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7] 서성로 -2007/04/26-

思美 2010. 4. 1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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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7] 서성로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곳도 있었나?
풍채 좋은 한옥에 일본식 가옥
과거 증명하는 흔적이 곳곳에
소남 이일우 선생 고택에서도
일제시대 '만석꾼 살림' 짐작
이상화 시인의 백부이자 우현서루를 세운 소남 이일우 선생 생가.
이상화 시인의 백부이자 우현서루를 세운 소남 이일우 선생 생가.
소남 이일우 선생이 세운 우현서루가 있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소남 이일우 선생이 세운 우현서루가 있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서성로의 한 안쪽 골목. 옛 정취가 느껴진다.
서성로의 한 안쪽 골목. 옛 정취가 느껴진다.
요즘은 보기 힘든 술두루미가 이일우 선생 고택 창고에 가득하다.
요즘은 보기 힘든 술두루미가 이일우 선생 고택 창고에 가득하다.
적벽돌을 이용해 외형을 꾸민 상가 건물.
적벽돌을 이용해 외형을 꾸민 상가 건물.
우현서루를 세운 이일우 선생 고택의 우물. 현재 우물물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우현서루를 세운 이일우 선생 고택의 우물. 현재 우물물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구읍성의 서소문터 표지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저분하다.
대구읍성의 서소문터 표지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저분하다.
서성로는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 힘이 있다. 서성로의 작은 골목길에선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과거 인물 이상화, 이장희와 내내 함께 걷는 기분이다. 사성로(四城路) 중 북성로와 함께 축제가 없는 거리지만, 축제의 기분을 항상 느낄 수 있다. 그 묘한 매력 속으로 빠져들어보자.

서성로는 약전골목 끝에 세워진 약령서문에서 서성네거리를 지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까지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거부들이 살던 동네로 대구읍성의 달서문과 서소문, 망경루가 있었다. 경상감영 길 어귀(현 세종사우나 화단)에 달서문 표지석이 있고, 경상감영 감옥 터(현 서문로교회 입구)에 서소문 표지석이 있다.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맞은편에 망경루가 존재했다.

약령서문 인근의 담쟁이 덮인 고려양조장(현 원광한의원 맞은편) 건물을 뒤로 하고, 서성네거리를 가로지르면 '깡통골목'이 나온다. 광복 후 미군부대의 깡통을 재생해 팔면서 상권이 형성됐다. 지금은 보일러상, 철물상, 배관상가가 밀집해 있다. 한때 깡통 수백 개로 건물 모양의 구조물을 짓기도 했다는데 그 흔적은 없다.

웅장한 연회장 느낌의 1930년대 대구지역 최대 문구점인 무영당(현 부산비닐상사)이 서성로 탐사의 출발점이다. 화교 음식점인 복영춘을 지나 서성로다방 간판이 보인다면 일단 멈출 것. 10여m 골목안으로 들어서면 철제대문 너머로 기와집이 여러 채 보인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의 큰아버지이자 민족지사인 소남 이일우 선생의 고택이다. 소남은 곳간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의 엽전을 상속했고, 3천여섬을 수확하는 토지 20여만평에 100채가 넘는 집을 소유했다고 전해진다.

철제대문을 밀면 아담한 담장과 두 개의 나무대문이 손님을 맞는다. 철제대문 입구의 왼쪽 서성1가 46번지에는 소남의 둘째 손자 탁희씨, 정면의 44번지에는 첫째 손자 석희씨가 살았다. 사랑채로 쓰이던 탁희씨의 집은 세를 놓은 상태고, 석희씨 집은 할머니 한 분이 관리하고 있다.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은 곳간과 우물, 연못, 정원, 양조저장고 등이 만석꾼의 살림을 짐작케 한다. 석희씨의 집 행랑채는 '봄은 고양이로다'의 고월 이장희 시인(1900~29)이 음독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서문로교회 마당의 한아름 넘는 수백년된 은행나무 3그루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50여년동안 한자리를 지킨 신우목공소 노부부와 안방을 나눠 쓰는 은행나무도 있다.

