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Toyotomi Hideyoshi, 豊臣秀吉]
중세 일본의 무장(武將). 1536/37년, 일본 오와리 구니[尾張國] 나카무라[中村]에서 출생, 1598년 9월 18일 후시미[伏見]에서 사망.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守]라고도 함. 16세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까지 최고위직인 다이코[太閤:1585~98]를 지냈다.
농민(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집을 떠나 지금의 시즈오카 현[靜岡縣]인 도토미 구니[遠江國]로 가 다이묘[大名]의 한 가신(家臣)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일본의 세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아시가루[足輕:보병]가 되었는데 쾌활한 성격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노부나가가 1568년 중부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는 몇몇 주요전투에 참전했다. 1573년 9월 2명의 강력한 다이묘를 패퇴시킴으로써 오미 구니[近江國] 나가하마[長浜]의 영주가 되었고 따라서 하시바 지쿠젠노가미라고 불렸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77년부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산인-산요[山陰山陽:中國地方] 지방의 정벌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빗추 구니[備中國]를 침공했다. 그는 하리마 구니[播磨國]의 히메지 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高松]의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포위공격했다. 1582년 노부나가는 자기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할복자살했는데,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처단함으로써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주요 인물인 아케치 미쓰히데.
오다 씨[織田氏]의 가신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씨의 영주로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2명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1583년 히데요시는 2명의 가신 중 1명을 패퇴시키고 할복자살하게 했으며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킨 뒤 그해 오사카[大阪]에 큰 성을 지었다.
오사카 성.
이어 그는 200년 이상이나 끌어온 내전상태를 종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섰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던 강성한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전투를 벌였으며 승부가 분명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1585년 간파쿠[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덴노(일본 천황)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정적(政敵) 모리 데루토모와 휴전을 하고 일본 서부의 시고쿠[四']와 규슈[九州]를 정벌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을 간혹 받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의 원조 아래 간토[關東]와 오우[奧羽] 지방을 복속시킨 뒤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 연합은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했다.
우선 그는 농부·상인·승려의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가타나가리레이[刀狩令]를 내렸다. 이어 일본 전역에 널려 있는 불필요한 성(城)을 철거시키는 시로와리[城割] 같은 조치를 취했다. 또한 사농공상제(士農工商制)를 도입하여 무사·농민·장인·상인의 계급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신분 차이를 명확하게 했고, 봉건사회의 신분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도시나 마을에 살도록 했다. 한편 겐치 [檢地:토지측량]를 실시해 조세 징수를 고르게 하여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혔으며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검문소를 철폐했다. 또한 광물자원 개발의 장려로 화폐의 주조가 원활해짐으로써 교역이 촉진되었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히데요시는 간파쿠의 지위를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한 간파쿠'를 뜻하는 다이코가 되었다. 이어 조선침략을 준비했는데 최종목표는 중국·필리핀·인도의 정복이었다. 그러나 1592년에 처음 침공한 조선반도의 정복도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일본의 원정군 규모가 조선침략을 완수할 정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파기하고 1597년 제2차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조선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정실(正室)은 후사를 낳지 못했으며 측실이 아들을 하나 두었을 뿐인데 이 아이는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6세에 불과했다. 2년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603년에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세웠다.
센리큐우 (1522 년생, 1591년몰)
히데요시는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혼자 공부하여 시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하며 노[能] 연기도 잘 했고 선사(禪師)인 센 리큐[千利休]에게서 다도(茶道)를 열심히 배워 종종 다도회를 베풀고 솜씨를 자랑했다. 그가 추진해온 전국통일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Tadachika Kuwata 글
평상복 차림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는 교토 근방의 작은 마을인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이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어릴 때 이름은 고자루(小猿)였다. 고자루라는 이름은 그의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친아버지 기노시타(木下)가 지어준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おおまんどころ).
그 후 어머니가 재가하게 되자 고자루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의붓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되었으나, 8살 때 어느 사찰(寺刹)에 맡겨졌다. 그러나 고자루는 사찰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곳의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있지 못하고 사찰에서 나와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15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고자루의 앞에는 자신이 가진 운명의 길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찾아서 여행을 하던 중에 자신이 태어난 지방의 중심지인 세이슈(淸州)를 지나 도우미(遠江)라는 곳에 다다랐다.
고자루는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는 동안,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던 그 지방의 성주(城主)였던 마쓰시타(松下) 일행과 마주쳤다.
그때 마쓰시타는 길가에 서 있던 고자루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마차와 일행을 멈추게 한 후 고자루를 불러 그의 신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나서 마쓰시타는 고자루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시종으로 일하게 했다.
