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3일, 북한을 거쳐 단둥에 도착한 신중국의 민주인사들. 왼쪽 첫째가 젠보짠. 둘째가 마쉬룬. 궈모뤄(왼쪽 넷째)와 루쉰의 부인 쉬광핑(왼쪽 여섯째)의 모습도 보인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⑨ 북·중 합작 ‘평양이민공사’ 설립
1991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가운데)을 환영하기 위해 장쩌민 국가주석(오른쪽)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한 두핑. |
52만톤 전략물자·18개 부대 등
북한 경유해 동북 진입시켜
국민당군이 단둥을 점령하자
2만 중공 부상병·가족들 신의주로
김일성은 이들을 냉대하지 않았다
숙식제공은 물론 지휘관엔 열차도 중국은 북한의 지원이
외부로 알려지는 걸 싫어했다
최근 조금씩 자료가 공개되자
김일성 부자가 중국에 올 때마다
기상천외한 대접을 받은 이유를
중국인도 차츰 수긍하는 듯하다 이민공사가 북한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중공 남만지구 부서기 사오화(蕭華)가 지휘하는 부대가 안산(鞍山)과 하이청(海城)을 공격했다. 동북군벌 장쭤린(張作霖)의 발상지였던 이 지역은 국민당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국민당군 184사단이 중공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노발대발했다. 동북 보안 사령장관 두위밍(杜聿明; 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장자 양전닝의 장인)에게 엄명을 내렸다. “반란군들을 인정사정 보지말고 끝까지 추격해서 철저히 소멸시켜라.” 장제스의 직계였던 두위밍의 동북군은 지상군과 공군을 동원해 184사단에 맹공을 퍼부었다. 압록강변까지 쫓겨간 184사단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강을 넘어 북한 땅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활로가 없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장환저우(姜煥舟)는 함경북도 나남에 와있던 강신태를 찾아가 184사단의 압록강 도하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강신태가 김일성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하자 장환저우는 왕이즈(王一知)와 함께 평양으로 김일성을 찾아갔다. 강신태의 보고를 통해 사정을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184사단의 입경을 허락했다. 장환저우와 왕이즈는 김일성과 남다른 사이였다. 동북항일연군 시절 장환저우의 입당 소개인이 김일성이었고, 왕이즈는 소련 88여단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부인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184사단은 북한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했다. 두만강을 건너 다시 동북으로 이동,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부탁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단 한번도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완벽한 통계라곤 할 수 없지만, 1947년 한해만 해도 북한을 경유한 전략물자가 21만톤에 달했다. 48년에는 31만톤에 조금 못미쳤다. 물자만이 아니었다. 1946년 하반기에 약 18개 부대가 북한을 경유해 동북으로 진입했고, 1947년에는 북한을 통해 동북근거지로 이동한 인원이 1만명을 웃돌았다. 상하이에 있던 중공 간부와 군 지휘관들도 남포 항에 상륙해 한숨을 돌린 뒤, 북한이 내준 열차를 타고 랴오둥(遼東)지역에 안착할수 있었다. 동북에 와있던 간부 가족들도 거의가 전쟁 기간 동안 북한 땅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소년공산당을 창당했던 리푸춘(李富春)과, 훗날의 공군 사령관 류야러우(劉亞樓), 중공 초기 지도자 리리싼(李立三), 중국 부녀연맹 주석 차이창(蔡暢)을 비롯해, 천윈의 부인 위러무(于若木)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중공 지도자와 가족들이 한동안 북한에 머물며 신세를 졌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천윈의 장남인 전 인민은행장 천위안(陳元)도 어머니 위러무와 함께 평양에 어린시절의 추억을 남겼다. 1946년 10월 말, 국민당군이 압록강변의 단둥(丹東)을 점령했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2만명 내외의 부상병과 가족들이 단동의 맞은편 신의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들을 냉대하지 않았다. 전투요원과 부상병, 군인 가족들을 민가에 분산시켰다. 중상자들은 병원에서 의료혜택을 받았다. 당시 북한 형편을 감안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은 남만 지구에서 중공이 사용하던 무기의 85%와 2만톤 가량의 전략물자도 북한 경내로 이전시켰다. 북한은 밤만 되면 압록강 연안에 노동력을 동원해 안전한 곳으로 실어날랐다. 단둥과 퉁화(通化)가 수복되자 다시 남만지역으로 옮길 때도 북한은 도움을 줬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할 때는 참여자의 면목이 중요하다. 중공은 홍콩과 해외에 산재해 있던 민주인사와 무당파 인사들의 확보에 팔을 걷어 부쳤다. 대 문호 궈뭐러(郭沫若)와, 루쉰의 부인 쉬광핑(許廣平), 명 서예가이며 반 장제스운동에 앞장섰던 마쉬룬(馬敍倫), 역사학자 젠보짠과 허우와이뤼, 쓰촨의 성인이라 불리던 중국 민주동맹 주석 장란(張瀾)등이 홍콩 지역을 관장하던 환샹(宦鄕)과 중국 초대 유엔 대사로 유엔 총회석상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멋진 연설을 하게되는 차오관화(喬冠華)등의 안내로 평양에 머물다 단둥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국제사회는 냉정하다. 향후 무슨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네룽전이 형제나라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가고, 황커청이나 사오징광이 아예 거론조차 안한 것도 이해가 간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 4월15일치에 8회를 실은 뒤 중단됐던 격주 연재 ‘김명호 교수의 북-중교류 60년’을 이번주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세월호사건과 지방선거 등의 기사 수요에 따른 지면 사정으로 석달 넘게 연재가 지연돼 필자와 독자들께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매주 기획면을 통해 북-중 교류의 비사들을 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