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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동북전쟁중이던 중공에게 ‘편안한 안락의자’ 같았다

思美 2014. 7. 2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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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동북전쟁중이던 중공에게 ‘편안한 안락의자’ 같았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➓ 중공 ‘후방’ 자처한 북한
한겨레 노형석 기자
저우언라이가 1946년 11월 국공내전 발발 직전 난징의 기자 회견장에서 내전의 책임이 국민당 쪽에 있다며 장제스를 비난하고 있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➓ 중공 ‘후방’ 자처한 북한

1979년 9월, 전국정협 부주석 사오화(蕭華)가 북한을 방문했다. 1955년, 최연소 상장 계급장을 받았던 사오화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노장이었다. 김일성과 자리를 한 사오화는 34년 전 가을을 회상했다. 사오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북 해방전쟁 시절, 우리가 가장 어려웠을 때, 위험을 무릎쓰고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를 도와줬다. 그때 조선은 중국 동지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후방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 한마디가 우리를 고무시켰다. 전투가 시작되자 주석은 약속을 지켰다. 그 일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골백번을 해도 부족하지 않고 아무리 들어도 기분좋은 말이었다.

1945년 11월 말, 국민당과의 결전을 앞둔 중공은 압록강변 안둥(安東; 지금의 단동)지구에 파견할 지휘관을 물색했다. 저우언라이는 사오화가 적임자라고 단정했다. 사오화는 17세 때 중국 혁명에 뛰어들었고, 22세 때 산둥성 주석과 단독으로 담판을 벌였던 역전의 용사였다. 장정시절 홍군이 즐겨부르던 ‘장정조가’(長征組歌)의 작곡자이기도했다.

안둥에 지휘부를 차린 사오화는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과의 접촉을 모색했다. 항일전쟁 시절 중공의 동북 특파원을 역임했던 사오화에게 김일성은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 김일성이 신의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참모장을 신의주로 파견했다.

신의주를 시찰중이던 김일성은 참모장을 만나 사정을 들었다. 참모장은 사오화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현재 우리부대는 국민당 군에게 포위돼있다. 청컨대 안둥을 한번 방문해주기 바란다.”

김일성의 수행원들은 반대했다. 소련 고문들도 찬성하지 않았다. 이유가 비슷했다. “현재 안둥은 일촉즉발이다. 언제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다.”

김일성은 이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극비리에 압록강을 건넜다.

사오화와 김일성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길이 없다. 당시 랴오닝(遼東)군구 사령부에 근무했던 사람이 상세한 구술을 남겼다. 길지만 인용한다.

“중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김일성은 중국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동북에 관해서는 우리보다 더 잘고 있었다.”

김일성은 사오화를 안심시켰다. “동북지구는 조선, 소련, 양국과 국경을 접하고있다. 필요할 때 중공은 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동북을 포위하고 있지만, 저들에게는 견고한 후방이 없다. 점령 지역도 대도시에 불과하다. 중소 도시를 점령해서 힘을 보충한 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기동전과 유격전을 병행해라. 그렇게만 하면 국민당군을 멸망시킬 수 있다.”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무모한 충돌을 피해라. 도시에 몰려있지 마라.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농촌으로 흩어져라. 농촌에 강력한 근거지를 만들어라. 군대와 군중들에게 사상 교육을 게을리하지 마라. 필승의 신념을 심어줘야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에 임한다. 장백산 지역의 해방구를 목숨을 걸고 사수해라. 곤란에 처했을 때 후퇴할 곳이 있어야한다. 너희들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지역이다. 장제스 부대에 양식과 물자를 제공하지 말라고 군중들을 단단히 교육시켜라.”

실제로 동북 전쟁기간 동안 중공은 북한을 편안한 안락의자에 비유했다.

훗날 사오화가 린뱌오(林彪)에게 김일성의 충고를 전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동북에 부임한 린뱌오는 도시에서 철수한 후 농촌에 들어가 민심을 장악하고 국민당군에 공세를 퍼부어 승리의 기틀을 마련했다. 린뱌오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훗날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대우는 융숭히 했지만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김일성은 사오화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다. 사오화가 부상병과 군속들의 조선 경내 이전을 요구하자 신의주로 옮기라고 선뜻 응했다. 새벽 닭이 울자 김일성은 안둥을 떠났다. 여러 사람의 구술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김일성의 안둥 방문은 사실인듯하다. 내용도 비슷비슷한 관계로 이쯤 해두기로 한다.

지난회에 중공이 평양에 설치한 비밀기관인 평양이민공사와 주리츠(朱理治)를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다. 한 독자로부터 좀 자세히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45년 8월 중순, 소련군 지휘관과 함께 산하이관(山海關) 작전을 숙의하는 주리츠(가운데 종이를 손에 든 사람)의 모습.