당시 고자루에게 맡겨진 일은 '조리토리'였다. 조리토리란 주인의 짚신을 들고 따라 다니는 일이다.
고자루는 그 일을 하면서 충실함을 보였기 때문에 마쓰시타의 신임을 얻게 되어 보다 나은 직책으로 옮기게 되었다.
두 번째로 그가 맡은 소임은 마쓰시타의 곁에서 직접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그는 그 일에서도 남다른 충실함을 보였으므로 더 큰 신임을 얻어 이후에는 금전과 의복을 내주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자루의 주위에는 동년배나 선배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얻지 못한 그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음모와 모함을 받아 고자루는 도둑 누명을 쓰게 되었다.
결국 고자루는 마쓰시타의 불신을 받게 되었고, 어느 날 그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자루는 얼마 동안 다시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18세가 되던 해, 그는 고향인 오하리(尾張)로 찾아가던 중에 어릴 때 친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두 사람을 생각해 냈다. 한 사람은 본명은 알 수 없지만 별명이 간마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은 고향 사람인 이치와카였다.
고자루는 두 사람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고자루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그 지방의 성주였던 오다(織田) 가문(家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다. 그 곳에서 고자루는 다시 조리토리 일을 시작하였다.
그의 주인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그는 신발을 들고 오다 노부나가를 따라다녔으며, 곧 그는 그의 충실함으로 인해서 주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고자루가 더욱 크게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세이슈(淸州)의 성곽 축대가 태풍으로 무너질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많은 원로들이 2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고자루는 복구계획을 수립하고 공사를 벌여 훌륭하게 마무리함으로써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1561년 오네(네네)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 개명하였고,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 네네(ねね),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
스님이 된 네네(ねね). 출가 후 이름은 고다이인(高台院).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기미(淀殿, よどどの, 챠차).
7세 때 부친이 병사하고 모친이 재가함에 따라 양부(養父) 슬하에서 보냈지만 무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 도토우미쿠노〔遠江久能〕의 성주를 섬기다가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즉, 87년 규슈〔九州〕를 정벌하고,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오우슈〔奧羽州〕를 평정하여 전일본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나고야[名古屋] 성.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하여금 1만 8,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일본의 천황은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히데요시에게 일본의 모든 정권을 장악하여 움직이는 관백(關白)이라는 벼슬을 주고, 도요토미(豊信)라는 성(性)을 하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히데요시는 관백에 직결되는 5봉행(5奉行)이라는 정치기관을 신설하여 중앙집권적인 정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행정과 모든 법률을 개혁하여 일본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기틀을 쌓기 시작했다. 그가 마련한 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가 소농민(小農民)의 자립정책이다. 1582년부터 1593년 사이에 계속 실시된 토지조사에서 농지면적과 수확고, 경작자가 명확하게 기록되었으며 합당한 세금을 부담하는 자가 자유로운 농민으로 인정되었다. 히데요시가 경작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점이 소농민의 자립정책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둘째로 무기 몰수령이다. 백성들의 무기류 소지를 금지하는 조치였다. 이유는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세금을 거두는 일을 어렵게 하고 반대행위를 함으로써 경작 부진을 초래하는 원인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분리되어 정권이 사(士)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역무(役務)의 제공뿐이었다. 이로써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이 활성화되어 정권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상업의 발전과 농업 생산성의 급격한 증가를 보게 되었다.
셋째로는 기독교의 금지령이다. 히데요시가 기독교의 금지를 명하게 된 동기는 그가 규슈 지방을 정벌할 당시에 하카타(博多)에서 자행되던 기독교의 폐해를 목격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폐해는 신사(神社)와 사찰(寺刹)의 파괴, 승려박해, 서민에게 입신강요, 그리고 일본인을 노예로 인도에 수출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국정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일본의 법도를 지키기보다는 기독교의 법을 따르려 하는 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제도의 중요한 점은 외국으로부터 몰려오는 종교를 막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순수한 일본 정신의 유지와 창달을 도모하고 사회의 혼란을 막을 수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외에도 화폐(貨幣)의 통일, 광산(鑛山)의 직영 등을 실시하여 통일정권의 기초를 확고히 했다. 그때부터 일본에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던 전운(戰雲)이 사라지고 평화를 구가(謳歌)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임종 후, 후계자로는 여덟 살 된 친아들이 있었으나 이미 히데요시의 참모들이 늙고 병들어 권부에 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5봉행, 5대로를 불러서 마지막으로 히데요리를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 요도기미(챠차)의 아들.
