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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부탁이라면 단 한번도 거절 안했다

思美 2014. 7. 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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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부탁이라면 단 한번도 거절 안했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⑨ 북·중 합작 ‘평양이민공사’ 설립
한겨레 김영희 기자
1948년 12월3일, 북한을 거쳐 단둥에 도착한 신중국의 민주인사들. 왼쪽 첫째가 젠보짠. 둘째가 마쉬룬. 궈모뤄(왼쪽 넷째)와 루쉰의 부인 쉬광핑(왼쪽 여섯째)의 모습도 보인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⑨ 북·중 합작 ‘평양이민공사’ 설립

신중국은 국·공내전 시절 북한의 지원을 인정하면서도 외부에 알려지는 건 싫어했다. 그간 당과 정부의 입장이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도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신중국 건국에 기여한 10대 원수 중 한사람이며 6·25전쟁 시절 총참모장이었던 네룽전의 3권짜리 회고록이 한 예다. 국·공내전을 회상하면서 북한의 공식 명칭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수립 이전에 벌어졌던 일이라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형제나라라고만 했다.

신중국 해군의 창건자 사오징광도 400쪽에 가까운 장편의 회고록을 남겼지만 천윈과 함께 국경을 넘어와 북한에 지원을 요청한 사실은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훗날 총참모장을 역임한 황커정(黃克誠)이나 다른 중앙위원들도 마찬가지다. 전쟁 외에는 매사를 귀찮아 하던 린뱌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동북 민주연군과 동북 야전군, 그 후신인 제4야전군의 정치부 비서장과 6·25전쟁 시절 중국군 정치위원 등을 두루 거친 두핑(杜平)의 평전이나 회고록도 어물쩡 넘어가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땅에서 동북 항일연군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의 항일 무장투쟁 기간이 중공의 주력인 팔로군이나 신사군보다 길었고, 국공내전 승리의 전주곡인 동북 해방전쟁에서 승기를 잡기까지는 북한의 지원이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무리는 아니다.

최근에 와서 조금씩 자료가 공개되자 일반 중국인들도 김일성 부자가 중국에 올 때마다 기상천외한 대접을 받았던 이유를 조금씩 수긍하는듯 하다. 1946년 7월, 중공 중앙 동북국은 북한에 특수 임무를 목적으로 한 연락사무소 비슷한 걸 내고 싶어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북한 땅에는 다렌(大連)의 지하당과 남만주 일대의 동북 민주연군 부대들이 평양을 비롯한 여러곳에 중구난방으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중공 중앙과 동북국은 통합기구 설립이 절실했다. 동북국 서기와 동북 민주연군 사령관을 겸하던 린뱌오는 이 업무를 천윈과 사오징광에게 일임했다.

8월 중순, 주리츠(朱理治)와 함께 평양에 온 사오징광은 김일성을 만나 사정을 털어놨다. 김일성도 동북국 조선주재 연락사무소 설립에 동의했다. 노출을 피하기 위해 명칭은 평양이민공사(平壤利民公司)라 하기로 합의했다. ‘동북국 및 동북민주연군 주 조선 전권대표’를 지낸 주리츠가 구술을 남겼다.

“우선 사무실부터 물색했다. 당시 평양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여관이 많았다. 대동강 서안에 동화원(東華園)이라는 여관을 통째로 빌려 무전기를 설치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2층 건물을 싼값에 임대해 숙소로 사용했다. 편하게 서화원(西華園)이라고 불렀다. 공작 인원은 100명 남짓했다. 조선어와 러시아어 통역들도 고용했다. 동북과 교통이 편리한 지역과 항구 도시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진남포, 신의주, 만포, 나진에 지역 이름을 딴 평양이민공사 지사 간판을 내걸었다. 각 지사의 책임자와 공작인원은 다렌에서 배를 타고 북한으로 들어왔다. 규모는 나진 지사가 제일 컸다. 팔로군과 신사군에서 차출한 간부만 100명이 넘었고 전체 인원은 600명에 가까웠다.”

평양이민공사의 업무를 원활히 하기위해 조선노동당도 기구를 설립했다. 국민당의 지도를 받던 화교 연합단체 중화상회(中華商)를 해산시키고 화교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주임은 북한측에서 임명했지만 있으나 마나였다. 중국인이 비서장을 맡아 모든 일을 처리하게 했다. 초대 비서장이 훗날 여성으로는 신중국 최초의 외국주재 대사를 지내는 딩쉐쑹(丁雪松)이었다.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딩쉐쑹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조선인 정율성의 부인이기도 했다. 한때 중국에서 가장 비밀이 많은 기구 중 하나인 신화통신사의 평양주재 사장을 지내기도했던 딩쉐쑹은 1996년 국립국악원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남편의 고향인 전남 광주를 찾은 적이 있다.

평양이민공사는 동북야전군이 승리하기까지 2년간 존속했다. ‘부상병 안치와 전략물자 이전, 홍콩과 국민당 점령지역에 있던 민주인사와 무당파 인사들의 귀국, 북한측에 대한 원조 물자 요청과 식량구매, 양국 국민과 정당간의 우호합작, 화교공작’ 등 5가지를 원만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1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가운데)을 환영하기 위해 장쩌민 국가주석(오른쪽)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한 두핑.