국민당에 포위 당한 중국 공산당은
동북을 잘알던 김일성을 초청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간 그는
북한을 ‘견고한 후방’이라 말하며
“민심을 얻어 힘을 키우라” 조언했다

둘째 아들이름이 ‘평양’인 주리츠는
김일성과 형제처럼 격없이 지냈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이들의 통화는
‘같은나라 같은직책’ 사람들 같았다

지금도 중국의 웬만한 서점에 가면 <주리츠전(朱理治傳)> <주리츠탄신100주년문집> 등 그에 관한 서적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중에서도 주리츠의 이민공사 시절에 관한 부분은 여성 최초의 신중국 외국주재 대사를 역임한 딩쉐쑹(丁雪松)의 회고록과 <회억동북해방전쟁기간동북국주조선판사처(回憶東北解放戰爭期間東北局駐朝鮮辦事處)>가 가장 상세하다.

평양 이민공사 사장 주리츠의 공식 직함은 ‘평양 주재 중공 동북국 연락사무소 수석전권대표’였다. 1907년, 장수(江蘇)성 난퉁(南通)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주리츠는 중공의 원로 당원이었다. 20세 되던 해 3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명문 칭화대학 경제학과 2학년생이던 주리츠는 입당 1개월 만에 장제스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공산당 숙청에 나서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 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쉬하이둥(徐海東)과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류즈단(劉之丹)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특히 저우언라이의 신임이 대단했다. 항일전쟁 전야, 장쉐량이 저우언라이에게 시안에 주둔하던 동북군에 연락관을 파견해 달라고하자 선뜻 주리츠를 연상했을 정도였다. 1936년 12월, 장쉐량의 동북군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항일전쟁과 국공합작을 요구하기까지는 주리츠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주리츠는 행동이 민첩하고 직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주리츠를 예젠잉(葉劍英)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딩쉐쑹의 평이 흥미롭다. “당 중앙과 동북국이 평양에 주리츠를 파견하기로 한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결과였다. 주리츠는 조선의 당과 정부에 있는 인물들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경력이 다채로웠다. 경제가 뭔지를 알고, 당중앙과도 수시로 연락할 통로가 있었다.”

평양에 부임한 주리츠는 북한의 지도층과 자주 어울렸다. 특히 김일성과의 만남이 빈번했다. 몇일에 한번씩은 꼭 만났다. 나이는 주리츠가 5살 더 많았다. <주리츠전>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당시 김일성은 삼십 오,륙세 정도였다. 나이에 비해 노련하고 정치가의 풍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당, 정, 군 건설로 한참 분주해 보였다. 단결을 강조하며, 산재해 있는 역량을 모으기위해 애쓰는 모습이 특이했다. 일찍이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탓에 중국 공산당과 군대, 간부들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주리츠와는 형제처럼 가까웠다. 두사람 사이에 외교적인 예의나 의전 따위는 찾아 볼수도 없었다. 특히 전화로 얘기할 때는 같은 나라의 같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돌려서 말하는 법들도 없었다. 소련군을 매수하기 위해 머리 맞대고 의논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주리츠의 부관도 구술을 남겼다. “우리 대표와 김일성 위원장은 하루에도 몇번씩 통화를 했다. 비서나 부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걸고 받을 때가 많았다. 낙관적인 성격이 비슷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번은 주리츠의 부탁을 받은 김일성이 군수물자 수송을 운수상에게 지시했다. 제 날짜에 이루어지지 않자 전쟁에는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 사람 망신 시키는 놈이라며 운수상을 파면시켰다. 비밀 얘기를 주고 받을 때는 사냥을 나갔다.”

주리츠는 김일성의 가족과도 친했다.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 같았다. 주리츠가 오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주리츠의 부인이 동북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집으로 초청했다. 두 여인이 자매처럼 가까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리츠는 최용건과도 친했다. 하얼빈에서 돼지고기와 고량주가 오면 꼭 최용건과 나눠 먹었다. 최용건의 부인 왕징(王靜)은 중국여인이었다. 특이한 음식을 만들면 주리츠의 사무실까지 뒤뚱거리며 들고오곤했다. 주리츠는 왕징이 만든 요리를 제일 좋아했다. 1947년 9월27일, 주리츠의 두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부인이 난산이라는 말을 듣자 최용건 부부는 온종일 병원 앞을 서성거렸다.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이름을 주핑양(朱平壤)이라고 지어줬다.

포병 사령관 무정도 틈만나면 주리츠의 집을 찾았다. 고향에 온 것 같다며 술 한잔 하면 떠나갈 듯이 중국 노래만 불러댔다. 이 정도면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분하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4-07-21 오후 07: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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