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가 1946년 11월 국공내전 발발 직전 난징의 기자 회견장에서 내전의 책임이 국민당 쪽에 있다며 장제스를 비난하고 있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➓ 중공 ‘후방’ 자처한 북한
1945년 8월 중순, 소련군 지휘관과 함께 산하이관(山海關) 작전을 숙의하는 주리츠(가운데 종이를 손에 든 사람)의 모습. |
동북을 잘알던 김일성을 초청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간 그는
북한을 ‘견고한 후방’이라 말하며
“민심을 얻어 힘을 키우라” 조언했다 둘째 아들이름이 ‘평양’인 주리츠는
김일성과 형제처럼 격없이 지냈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이들의 통화는
‘같은나라 같은직책’ 사람들 같았다 지금도 중국의 웬만한 서점에 가면 <주리츠전(朱理治傳)> <주리츠탄신100주년문집> 등 그에 관한 서적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중에서도 주리츠의 이민공사 시절에 관한 부분은 여성 최초의 신중국 외국주재 대사를 역임한 딩쉐쑹(丁雪松)의 회고록과 <회억동북해방전쟁기간동북국주조선판사처(回憶東北解放戰爭期間東北局駐朝鮮辦事處)>가 가장 상세하다. 평양 이민공사 사장 주리츠의 공식 직함은 ‘평양 주재 중공 동북국 연락사무소 수석전권대표’였다. 1907년, 장수(江蘇)성 난퉁(南通)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주리츠는 중공의 원로 당원이었다. 20세 되던 해 3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명문 칭화대학 경제학과 2학년생이던 주리츠는 입당 1개월 만에 장제스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공산당 숙청에 나서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 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쉬하이둥(徐海東)과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류즈단(劉之丹)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특히 저우언라이의 신임이 대단했다. 항일전쟁 전야, 장쉐량이 저우언라이에게 시안에 주둔하던 동북군에 연락관을 파견해 달라고하자 선뜻 주리츠를 연상했을 정도였다. 1936년 12월, 장쉐량의 동북군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항일전쟁과 국공합작을 요구하기까지는 주리츠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주리츠는 행동이 민첩하고 직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주리츠를 예젠잉(葉劍英)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딩쉐쑹의 평이 흥미롭다. “당 중앙과 동북국이 평양에 주리츠를 파견하기로 한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결과였다. 주리츠는 조선의 당과 정부에 있는 인물들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경력이 다채로웠다. 경제가 뭔지를 알고, 당중앙과도 수시로 연락할 통로가 있었다.” 평양에 부임한 주리츠는 북한의 지도층과 자주 어울렸다. 특히 김일성과의 만남이 빈번했다. 몇일에 한번씩은 꼭 만났다. 나이는 주리츠가 5살 더 많았다. <주리츠전>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당시 김일성은 삼십 오,륙세 정도였다. 나이에 비해 노련하고 정치가의 풍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당, 정, 군 건설로 한참 분주해 보였다. 단결을 강조하며, 산재해 있는 역량을 모으기위해 애쓰는 모습이 특이했다. 일찍이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탓에 중국 공산당과 군대, 간부들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주리츠와는 형제처럼 가까웠다. 두사람 사이에 외교적인 예의나 의전 따위는 찾아 볼수도 없었다. 특히 전화로 얘기할 때는 같은 나라의 같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돌려서 말하는 법들도 없었다. 소련군을 매수하기 위해 머리 맞대고 의논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주리츠의 부관도 구술을 남겼다. “우리 대표와 김일성 위원장은 하루에도 몇번씩 통화를 했다. 비서나 부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걸고 받을 때가 많았다. 낙관적인 성격이 비슷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번은 주리츠의 부탁을 받은 김일성이 군수물자 수송을 운수상에게 지시했다. 제 날짜에 이루어지지 않자 전쟁에는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 사람 망신 시키는 놈이라며 운수상을 파면시켰다. 비밀 얘기를 주고 받을 때는 사냥을 나갔다.” 주리츠는 김일성의 가족과도 친했다.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 같았다. 주리츠가 오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주리츠의 부인이 동북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집으로 초청했다. 두 여인이 자매처럼 가까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리츠는 최용건과도 친했다. 하얼빈에서 돼지고기와 고량주가 오면 꼭 최용건과 나눠 먹었다. 최용건의 부인 왕징(王靜)은 중국여인이었다. 특이한 음식을 만들면 주리츠의 사무실까지 뒤뚱거리며 들고오곤했다. 주리츠는 왕징이 만든 요리를 제일 좋아했다. 1947년 9월27일, 주리츠의 두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부인이 난산이라는 말을 듣자 최용건 부부는 온종일 병원 앞을 서성거렸다.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이름을 주핑양(朱平壤)이라고 지어줬다. 포병 사령관 무정도 틈만나면 주리츠의 집을 찾았다. 고향에 온 것 같다며 술 한잔 하면 떠나갈 듯이 중국 노래만 불러댔다. 이 정도면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분하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