국공내전 시절 중공은
52만톤 전략물자·18개 부대 등
북한 경유해 동북 진입시켜
국민당군이 단둥을 점령하자
2만 중공 부상병·가족들 신의주로
김일성은 이들을 냉대하지 않았다
숙식제공은 물론 지휘관엔 열차도

중국은 북한의 지원이
외부로 알려지는 걸 싫어했다
최근 조금씩 자료가 공개되자
김일성 부자가 중국에 올 때마다
기상천외한 대접을 받은 이유를
중국인도 차츰 수긍하는 듯하다

이민공사가 북한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중공 남만지구 부서기 사오화(蕭華)가 지휘하는 부대가 안산(鞍山)과 하이청(海城)을 공격했다. 동북군벌 장쭤린(張作霖)의 발상지였던 이 지역은 국민당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국민당군 184사단이 중공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노발대발했다. 동북 보안 사령장관 두위밍(杜聿明; 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장자 양전닝의 장인)에게 엄명을 내렸다. “반란군들을 인정사정 보지말고 끝까지 추격해서 철저히 소멸시켜라.”

장제스의 직계였던 두위밍의 동북군은 지상군과 공군을 동원해 184사단에 맹공을 퍼부었다. 압록강변까지 쫓겨간 184사단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강을 넘어 북한 땅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활로가 없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장환저우(姜煥舟)는 함경북도 나남에 와있던 강신태를 찾아가 184사단의 압록강 도하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강신태가 김일성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하자 장환저우는 왕이즈(王一知)와 함께 평양으로 김일성을 찾아갔다. 강신태의 보고를 통해 사정을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184사단의 입경을 허락했다. 장환저우와 왕이즈는 김일성과 남다른 사이였다. 동북항일연군 시절 장환저우의 입당 소개인이 김일성이었고, 왕이즈는 소련 88여단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부인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184사단은 북한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했다. 두만강을 건너 다시 동북으로 이동,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부탁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단 한번도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완벽한 통계라곤 할 수 없지만, 1947년 한해만 해도 북한을 경유한 전략물자가 21만톤에 달했다. 48년에는 31만톤에 조금 못미쳤다. 물자만이 아니었다. 1946년 하반기에 약 18개 부대가 북한을 경유해 동북으로 진입했고, 1947년에는 북한을 통해 동북근거지로 이동한 인원이 1만명을 웃돌았다. 상하이에 있던 중공 간부와 군 지휘관들도 남포 항에 상륙해 한숨을 돌린 뒤, 북한이 내준 열차를 타고 랴오둥(遼東)지역에 안착할수 있었다.

동북에 와있던 간부 가족들도 거의가 전쟁 기간 동안 북한 땅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소년공산당을 창당했던 리푸춘(李富春)과, 훗날의 공군 사령관 류야러우(劉亞樓), 중공 초기 지도자 리리싼(李立三), 중국 부녀연맹 주석 차이창(蔡暢)을 비롯해, 천윈의 부인 위러무(于若木)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중공 지도자와 가족들이 한동안 북한에 머물며 신세를 졌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천윈의 장남인 전 인민은행장 천위안(陳元)도 어머니 위러무와 함께 평양에 어린시절의 추억을 남겼다.

1946년 10월 말, 국민당군이 압록강변의 단둥(丹東)을 점령했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2만명 내외의 부상병과 가족들이 단동의 맞은편 신의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들을 냉대하지 않았다. 전투요원과 부상병, 군인 가족들을 민가에 분산시켰다. 중상자들은 병원에서 의료혜택을 받았다. 당시 북한 형편을 감안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은 남만 지구에서 중공이 사용하던 무기의 85%와 2만톤 가량의 전략물자도 북한 경내로 이전시켰다. 북한은 밤만 되면 압록강 연안에 노동력을 동원해 안전한 곳으로 실어날랐다. 단둥과 퉁화(通化)가 수복되자 다시 남만지역으로 옮길 때도 북한은 도움을 줬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할 때는 참여자의 면목이 중요하다. 중공은 홍콩과 해외에 산재해 있던 민주인사와 무당파 인사들의 확보에 팔을 걷어 부쳤다. 대 문호 궈뭐러(郭沫若)와, 루쉰의 부인 쉬광핑(許廣平), 명 서예가이며 반 장제스운동에 앞장섰던 마쉬룬(馬敍倫), 역사학자 젠보짠과 허우와이뤼, 쓰촨의 성인이라 불리던 중국 민주동맹 주석 장란(張瀾)등이 홍콩 지역을 관장하던 환샹(宦鄕)과 중국 초대 유엔 대사로 유엔 총회석상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멋진 연설을 하게되는 차오관화(喬冠華)등의 안내로 평양에 머물다 단둥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국제사회는 냉정하다. 향후 무슨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네룽전이 형제나라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가고, 황커청이나 사오징광이 아예 거론조차 안한 것도 이해가 간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 4월15일치에 8회를 실은 뒤 중단됐던 격주 연재 ‘김명호 교수의 북-중교류 60년’을 이번주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세월호사건과 지방선거 등의 기사 수요에 따른 지면 사정으로 석달 넘게 연재가 지연돼 필자와 독자들께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매주 기획면을 통해 북-중 교류의 비사들을 전하게 됩니다.


기사등록 : 2014-07-14 오후 07:53:17 기사수정 : 2014-07-14 오후 10: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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