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5] 종로 -2007/04/12-

思美 2010. 4. 1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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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5] 종로
'기생·화교 골목' 으로 한시대 풍미…지금은 명맥만 유지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鐘樓)가 있던 거리에서 비롯되었다는 대구 종로. 종로는 70년대까지 수많은 요정과 화교 상권 등에 힘입어 인파가 북적거리는 활기찬 거리였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 동네이기도 하다. 중부경찰서 앞 네거리에서 약전골목 옛 대남한의원까지 종로의 과거와 현재로 워킹투어를 떠나보자.


◇ 60년대까지만 해도 화교 상권

중부경찰서 앞에서 만경관 앞 네거리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대구 화교의 대표적 잡화상점 연성영(連盛永)이 있다. 지금은 작은 슈퍼가 있어 당시의 상권을 그려보기 어렵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포목상, 화교 호떡집 등 상점이 들어서 성업을 이뤘다.

종로는 기생의 거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큼 기생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샘밖골목'을 만날 수 있다. 대구부가 있던 시절 퇴기(현역에서 밀려난 기생)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아미고호텔(옛 금호호텔)에서 만경관 사이 뒷길을 말한다.

만경관 쪽으로 가다 오른편에 있는 한정식 수궁 식당. 이곳은 월북사학자 김석형의 생가이다. 6·25 때 월북한 김석형은 가야가 일본 속국이라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최초로 부정한 학자이다.

만경관 주차장 옆 골목에 위치한 한정식집 춘앵각은 한때 정·재계 인사와 내로라하는 한량들이 줄지어 드나들던 요정. 고풍스러운 한옥 두채의 풍모는 옛 모습 그대로다.


◇ 朴대통령 쿠데타 모의했던 곳

춘앵각에서 큰길로 나오면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의 현장이 하나 있다. 만경관 서편으로 100m 거리에 있는 태남빌딩 1층 태남커피숍. 요리집이었던 이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초로 쿠데타를 모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역사에 5·16이 없었다면?'이란 생각에 잠시 머무르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왼편에 낙동여관이란 간판이 내걸린 비좁은 골목이 보인다. 부서져 가는 벽돌,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과 낙서, 낡은 기와집. 연상 60~70년대 골목길 풍경이다. 광복직후에 지었다는 일본식 작은 2층집 등 골목이 꺾이는 곳마다 근대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개발의 손길을 못 만난 것인지 애써 피했던 것인지 아직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 요정골목 명맥 잇는 '가미'

요정이 즐비했던 골목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듯 안길로 접어들면 요정 '가미'가 보인다. 마음씨 좋게 보이는 사장은 길 가는 나그네에게 물 한잔 권하듯 차 한잔 하고 가라며 팔을 끈다.

경신정보고 쪽으로 가도 머지 않은 시대의 대구 역사를 접할 수 있다. 경신정보고 자리는 일제가 대구에 세운 최초의 초등학교인 관립보통학교와 경북여고의 전신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 상서여상 등 4개 학교가 있던 곳.

화교인의 정착지인 탓에 종로에는 화교인이 지은 근대건축물이 유난히 많이 남아있다. 화교인들의 건축물은 큰 창문과 단순한 선을 살리고 상업과 주거를 병용할 수 있는 양식.


◇ 대구 첫 구세군 교회도 있어

센츄럴관광호텔(옛 종로호텔) 건너편에 대구 최초의 구세군 교회인 구세군 제일교회가 보인다. 대구의 '자선냄비'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화교 학교가 있다. 장개석 총통의 흉상을 지나 오래된 적벽돌 건물이 떡하니 서있다. 대구의 대표적 근대건축물인 화교협회 건물이다. 조선시대 대부호 서병국씨가 1925년에 건립한 이 건물은 내부 목재는 금강산에서 베어오고, 외벽 벽돌은 평양에서 가져온것이라고 한다.

