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평생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온 국사학계의 원로다. 한일협정 체결 후 일본에서 온 청구권 자금의 일부로 독립운동사 편찬위가 꾸려졌을 때 초기부터 관여했다. 당시 주요한 구실을 했던 인사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때의 우여곡절을 얘기해줄 수 있는 소중한 증인이다.
조 교수는 무엇보다도 1949년 6월이 통탄스럽다. 반민특위가 와해됐고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제헌의회에서 진보적 성향의 의원들이 쫓겨났다. 거기에 백범 김구 선생까지 암살됐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청산이나 독립운동사 정리 작업이 모두 중단됐다. 조 교수는 그 결과 대학에서 근현대사 강의가 오랜 기간 아예 없었고 그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망국 백년을 맞은 이제는 독립운동사가 완전히 갖춰졌을까? 그는 옛 반공법의 조항이 살아 있는 한 (역사 기술이) 자유롭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70년대에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작업을 하다가 그를 포함한 사학자들이 정보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겪은 일이 있다. 지난해 12월15일 그가 요양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얘기를 들었다. 6년 전에 있었던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민족사를 되찾아가던 고달픈 과정을 회고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 계속 관여
평생 연구매진 국사학계 원로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시골이지만 개화문명은 일찍 받아들인 곳이다. 소학교 중간에 서울로 전학했지만, 방학은 고향에서 보냈다. 시인 조지훈과 국문학을 한 조동일 교수가 같은 마을 출신이다.”
-그 마을(일월면 주실리)이 일제 때 집단적으로 창씨개명을 거부했다고 하던데 탄압을 받지는 않았나?
“문중의 어른들이 협의해서 결의를 했을 거다. 중심인물이야 받았겠지만 일반인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서울 매동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벌을 자주 섰다. 단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장충식이 동기생이다.”
-양정학교를 다니다 덕수상고로 옮겼는데 언제부터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했나?
“한참 뒤의 일이다. 당시는 생활이 어려워 밥을 먹기 위해 신문배달, 남대문시장 사무소의 소사도 했다. 지금 대한적십자사 본부 인근에 있던 민족박물관에서도 잡일을 했다. 그래서 상고는 야간부를 다녔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여기저기 끌려다니진 않았나?
“서울에서 인민군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서 고향에서 숨어 살았다. 국군이 들어오자 반갑게 생각했는데 의용군 갔다는 게 문제가 돼 잘못하면 총살당할 뻔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도의용군으로 들어갔다. 당시 학도의용군은 거의 소모품이었는데 경찰 간부로 있던 집안 어른의 덕을 봤는지 경찰로 전역했다. 나중에 시험을 봐 경사로 승진했는데 내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사표를 내고 대구의 경북대학 사학과에 들어갔다. 나중에 5·16이 나고 나서 학도의용군 근무는 군대경력으로 쳐주지 않는다고 해 다시 입대를 했다가 1년 뒤 인정하는 쪽으로 방침이 바뀌어 제대했다.”
-대학 생활은 평탄했나?
“대학 3학년 때인 1956년 이승만-신익희-조봉암이 맞붙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땐 선거운동이 돈벌이였다. 민주당 쪽에서 도와달라고 연락이 와 갔는데 하루 일당이 괜찮았다. 민주당 학생 대열에 들어가서 선거운동을 했다.”
1949년 반민특위 와해 등
식민청산·역사정립 모두 중단
-민주당이 야당인데 일당을 줄 만한 돈이 있었나?
“야당이 탄압받기는 했어도 선거 후의 탄압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5월5일 해공 신익희가 갑자기 작고하니 민주당 쪽 대열이 흩어졌다. 해공이 숨지지 않았다면 당선했을 텐데. 진보당 쪽에서 오라고 해 잠시 선거운동을 했다. 한번은 영덕군 남정면 경찰주재소 앞에 지프차를 세우고 근처의 식당에 들어갔는데 밥을 먹고 나오니 차가 뒤집어져 있더라. 그거 바로 세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던지…”
-선거 끝난 뒤 탄압이 더 심했다고 했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
“선거 때는 야당 탄압이 중앙당에 집중돼 지방에서는 심했다고 볼 수 없다. 선거가 끝나자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사형시키고 빨갱이 당으로 몰아갔다. 나 같은 경우에는 취직이 안 됐다. 그 시절 대학 졸업생에게 열려 있는 일자리가 교사·기자·은행원 정도였는데 신원 조회가 까다로웠다. 고향의 자유당 국회의원이 입당을 하면 원하는 데로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강원도에서 장학사를 하던 남규옥이란 분이 좋게 봐서 강원도 고성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강릉농고, 춘천여중, 춘천교대로 옮겨 다녔다.”