북성로와 이어지는 서성로 끝자락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소남 이일우 선생이 1904년 인재양성을 위해 700여평 대지에 세운 학숙 '우현서루(友弦書樓)' 자리이다. '역사적 현자들과 벗을 삼는다'는 뜻처럼 근대 초기 민족지사 양성의 산실로 평가받았다. 1911년 강제로 폐쇄되기 전까지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 박은식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교남학원(현 대륜중·고)의 모체가 됐으며, 보관했던 책의 일부인 '사부총간(四部叢刊)' 등 3천937책은 1952년 이석희씨가 경북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서성1길과 서성2길의 안쪽은 '이 도시에 아직 이런 곳도 있구나'라고 신기해 할 정도로 진한 골목의 맛이 배어있다. 조선인 부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풍채 좋은 한옥이 많고, 시인 이상화 생가 터도 있다. 단아한 자태의 한옥과 일본식 2층 가옥, 세월로 색을 입힌 듯한 중국식 적벽돌 담장은 근대를 증언하는 건물들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건물들이 전하는 이색적인 조화와 무궁무진한 인물들의 사연이 골목에서 읽힌다.

서성로의 골목길에서 한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자. 상화와 고월의 청아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올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이 서성로이다.


후원 (주)드림FI

다음회는 '북성로'입니다

2007-04-26

 

일제땐 사찰 그전엔 감옥 지금은 교회
서문로교회의 특이한 이력
감옥서 사찰,다시 교회로. 중구 서내동 8의1 현 서문로교회 터의 연혁은 특이하다.

이곳은 경상감영 시대에 감옥이었다가 일제시대에는 사찰로 사용되었다. 1930년 지도에 '고야산 편희원(高野山 遍熙院)'으로 표시돼 있어 일본 본토 밀교 진언종의 포교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진언종의 본산인 고야산은 건물 자체에 스프링클러가 내장돼 있는 등 방재 시설이 잘 갖춰진 곳으로 유명하다. 대한불교조계종이 낙산사 화재사건을 계기로 고야산 일대의 주요문화유산 방재시설을 견학하기도 했다.

서문로교회 기록에 '실달사(悉達寺:석가모니 출가전 이름 싯다르타)'로부터 터를 매입한 것으로 나타나, 광복 뒤에는 한국불교 사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51년에 서문로교회가 들어섰다. 교회 신도들은 1976년 현대식 교회 건물이 건립되기까지 20여년간 다다미 마루 등 일본 사찰 건물에서 예배를 보았다.

교회마당에는 감영시대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그런데 교회와 접해 있는 한 한옥집을 보면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기와집 지붕을 뚫고 한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뚝 쏟아있다. 둘레가 한아름은 족히 넘을 듯한 나무는 밑둥을 집안에 숨긴 채 '무탈'하게 생존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없는 별스러운 모습. 이 집 주인은 "나무와 함께 주거해도 큰 불편은 없다"면서 "그러나 나무가 점점 자라 방 면적을 넓게 차지해가고 있어 문제"라고 했다.

꼭 맛보고 가세요
돼지국밥에 전통순대 비빔냉면도 끝내줘요
서성 2길에는 서성로 돼지고기 전문식당들이 있다. '북성로 돼지불고기'의 원조다. 6·25전쟁 이후 형성됐다. 80년대까지 밀려드는 손님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지금은 밀양식당, 이모식당, 8번식당만 남았다. 특히 8번식당은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고향 방문길에 300인분을 주문했다'는 소문으로 유명해졌다. 이모식당은 전통순대 수육이 일품이다. 돼지국밥 한그릇에 4천원.

여름에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음식이 냉면이다. 대동면옥(우리은행 동산동지점 맞은편 골목안)은 50여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 됐다. 비빔냉면이 별미. 담백하게 깊어지는 뒷맛에 새삼 입맛이 당긴다. 간장소스에 찍어 먹는 수육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물냉면(사진)한그릇에 5천500원. 비빔냉면 6천원. 수육(사?은 한접시에 2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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