대구 최초의 구세군 교회인 '구세군 제일교회'. 대구의 '자선냄비'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대구 최초의 구세군 교회인 '구세군 제일교회'. 대구의 '자선냄비'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화교 학교의 입구. 입구 문살의 그림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화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화교 학교의 입구. 입구 문살의 그림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화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종로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고 있는 다기점.
종로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고 있는 다기점.
태남빌딩, 박정희 장군이 혁명을 모의했던 요리집 청수원 자리.
태남빌딩, 박정희 장군이 혁명을 모의했던 요리집 청수원 자리.
과거 요정이었던 춘앵각 전경.
과거 요정이었던 춘앵각 전경.
요정의 명맥을 이어가는 '가미'의 종업원 대기실. 컴퓨터 등이 갖추어져 있다.
요정의 명맥을 이어가는 '가미'의 종업원 대기실. 컴퓨터 등이 갖추어져 있다.

2007-04-12

 

 

화교 음식점엔 꼭 들러보세요

종로는 기생과 화교의 거리였다. 한 때 30여개의 요정에 500여명의 기생들이 북적댔고, 화교는 1905년부터 이곳에서 상권을 넓혀왔다. 이제 요정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화교 상권도 많이 축소됐다. 사라졌거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요정,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화교 음식점을 찾아가 종로의 옛 전성기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남은 요정, 한 때의 요정

-가미:유니온상호저축은행 주차장 뒤쪽 골목. 종로에서 유일하게 남은 요정. 술값은 '룸살롱' 정도라고. 생활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서빙한다.

-춘앵각:만경관 주차장 입구 옆. 몇 년 전까지 요정으로 영업하다 지금은 한정식집이 됐다. 집 마당이 단아하다.

-수궁:만경관 뒤쪽. 한 때 요정이었다가 한정식집이 된 곳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을 담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부정한 월북 사학자 김석형의 생가였던 곳이다.

◆화교 음식점

-경미(慶美)반점:센츄럴관광호텔 맞은편. 화교 부부가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마니아들이 '할배짬뽕'이라고 부르는 '삼선특짬뽕'(5천500원·사진)이 푸짐한 해물로 특히 유명하다.

-영생덕(永生德):센츄럴관광호텔 옆. 만두전문점으로 유명.

-복해(福海)반점:동아쇼핑 종로주차장 맞은편.

 

[인터뷰] 이세붕 대구화교協 상무
"배타적인 분위기가 화교이민 부추겼다"
대구 화교의 본거지였던 종로. 하지만 지금 종로에서 '차이나타운'의 색깔을 찾기는 힘들다. 한 때 7천명이 넘었던 대구 화교는 이제 1천여명으로 줄었다. 대구의 화교들은 어디로 갔을까.

"웬만하면 대만, 미국으로 떠납니다." 이세붕 대구화교협회 상무(71·사진)는 간단하게 밝혔다. 1970년대 화교 사회에 불어닥친 이민 붐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배타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화교 이민을 부추겼다고 한다.

종로에 화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정착한 지 1세기가 넘지만 화교들은 여전히 이방인이다. 지난해 열렸던 '대구 화교 정착 100주년 행사'가 화교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시켜줬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대구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진 못했다.

1970년대 중부경찰서에서 약전골목에 이르는 종로 거리는 화교 가게 천지였다. 포목상, 잡화상, 식료품점, 요릿집, 서점 등이 들어서 '리틀 차이나'로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대구·경북지역 화교들에게 종로는 그야말로 만물상이었다. 중국 물건을 구하려면 종로에 가면 됐다.

2007년 현재 종로의 화교 상점은 다섯 곳도 안 된다. "잘 산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고 이 상무는 털어놓았다. 그는 종로의 화교 상권을 일락천장(一落千丈)으로 표현했다. 한번의 추락으로 천길 바닥에 닿은 게 화교의 현실이라는 푸념이다.

그는 차이나타운 조성 계획에 대해 냉소적이다. "실질적인 정책의 뒷받침과 재정지원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그는 "우선 화교를 내국인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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