1598년 아버지가 죽었을 때 히데요리는 불과 6세였기 때문에 사실상 5명의 다이로[大老]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자기가 죽을 경우 뒤에 남은 아들을 위하여 공동 섭정으로 임명해둔 사람들이었다.
오래지 않아 섭정들 사이에 충돌이 생겨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關ヶ原戰鬪]에서 승리해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주요 다이묘[大名]들 전부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수가 여전히 히데요리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로 하여금 히데요시의 근거지이던 오사카 성에 거주하면서 주위의 거대한 봉토를 다스리도록 했으며 자신의 손녀와 결혼시켜 두 가문을 통합했다.
1611년 히데요시를 기억하며 충성을 바치던 원로 무사들 가운데 마지막 사람이 죽자 이에야스는 드디어 히데요리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1614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복원하여 달아놓은 호코 사[方廣寺] 범종에 새겨진 글자를 빌미로 삼고 나섰다. 종에 새겨진 글자 중 '國家安康'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표기하는 데에도 쓰이는 것이었으니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자신을 헐뜯으려 했다고 비난하면서 오사카 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히데요리를 원조해준 다이묘들은 없었지만 그는 도쿠가와가 권력을 다질 때 쫓겨난 로닌[浪人]을 9만 명 이상 끌어모았다.
결국 도쿠가와의 군대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지만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 1615년 초 이에야스는 휴전을 제의했고 히데요리가 이를 받아들여 성 밖으로 둘러서 판 해자를 메꾸고 방책의 외부 방어시설을 부수도록 했다.
몇 달 뒤 이에야스는 무방비상태인 성을 공격했고 절망에 빠진 히데요리는 가족과 함께 자결하고 말았다.
히데요리는 22세에 자결했고 그의 죽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하여금 자기 가문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확립하려는 야심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게 만들었다.
이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가 된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Oda Nobunaga, 織田信長]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 초상화.
후지와라 씨[藤原氏] 출신의 무사. 1534년, 일본 오와리 구니[尾張國]에서 출생, 1582년 6월 21일, 교토[京都]에서 사망.
본명은 기치호시[吉法師], 뒤에는 사부로[三郞]라고 했다.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를 무너뜨리고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통일시킴으로써 오랜 봉건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서 중앙정부를 안정시키고 전국 통일을 이룰 여건들을 조성했다.
아버지는 재산을 많이 모았으며, 무사 출신의 가신들을 둔 정부관리였다. 1549년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영지를 이어받아 친척들과 자신의 구니[國] 내의 주요가문들을 복종시켰다. 1560년경에는 오와리 구니의 모든 영토를 자신의 손 안에 넣음으로써 뛰어난 전략적 재능을 과시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또한 같은 해 인근 지방의 대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대군을 무찌름으로써 일본을 놀라게 했는데, 이로써 그는 일본 통일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전제적인 성격의 노부나가는 바람직한 새 정책들을 재빨리 개발하여 시행했다. 그는 소총부대를 조직한 최초의 다이묘[大名 : 봉건영주]였다. 또한 오와리 평야 중심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의 신흥 상인계급만이 아니라 비옥한 오와리 평야의 농업생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처럼 경제적 토대를 확고히 다짐으로써 그는 교토 주변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며 오랫동안 일본 정권의 중심지인 긴키[近畿] 지방에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1562년에는 이웃 미카와 구니[三河國]의 유능한 봉건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으로 배후지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그는 1567년 작전기지를 북쪽 기후[岐阜]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도와 교토로 진군함으로써 요시아키가 쇼군[將軍]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義昭)
원래 요시아키는 자신의 형이자 전임 쇼군[將軍]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암살당하자 쇼군직에 앉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요시아키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573년 그를 폐위시켰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아시카가 바쿠후가 1597년 요시아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긴 했지만 노부나가의 이 같은 행동은 사실상 아시카가 바쿠후의 종말을 의미했다. 1576년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다지기 위해 노부나가는 수도 근처 비와호[琵琶湖] 주변에 위치한 아즈치[安土]의 거대한 성에 자신의 사령부를 설치했다.
아즈치 성
이 사이 노부나가는 통행세와 동업조합에서 걷는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들 세금은 지금까지 지방 다이묘들의 특권적인 수입원천이었다. 또한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1571년에는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엔랴쿠사[延歷寺]를 초토화했다. 천태종은 8세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래 전통적으로 정치와 종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 그 사이 광신적인 잇코 종[一向宗 : 불교의 한 종파]은 지방 소영주들의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세속적 권한을 강화하고, 요시아키를 지원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여러 지방의 권세 있는 다이묘들과 손잡게 함으로써, 일본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노부나가에 완강히 저항한 잇코잇키[一向一揆 : 잇코의 난]를 일으켰다.
