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4] 사라진 대구읍성을 찾아 -2007/04/05-

思美 2010. 4. 16. 13:11
728x90
반응형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4] 사라진 대구읍성을 찾아
파괴되고 철거되고…매번 일본 때문이었다
복원되지 않고 있는 망경루.
복원되지 않고 있는 망경루.
눈에 띄지 않는 동소문 표지석.
눈에 띄지 않는 동소문 표지석.
망우공원에 있는 영영축성비와 대구부수성부(오른쪽부터)
망우공원에 있는 영영축성비와 대구부수성부(오른쪽부터)
옛 제일교회를 짓는데 사용된 대구읍성 해체 돌.
옛 제일교회를 짓는데 사용된 대구읍성 해체 돌.
방치된 달서문의 표지석.
방치된 달서문의 표지석.
망우공원에 있는 영남 제일관.
망우공원에 있는 영남 제일관.
대구읍성은 사라진 도시다. 아니 현대화됐다. 과거의 도시는 이제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라는 도로명이 대구읍성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거리문화시민연대가 최근 발간한 '대구의 재발견-대구신(新)택리지'에는 대구읍성과 경상감영 복원 지도가 상세히 실려있다. 5년동안 100명이 넘는 조사원이 다리품을 팔아 만든 지도다.

자, 과거 도시로의 여행을 한번 떠나보자. 준비물? 특별히 필요없다.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된다. 대구읍성을 돌아보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없다. 성격 급한 분은 1시간이면 충분하다.

최초의 대구읍성은 토성이었다. 임진왜란 2년 전 왜구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졌지만 불행히도 임란(1592) 때 파괴됐다.

왜구 침략 대비해 만들었던

최초의 대구읍성은

불행히도 임란때 없어져

현재의 경상감영 주변을 감싸던 석성은 1736년 구축됐다.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에 옮겨진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둘레 2.7㎞, 높이 5m, 벽 두께 8m의 축성에 연인원 7만8천584명이 동원됐다. 읍성에 남문 영남제일관(남성로), 서문 달서문(서성로), 동문 진동문(동성로), 북문 공북문(북성로) 4대문을 냈다. 군사목적으로 한차례 중수한 읍성은 1906년 관찰사 서리 박중양에 의해 철거됐다. 그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읍성을 없앤 배후에는 한국 상권을 침탈하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남성로 약전골목①. 남쪽 성벽이 헐리고 약재상들이 옮겨오면서 800m 골목 양쪽에 한약방, 약업사, 한의원, 약찻집 등 350여 상점이 들어섰다. 이곳의 영남제일관(정문)은 편액 그대로 수성구 망우공원에 복원됐다. 화려한 종탑부 창문을 가진 영남지역 최초 교회인 제일교회(1933), 교남YMCA였던 이해영 정형외과의원(1914) 등 근대건축물이 눈에 띈다.

약전골목 끝(약령서문)에서 서성네거리를 지나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네거리까지의 서성로②. 만경관쪽으로 8차로를 가로지르면 깡통골목이다. 광복 후 미군부대의 깡통 등을 재생해 팔면서 자연스레 함석으로 배관, 다트 등을 만드는 상권이 형성됐다. 경상감영공원 길 어귀의 달서문 표지석 맞은편에 일제시대 지역 최대 문구점 무영당(1937, 현 부산비닐상공사)이 있었다. 무영당의 대리석 계단과 장식, 높은 천장은 무도회장을 방불케 한다. 서성로다방 골목안 이일우·이장희 고택은 고즈넉한 운치가 묻어난다.

1㎞ 남짓 되는 50년 전통의 북성로 기계공구상가③. 북쪽에 경부선 철로가 나면서 일본인들이 앞다퉈 토지를 매입하면서 성곽 중 가장 먼저 허물어졌다.

북성로

일제시대 최대의 상권

지금은 낡은 건물만 줄줄이

일제시대 대구 최대의 상권이었다. 지금은 하나같이 낡은 건물이 이 거리의 오늘을 말해준다. 공북문 표지석을 따라 골목에 들면 감영 감옥자리의 천리교 대구교회, 대안 천주교회 등 종교시설이 눈에 띈다.

동쪽으로 지하도를 건너면 동성로로 들어서는 지점이다④. 조선시대 향교가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 교동이다. '없는 게 없다'는 소리를 들은 교동시장은 1990년대 쇠락의 길을 걷다 최근 컴퓨터 상권과 교동주얼리 특구로 활기를 찾고 있다. 양념어묵, 순대, 납작만두가 별미인 먹자골목을 지나 진동문 표지석이 있다. 대구백화점에서 중앙파출소 가는 길의 동소문 표지석이 여정의 종착점이다.

