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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화교 골목' 으로 한시대 풍미…지금은 명맥만 유지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鐘樓)가 있던 거리에서 비롯되었다는 대구 종로. 종로는 70년대까지 수많은 요정과 화교 상권 등에 힘입어 인파가 북적거리는 활기찬 거리였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 동네이기도 하다. 중부경찰서 앞 네거리에서 약전골목 옛 대남한의원까지 종로의 과거와 현재로 워킹투어를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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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는 기생과 화교의 거리였다. 한 때 30여개의 요정에 500여명의 기생들이 북적댔고, 화교는 1905년부터 이곳에서 상권을 넓혀왔다. 이제 요정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화교 상권도 많이 축소됐다. 사라졌거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요정,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화교 음식점을 찾아가 종로의 옛 전성기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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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인 분위기가 화교이민 부추겼다"
"웬만하면 대만, 미국으로 떠납니다." 이세붕 대구화교협회 상무(71·사진)는 간단하게 밝혔다. 1970년대 화교 사회에 불어닥친 이민 붐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배타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화교 이민을 부추겼다고 한다. 종로에 화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정착한 지 1세기가 넘지만 화교들은 여전히 이방인이다. 지난해 열렸던 '대구 화교 정착 100주년 행사'가 화교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시켜줬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대구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진 못했다. 1970년대 중부경찰서에서 약전골목에 이르는 종로 거리는 화교 가게 천지였다. 포목상, 잡화상, 식료품점, 요릿집, 서점 등이 들어서 '리틀 차이나'로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대구·경북지역 화교들에게 종로는 그야말로 만물상이었다. 중국 물건을 구하려면 종로에 가면 됐다. 2007년 현재 종로의 화교 상점은 다섯 곳도 안 된다. "잘 산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고 이 상무는 털어놓았다. 그는 종로의 화교 상권을 일락천장(一落千丈)으로 표현했다. 한번의 추락으로 천길 바닥에 닿은 게 화교의 현실이라는 푸념이다. 그는 차이나타운 조성 계획에 대해 냉소적이다. "실질적인 정책의 뒷받침과 재정지원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그는 "우선 화교를 내국인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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