노부나가는 잇코 종과 직접적·간접적으로 10년 이상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580년에 마침내 노부나가가 잇코 종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혼간 사[本願寺]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실의 중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는 많은 장원과 사찰 토지를 빼앗았고 이렇게 확보한 토지를 사무라이와 부농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확고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불교사원들이 전통적으로 행사해오던 영향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이 기반을 강화했다.
교토에 자리를 잡자 그는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보호조치를 확대했으며 수도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에 신학교를 건립하도록 후원했다. 그의 이러한 조치는 유럽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장려하는 것이 불교사찰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신자가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솔직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1582년 봄이 되자 그는 이미 일본 중부를 석권했고 서일본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불만을 품은 한 가신이 일으킨 반란에서 부상을 입었고 자살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일본의 거의 반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다이묘들이 지니고 있던 분권적 구(舊)질서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통일에 이르는 기반을 닦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Tokugawa Ieyasu, 德川家康]
나이 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상
본명은 도쿠가와 다케치요[德川竹千代]. 1543년 1월 31일, 일본 오카자키[岡崎]에서 출생, 1616년 6월 1일, 슨푸[駿府]에서 사망.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 1603~1867]의 창시자.
지금의 나고야[名古屋]에서 동쪽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 무사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방 무사가문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내전 속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유년시절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아버지는 연형합종(連衡合從)의 그물에 빠져들어 끊임없이 전투에 참가해야만 했다. 그가 2세였을 때 동맹관계의 변화로 인해 어머니는 영원히 그의 가문과 결별하게 되었고, 7세 때에는 군사적 상황이 어려워져 어린 이에야스는 슨푸(지금의 시즈오카 시[靜岡市])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강력한 가문인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인질이 되어야 했다.
슨푸에서의 훨씬 안정된 생활 속에서 그는 군사·행정 기술을 익혔고 특히 매사냥을 즐기게 되었다. 1550년대 후반에는 결혼하여 첫아들을 낳았고 이마가와 씨를 위해 군대를 통솔함으로써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슨푸에서 보낸 몇 해 동안 그는 일신상으로는 편안했지만 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1549년 측근의 가신(家臣)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가문이 몰락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초상화.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서부의 강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젊은 도쿠가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가 생존해 있던 친척과 가신들을 수습하여 가문의 영주(領主)가 되었다. 몇 달 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이마가와 씨의 무능한 신임(新任)영주를 오랫동안 잘 달래 슨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 뒤 몇 년 동안 다른 가문들과 싸우는 일이 없게 되자 그는 자기 영지(領地) 내의 반란세력이었던 불교 종파들을 분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자신의 소규모 군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행정관을 임명했으며, 과세·소송·치안 절차를 규정하고 시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슨푸[駿府] 성.
1560년대 후반 이마가와 씨가 몰락하자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 결과 1570년에는 본거지를 작은 연안도시인 하마마쓰[浜松]로 옮기고 이곳을 자신의 영지 내의 상업적·전략적 요지로 개발했다. 그는 유력한 무장인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의존해 계속되는 내전의 역경을 이겨내는 한편 서서히 영토를 확장하여 1580년대 초반에는 강력한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이때 오카자키를 비롯하여 하코네[箱根]의 산간지방까지 펼쳐진 비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영지로 두게 되었다.
하마마쓰[浜松] 성.
1582년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하의 습격을 받고 상처입은 몸으로 자결하자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신속하게 노부나가의 죽음을 설욕한 뒤 노부나가가 이룩했던 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부각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으나 승부는 결정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고 히데요시는 만족하여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1580년대 후반 히데요시가 일본 남서부의 다이묘들에 대해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동안 이에야스는 착실히 자신의 기반을 강화해나갔다. 그는 가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영지의 농업생산성을 높였으며 행정의 신뢰성을 향상시켰다. 1586년 이에야스는 영지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히데요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좀 더 동쪽에 위치한 슨푸, 즉 그가 인질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589년 히데요시는 하코네 산지동쪽에 대규모 영지를 가지고 있던 다이묘 가문인 호조 씨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호조 씨가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대규모 육·해군을 동원하여 해변에 위치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 근거를 둔 호조 씨의 군대를 봉쇄했다. 끈질긴 지구전과 포위전 끝에 호조 씨는 식량부족으로 끝내 항복했다.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히데요시의 권유에 따라 이에야스는 하코네 서쪽의 5개 연안지방을 반납하는 대신 동쪽에 있는 호조 씨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에야스는 어촌인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 가까이에 있던 작은 요새와 농경지에 수천 명의 가신들과 그들의 군사장비 및 식솔들을 신속히 이주시켰는데, 이곳은 교토[京都] 근처에 있던 히데요시의 근거지에서 걸어서 한 달 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1590년대에 이에야스는 서부 일본에 근거를 둔 몇몇 유력 다이묘들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버린 히데요시의 2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에 있는 새 영지로 옮겨가게 된 것을 계기로 삼아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신의 영지가 가능한 한 안전하게 방비되도록 했고 정예군은 영지의 외곽과 주요 접근도로에 배치하고 가장 세력이 약해 위험이 없는 군대를 에도 가까이에 배치했다.