팥죽색의 대구읍성 성벽 돌은 봉산동의 거북바위, 달성 성벽 자락 돌과 같은 퇴적암 계통의 안산암이다. 170여년 읍성을 유지하다가 하나에 1냥에 팔려 흩어진 돌은 도원동같은 저습지 매립 뿐 아니라 근대건축물의 석재로 많이 쓰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2007-04-05

 

"각종 사진에 문헌…대구읍성 정보 내비게이션보다 더 잘 알아요"
김종진 대구 중구청 지적담당

김종진 대구 중구청 지적담당(55·지적 6급)은 사라진 대구읍성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2003년 중구청으로 발령이 난 후 읍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짬나는 대로 읍성에 대한 각종 문헌과 옛날 사진들을 모았고,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문화재위원회 위원들, 학예사들을 만나 모르는 것을 물었다. "지적직으로서 기본적으로 '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읍성도 '땅'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이잖습니까."

지난해 그 더운 여름에는 휴가 사흘을 꼬박 바쳐 읍성 표지석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는 현재의 표지석이 언제 누가 축성했고, 언제 철거됐는지 등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아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대안을 이미지로 만들어 대구시청 공무원들이 볼 수 있는 웹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지적공사 대구중·남구출장소의 협조를 받아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로 읍성의 4대 성문과 2대 소문을 좌표로 찾는 작업을 했다. GPS로 한 지점의 경위도(傾緯度)를 수신하는데는 평균 40분 정도 걸리는데, 정확도를 위해 김 담당은 한 자리에서 평균 1시간, 많을 때는 1시간40분 정도 수신을 받아 평균치를 냈다. 6점에 대해 경도·위도·고도를 받아내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구글어스(Google Earth)에서 옛 읍성 문들의 좌표를 입력했더니 쑥~하면서 정확하게 찾아가더군요. 참 신기하고, 보람도 느꼈죠."

그는 그동안 공부한 것을 모아서 '대구 중구의 발자취'라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중구를 알면 대구의 절반을 아는 것이라고.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것이니까요."

표지석 이렇게 바꿉시다
대구읍성 현 표지석(왼쪽)에는 여기에 읍성 문이 있었다는 내용 외에는 정보가 너무 없다. 김종진씨는 '언제 누가 축성하였고 언제 철거되었으며, 제작자가 누구다'라는 정보를 담자고 제안했다(오른쪽이 그가 제안하는 이미지).

/정혜진기자


50년 전통 군만두에 추어탕까지 "골라먹는 재미도 있어요"
주변 유명먹거리
대구읍성 투어는 주로 성벽이 있던 자리에 형성된 도로를 따라간다. 짧지 않은 거리이기 때문에 답사할 땐 당연히 먹거리 정보도 필수.

동성로와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주변에는 대구의 도심인 만큼 내로라 하는 음식집이 한 둘 아니지만 비교적 역사깊은 맛집을 둘러보자.

대구백화점 맞은편에 정통중국식 만두집 '태산만두'가 있다. 50년 역사에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바삭바삭한 군만두로 유명하다. '찐교스', 고기만두, 탕수만두, 야채만두 등 여러 종류의 만두가 있다.

태산만두(사진)와 같이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분식집 '편의방'은 냉동식품을 사용않고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든다. 손만두, 쫄면, 비빔밥 등의 음식값이 저렴한 편이다.

추어탕의 명소로 꼽히는 '상주식당'은 소문만큼 빼어난 맛을 자랑한다. 미꾸라지 진국에 기름을 말끔하게 빼낸 곱창과 배추우거지를 넣고 끓인 추어탕은 담백하고 은은하게 감치는 맛이 각별하다.

서성로는 대구 명물음식의 하나인 돼지고기 요리로 유명하다. 돼지고기 전문식당으로 인교동 공구골목쪽에 이모식당, 8번식당, 밀양식당이 있다.

북성로는 우동·돼지불고기로 이름난 포장마차가 입맛을 끈다. 주당들의 마지막 코스로 불리고 있으나 구수하고 달콤한 돼지불고기 맛에 세대 구별없이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메뉴는 우동과 연탄불에 석쇠로 구운 돼지불고기 딱 2개뿐이다. 연탄의 유황냄새는 고기 노린내를 제거해주며 숯불에서 구워낸 것보다 맛이 더 깊다고 한다.
/김기홍기자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