 산문가 지셴린(季羨林) 등 우리 귀에 낯설지 않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세상 구경을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정도가 심하다. 겉과 속이 달라야 세련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답게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딴판이다. 특히 한국을 보는 눈이 그렇다.

왕멍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을 아래로 보는 기색이 표정에 묻어났다. 첫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어제 회의장에 가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회의였다. 도대체 나를 왜 초청했는지 모르겠다”며 픽 웃었다. 초청한 사람들을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아침 베이징에 전화했다. 서울이 어떠냐고 묻기에 비행장과 호텔이 좋다고 말했다.”

초청한 기관을 듣고보니 전혀 엉뚱한 사람을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이 나올만도 했지만 기분은 썩 좋지않았다.

몇년 뒤,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을 때 태도가 확 달라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시종일관 한국 찬양 일색이었다. 내 중국친구에게 “왕멍은 네가 중국인인줄 알았다”고 하더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됐다.

그와 서울 광화문 옛 중앙청 인근을 지날 때 왕멍이 정율성(鄭律成·1914~76)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름은 들었지만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다고 하자 외교관 딩쉐쑹(丁雪松·1919~2011)을 아느냐고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회고록이나 평전이 있냐고 묻자 볼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율성의 부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눈뜬 장님이었다. 홍콩에 간김에 딩쉐쑹의 회고록을 구해보니 겉표지가 눈에 익었다. 건성으로 몇 페이지 봤던 기억이 새로웠다. 객지의 호텔방에서 다시 봤지만 끝까지 보지는 않았다. 6·25 전쟁이 남쪽에서 도발한 전쟁이라는 구절이 나오자 그냥 덮어버렸다.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 후에도 왕멍은 한국을 심심치않게 다녀갔다. 한번은 가까운 친구에게 왕멍이 정율성의 고향에 가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불렀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적절한 처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정율성을 “중국 조선족”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겐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년의 딩쉐쑹. 여성으로는 중국 최초의 외국 주재 대사였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대사를 역임했다. 1992년 2월14일 오후, 베이징의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건물 앞에서.

동북전쟁중이던 중국 공산당은
화교들 재력·인력 동원 시급했다
서둘러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
김일성에 “협조해달라” 서신 보내자
공작에 필요한 간부파견 허용했다

조선노동당 중앙·각 도 당위원회에
화교위 설립, 비서장에 딩쉐쑹 임명
“주리즈 지시 받으라”는 말과 함께
모든 권한 부여하고 업무 일임했다

정율성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고, 남북이 서로 오가는 날이 오면,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야 될 사람들 중 그 이름이 맨 앞에 올라가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 정율성이다. “신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작곡한 네얼과 불후의 명작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의 작곡자 시싱하이(洗星海)의 뒤를 잇는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 무산계급 혁명음악 사업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전 중국 국가 부주석 왕쩐(王震)의 평가가 바뀔 가능성도 전혀 없다.

정율성은 북한의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중국쪽 기록에 의하면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사람은 정율성이 유일하다고 한다. 몇 년 전 딩쉐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정율성의 고향인 국내 한 광역시에서 조문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아무리 고향이 자랑하는 인물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다. 사설단체라면 모를까, 공공기관에서 나선 일이 적절했는지는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건 때가 있는 법이다. 이 일은 세월이 지나면 후손들이 해야 마땅한 일이다.

딩쉐쑹은 남편 정율성 못지않게 북한과 인연이 깊었다. 중공 동북국 평양주재 전권대표 주리츠가 이끌던 ‘평양 이민공사’ 외에도 ‘북조선화교연합총회’라는 거창한 이름의 단체가 있었다. 화교위원회 비서장이었던 딩쉐쑹은 이 단체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일본 패망 직후, 한반도에는 6만명에 가까운 화교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중 2만여명이 38도선 이북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직업도 다양했다. 90%가 산둥 출신이다보니 농업 인구가 제일 많았지만 음식점, 잡화상, 바느질가게, 이발소 등을 운영하는 화교도 적지 않았다.

일본은 36년간 화교와 조선인들을 이간시켰다. 특히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후에는 한국인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비겁하고, 야비하고, 지저분한 민족이 중국민족’이라고 각인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식민지 교육의 귀재였던 시오하라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부임해 기획한 이 교육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골목에서 한국과 화교 청소년들이 조우하면 서로 조롱하고, 끝내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특히 화교 밀집지역이던 서울의 순화동 골목은 조용할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였다.

연일 화교 배척사건이 일어나기는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쪽보다 더 심했다. 밖에 나갔다가 머릿통 깨지거나 엉금엉금 기어들어오는 사건들이 하루에도 몇건씩 발생했다.

그 와중에 동북에서 국공전쟁이 발발하자 상류층에 진입한 화교들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북한의 화교들 중에는 국민당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 공산당 편에 선 사람은 소수였다. 어느편에 서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화교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공 동북국은 북한의 화교들을 같은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을 서둘렀다. 화교들의 재력과 물력,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북한측에 협조를 요청했다. 동북국 부서기 천윈이 조선 노동당측에 화교 공작에 협조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편지를 받은 김일성은 이의가 없었다. 그쪽에서 알아서 하라며 화교 공작에 필요한 간부들을 파견해도 좋다는 답신을 보냈다. 중공 중앙과 동북국에서 파견된 간부들은 조선 노동당 중앙과 각 도의 당 위원회에 화교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김일성은 화교위원회를 대놓고 지원했다. 주임은 조선노동당원 중에서 임명했지만 뭘하는지 알 필요도 없다며 업무에서 배제시켰다. 비서장에 중국인을 임명해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쯤되면 북한의 화교 업무를 중공측에 일임한거나 다름없었다. 김일성은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을 비서장에 임명했다. 1946년 겨울, 김일성은 딩쉐쑹에게 ‘조선 노동당 중앙교무위원회 비서장’ 임명장을 주며 주리츠의 지시를 받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평양 이민공사의 진남포 지사장이었던 궁허셴(宮和軒)의 보좌관은 당시 딩쉐쑹이 김일성의 비서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구술을 남겼다. 길지만 추려서 인용한다.

“궁허셴은 동북으로 보낼 무기와 장비 구입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는 함께 거리에 나왔다가 누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중국어가 유창한 조선인이었다. 궁허셴과는 항일전쟁시절의 동료였다. 궁허셴이 ‘군수물자 구입을 위해 왔다. 산둥 지역에는 조선인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많다. 산둥의 특산물과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무기를 교환하고 싶다’고 하자 조선인은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면 모든게 해결된다며 소개장을 써줬다. 평양에 가서 김일성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소개장을 내밀며 신분을 밝혔다. 잠시 후 한 여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조선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의사 교환을 어떻게 해야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여인이 김일성 위원장이 대신 만나보라고 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딩쉐쑹이라면 옌안(延安)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었다. 조선인 정율성과의 연애 때문에 옌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딩쉐쑹은 우리를 김일성의 집무실까지 데리고갔다. 김일성은 우리 부탁을 모두 들어줬다. 다롄(大連)항에 있는 물자를 들여오고 싶다고 하자 서두르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업무를 마친 나는 동북에 돌아와 고향 지안(輯安)의 철도청에 근무했다. 김일성 주석이 지안을 방문했을 때는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일도 일이지만, 진남포 시절 우리에게 해줬던 일을 생각하면 피로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4-07-28 오후 07:27:07 기사수정 : 2014-07-28 오후 08: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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