-춘천교대 시절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춘천교대에 가서는 처음에 선사고고학을 했다. 초기에 쓴 논문이 ‘북한강 유역의 고인돌’, ‘강릉 지방 선사사회 고찰’이다. 소양강댐 건설 때 수몰지구 문화유적 조사위원도 했고. 그러다 69년 일본에서 받은 돈의 일부로 독립운동사 편찬위를 만들 때 편찬위원이던 홍이섭 연대 교수(1914~1974)가 추천을 했다. 홍 교수는 춘천에 있던 주재용 신부(1895~1975 전주교구장·대구교구장 역임, 가톨릭 교회사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이다. 홍 교수는 주 신부의 ‘한국 교회사의 옹위’ 같은 책에 반해 가끔 내려왔는데 두 분이 어울릴 때 나도 이따금 불려갔다. 홍 교수는 편찬위에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며 나를 강력히 천거한 모양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내가 연대 제자인 줄 안다. 춘천교대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상근하라는 것이었지만, 내 사정도 있고 해서 일주일의 절반은 춘천에서 근무하고 절반은 서울에서 하는 것으로 조정됐다. 그래서 독립운동사 연구가 직업 연구가 됐다.”
근현대사 강의하면 좌익 몰려
1987년에야 서울대서 처음 강좌
-편찬위 활동은 해방되고 나서도 한참 늦게 시작한 셈이다. 당시 독립운동사 연구가 거의 없었을 것 같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다.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된 후 국회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일반 국민이나 정치인들의 의식은 독립운동사 쪽으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1949년 6월에 세 가지 사건이 벌어지면서 흐름이 반전됐다.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습격해서 그 사무실을 박살내고 국회의원 중에 좀 진보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을 잡아가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마지막 정적인 백범 김구가 암살됐다. 진보적 학자들은 이것을 6월 반동사건이라고 부르고, 좀 보수적인 사람들은 6월 파동이라고 지칭한다. 이때부터 독립운동 했다면 김구 계열로 몰려서 군대에서는 진급이 안 되고, 사회에서도 출세 길이 막혔다. 학교에서 독립운동사 연구는 그걸로 끝이 났다. 그전에는 꾸준히 책도 나오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결과 대학에서 오랜 기간 근대사·현대사 강의가 아예 없었다. 역사는 한 세대가 지나야 객관화된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런 것은 일본 학자들이 말하던 거다. 그 자체가 현대사의 비극이다. 하여튼 근·현대사 하면 좌익으로 몰렸으니까.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근·현대사 강좌가 생긴 게 87년인데 내가 가서 했다. 그것도 6·10 항쟁 등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다. 강좌를 만들라는 내부의 요구를 대학당국이 더 이상 불온한 움직임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의 학위 논문이 90년에 통과됐는데 그것이 서울대에서 현대사 연구로 나온 박사학위 1호다.”
-편찬위 초창기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 끌고 나갈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기초 조사나 운영은 어떻게 했나?
“자금을 어떻게 운영했는지는 잘 모르고. 아무튼 뭔가 신청하면 필요로 하는 자금은 줬다. 독립운동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게 처음이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책임감, 의욕을 갖고 있었다. 배낭에 5만분의 1 지도, 카메라, 녹음기 등을 넣고 자갈길을 완행버스를 타고 들어가 걸어다니며 증언을 듣고 자료를 찾았다. 교통이 아주 불편해 고생을 했지만 보람도 있고 즐거웠다.”
-시골이라면 주로 어디를 다닌 건가?
“나는 강원도를 많이 갔다. 해마다 주제를 잡아 하나씩 정리해갔다. 처음에는 의병운동을 하다가 3·1운동 등으로 바뀌었다. 70년의 어느날 철원에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증언을 듣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싶더니 문이 탁 열렸다. 총 든 사람들이 들어오는 거야. 주민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했던 모양이다.”
-당시만 해도 30대 중반이었을 텐데 마을 촌로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처음에는 조금 의심하다가 나중에는 신이 나서 막 얘기했다. 요새도 옛날 찾아다니던 마을에 가보면 내가 굉장히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안다. 그때의 조 아무개가 맞느냐고 묻기도 한다.”
보안법에 옛 반공법 남아있는한 ‘독립통사’ 한계
-찾아다닐 때 무슨 근거나 자료 같은 게 있었나?
“단서라는 게 재판 서류나 당시 경찰 보고 정도다. 편찬위 출범 때만 해도 그런 자료가 부산형무소에 있었다. 69년에 부산형무소를 찾아가 한 달 동안 자료 조사를 했다. 그때는 재판 서류도 자유롭게 볼 수가 없었으니까. 대검찰청에서 허락을 받아서 가곤 했다.”
-같이 일하던 분은 누가 있었나?
“의병운동 연구를 하던 김의환은 작고했고 편찬위 역사실장을 하던 이홍근도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강훈(1903~2003, 독립운동으로 12년 투옥) 선생도 작고했고.”
-광복회 회장을 지낸 이강훈 선생의 독립운동 회고록이 70년 중반에 나왔던데.
“내가 강원일보에 연재하도록 주선했다. 신문에 연재할 때는 제목이 독립운동 반세기였다. 무정부주의자인 선생은 4·19 후 일본에서 귀국했다가 5·16 쿠데타 때 체포돼 한동안 감옥에 갇혔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민족문제 하나 매듭
-편찬위 일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던데?