멀리 에도 성이 보인다. 이게 최대한 가까이 볼 수 있는 거리.
한편 에도 부근의 대규모 농경지를 자신이 임명한 관리의 직할하에 두도록 함으로써 에도 성(城)에 사는 주민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이 보급되도록 했으며 균일한 과세를 위해 토지조사를 세밀히 실시했다. 또한 모든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민반란의 가능성을 감소시켰으며 장인(匠人)과 상인들을 에도 성으로 불러모았다. 성을 확장·개축하고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주민들의 원활한 식수보급을 위해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이에야스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군대와 가장 생산성 높고 잘 정비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자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에 가장 강성하고 존경받던 이에야스는 권력투쟁 속에서 동군(東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00년 가을 교토에서 북동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는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패자(覇者)가 된 이에야스는 그 패권을 영속시키기 위한 조치를 신속히 취했다.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행정적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군사적 이득을 굳건히 다졌던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이묘들에 대한 대폭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적대적 다이묘들로부터 영지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다이묘들의 근거지 가까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충성스런 가신들을 위해 중부 일본의 거의 전역을 직할지로 만들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뒤에는 여러 해에 걸쳐 다이묘·궁중세력·승려·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감독기관을 두었다.
당시 실권은 없으나 의례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던 왕실은 그동안 이에야스에게 그의 세력을 반영하는 직책명을 수여해왔는데, 마침내 1603년 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 최강의 다이묘인 이에야스는 덴노의 이름 아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2년 뒤 정식으로 은퇴한 그는 에도를 떠나 옛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때 쇼군의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줌으로써 이 지위가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적 특권임을 확고히 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徳川秀忠)
쇼군 시절이나 은퇴 후에나 그는 외교문제에 있어 전권(專權)을 휘두르기를 좋아했다. 당시 중국의 명(明)조는 붕괴 직전에 있었으므로 해외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로 중국을 상대해왔던 일본은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의 무역 요구와 네덜란드나 스페인 등의 포교(布敎) 요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무역을 병기, 상업적 이득, 그리고 폭넓은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1612년 외교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그는 선교사들을 자신이 힘들여 만들어놓은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위협적 요소로 보기 시작했다. 그 뒤 2년 동안 선교활동을 중지시키고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탄압했으며 후계자들 역시 30년 동안 이에야스의 반(反) 그리스도교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결과 일본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무역도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을 인사이동시키고 수년에 걸친 정치개혁을 통해 입지를 강화시켰으나 다이묘들에 대한 경계를 계속 늦추지 않았다.
1604~14년에는 아들 히데타다로 하여금 다이묘들을 동원해 에도 성을 증축·개축시키는 일을 벌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인원이 수 년 동안 끊임없이 동원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에도 성은 넓은 해자(垓字), 높은 석벽(石壁), 나무로 된 긴 흉벽(胸壁), 큰 문루(門樓), 곡식과 동전이 가득찬 넓은 내화(耐火)창고 등이 그물처럼 엮어져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성이 되었으며 주변 주택에서는 다이묘들이 인질생활을 했다. 이제 에도는 장인·상인·관리·노동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도시·항구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工事)를 통해 이에야스는 더욱 강성해진 반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다이묘들은 훨씬 가난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의 강성한 군사력이 절대적 정치권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의 기반이 굳건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비록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통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사카 성[大阪城]에서 성장한 히데요리는 점차 추종 무사들을 모아들여 도쿠가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14년까지 히데요시를 따랐던 세력들이 대부분 죽자 이에야스는 마지막 정적인 히데요리를 별 위험없이 제거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진영의 오랜 긴장상태가 지속된 뒤 이에야스는 군대를 동원해 산발적이고 특기할 것 없는 싸움을 2차례 치른 끝에 마침내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 등 성의 실력자들을 제거했다. 그는 도쿠가와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영지를 배분한 뒤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이듬해인 1616년 병사했다. 그는 100여 년 동안 무사들이 이루려 했으나 실패한 일, 즉 자신의 가문들을 영원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일본 전역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
C. D. Totman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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