“73년 일이다. 독립군 전투사를 작성하려면 만주 얘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김일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남산에 끌려갔다. 내가 김일성이 좋아서 다룬 게 아니고, 그때 편찬 원칙이 일단은 있는 사실대로 원고를 써서 김일성을 빼느냐 넣느냐의 문제는 원고 작업을 끝내고 나서 회의에서 결정하자는 거였다. 그때 재직하던 춘천교대에서도 파면당할 뻔 했다.”
-안에서 누가 밀고를 한 것인가?
“그랬을 거다.”
-가혹행위도 당했나?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라.”
-여러 분이 끌려갔나?
“홍이섭 선생도 갔고, 이강훈 선생도 불려갔다가 편찬위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복직은 했지만.”
-편찬위 활동이 79년에 마무리될 때 아쉬움은 없었나?
“뭐 연구란 것은 항상 불만이니까. 자료를 더 많이 찾아내야 하고 정리를 해야 하는데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이순자씨 조부 ‘독립공적’
5공때 심사 올라와 반대
-평생 독립운동사를 했는데 미진한 부분은 어떤 것들인가?
“97년 정년퇴임하고 나서 독립운동사만으로는 좀 불만스러운 게 있어서 사학사 연구를 시작했다. 역사는 먼저 사실을 찾아내서 해설을 하고, 그다음에 이론화를 시켜야 한다. 독립운동사도 마찬가지인데 이론화를 해야 될 게 아직 너무 많다. 2002년 한·일 역사 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이제 우리나라 역사학이 일본 역사학과 대등하게 공동연구하고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고 느꼈다. 해방 직후 그럴 수 있었냐고 하면 그때는 불가능했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시점에서도 불가능했다고 봐야지. 한국 학자와 일본 학자가 마주 앉아서 얘기할 수 있는 연구 수준이 못 됐다. 그러다 2002년 역사 공동연구위원회가 구성돼 두 나라 학자들이 오가며 얘기를 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갈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연구 수준이 높아졌고, 연구 인원도 많아졌다. 2005년 한-일 역사문제에 관한 100개 주제를 만들어서 논문집을 냈다. 100개 주제로 논문을 만들 수 있다는 자체가 국내 연구자가 많아졌고, 연구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오랜 진통 끝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자 보수진영 일각에서 당시의 힘든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인격살인을 한다며 크게 반발한 것을 어떻게 보는가?
“그야말로 민족문제 하나를 매듭지은 거다. 49년 6월 반민특위 무력화 파동이 없었다면 그때 끝났어야 했을 민족적 과제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늦었지만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해서 그 과제의 일단을 풀은 것이지. 그걸 가지고 왜 장지연 같은 애국자를 넣었느냐 하고 따지는 것은 맞지 않다. 친일 행위를 했으니까 넣은 거지.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들어갈 이유가 없다. 다만 최남선·이광수·장지연 등 개개인의 인격 전체를 친일파로 판정하는 것처럼 된 것은 아쉽다. ‘친일행위 해설사전’이라고 했더라면 논란을 피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을 오래 했는데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받아서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둔갑시킨 일은 없었나?
“후손이 자기 아버지나 조상이 친일파인데 독립운동가 포상 신청을 하는 것은 친일행위를 몰라서 하는 경우도 있고, 알고도 하는 경우가 있다. 심사에 영향을 미칠 권좌에 있으면서 신청하는 사례도 있는데 유명한 사람이면 드러나고 그렇지 않으면 넘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83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부인 이순자의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심사에 올라왔다. 내가 회의 자리에서, 올리더라도 청와대에서 나온 후에 하라고 했다. 보통 다수결로 결정되는데 내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니 찬반 표결 때 찬성한다고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보훈처 업무가 그 일로 편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북통일 민족 최대과제
강대국 비밀협정 주의를
-이제 좌우를 포괄한 독립운동 통사가 다 마련됐다고 할 수 있나?
“옛 반공법의 조항이 남아 있는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국치 100년을 맞으며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백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무엇이 발전이었고, 무엇이 문제냐를 살펴야 한다. 발전적 측면은 국치 때의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된 것이고 대한민국의 성립은 독립운동의 성과로 봐야 한다. 국치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문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남북분단이다. 따라서 백년을 맞아 민족적으로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는 남북통일이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때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적 발상과 주변 강대국 사이의 비밀협정 가능성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최근 서울에 왔던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이 일본 국왕의 방한 가능성을 얘기했다. 한국인들이 환영을 한다면 방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순서가 바뀐 것이다. 환영을 하게끔 만들 것이 있어야 하는데 솔직한 사죄, 특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해 일본 영토에 넣은 것이 잘못됐다는 점을 분명히해야 한다. 셋째는 식민잔재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 친일파 재산의 환수를 놓고 법적 논란이 일고 있는데 그 재산은 한마디로 장물이다. 범죄행위인 장물 취득을 한 후손들이 재산의 유래를 알았느니 몰랐느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터뷰/김효순 대기자 정리/길윤형 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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