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8] 북성로 -2007/05/03-

思美 2010. 4. 1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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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8] 북성로
낡은 흑백사진처럼…일제시대 건물 유난히 많아
한때는 최고 번화가…공구골목으로 유명
화가 이중섭이 묵었던 경복여관 터
피란시절 문인들 사랑방 볼 수 있어
순종 행차했던 '어행정' 도 볼거리
대구역 앞의 일제시대 건물.
대구역 앞의 일제시대 건물.
북성로 한 가게의 판매용품.
북성로 한 가게의 판매용품.
1909년 대구를 방문한 순종임금이 지나갔던 어행정.
1909년 대구를 방문한 순종임금이 지나갔던 어행정.
외관이 돋보이는 구 야마구찌 도자기점 건물.
외관이 돋보이는 구 야마구찌 도자기점 건물.
이중섭이 묵었던 경복여관 자리. 현재는 주차장.
이중섭이 묵었던 경복여관 자리. 현재는 주차장.

일제강점기 때 대구 최고의 번화가로 1960년대 중반까지 상업·문화 중심지였던 북성로. 길게 늘어선 공구골목엔 하릴없이 오가는 이들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바삐 움직인다. 거리가 따분하게 다가온다. 회색빛이다.

하지만 건물과 골목마다 역사와 사연이 담겨있고, 의외로 재미난 구석도 많이 있는 골목이 북성로이다. 많은 근대건축물, 현재와 과거가 어우러진 골목 풍경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어! 아직도…" "아! 옛날엔…" 가끔씩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대우빌딩 뒤편에 있는 미원회초밥집 2층 건물. 일제 강점기 때 타마무라서점 자리다. 북향의 벽돌조 2층 건물로 목재 오르내리창과 박공 지붕 등 외관이 독특하다. 이 건물처럼 북성로에서는 북향 건물과 가옥을 많이 볼 수 있다. 북향건물은 죄다 일제시대 건물로 보면 크게 틀림이 없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북향으로 집을 짓는다고 한다.

초밥집 옆 골목길을 들어가면 화가 이중섭이 피란시절 묵으며 창작활동을 한 경복여관 터가 나온다. 현재는 주차장. 이중섭은 이곳에서 '옛 시대의 등' 등 작품 20여 점을 그렸다고 한다. 이중섭은 당시 미공보원(대구 미문화원 전신·현재 한성빌딩)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맥타가트 미공보원 원장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가 스페인의 투우를 닮았다는 말에 발끈하며 "싸움소가 아닌 일 잘하는 한국의 황소"라고 외쳤다 한다. 그 후 경복여관 아궁이에 팔리지 않은 그림을 태웠다는 일화가 있다.

중앙로를 건너 공구골목을 가보자. 널찍한 2차로 도로가 서성로 대구은행지점까지 곧게 뻗어있다. 입구에서 30m쯤 떨어진 곳 오른편에 옥탑방 달린 3층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야마구찌 도자기점으로, 건물 오른쪽 단면이 입체적으로 구성돼 생경하다.

이 일대 건물은 특이하게도 건물과 건물사이에 담이나 틈이 없이 모두 이어져 있다. 일본인들이 유럽에서 배운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몇걸음 더 서쪽으로 옮기다 보면 왼편에 2층, 3층짜리 근대건축물이 나란히 서있다. 재건축, 리모델링 등 개발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도심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턱하니 버티고 서 있다. 위층에는 나름의 장인정신으로 무장된 제화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낙원식당의 2층은 50~60년대 문인들이 즐겨 드나들던 모나미 다방자리이다. 공초 오상순을 비롯한 피란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길 건너편에도 역시 모나미다방과 함께 유명했던 백조다방이 있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쉬이 밟고 올라서기가 두려울 정도로 낡았다.

용지식당 옆 담벼락엔 20여 년 전 색바랜 영화포스터가 너덜 너덜 붙어있다. 뒤로 물러나와 다시 큰 길에 서면 일제강점기 때 지어질 당시 대구 최고층 건물을 자랑했다는 미나까이백화점. 지상 5층·지하 1층의 이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공구점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나까이백화점은 대구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건물이기도 하다.

맞은편 골목길에 일본식 2층 가옥들이 눈에 띈다. 여인숙 골목이다. 경산,삼미,홍콩 등 과거에 흔했던 상호를 쓴 여인숙과 여관이 이어진다. 주인으로 보이는 몇몇 아주머니들은 의자를 내놓고 골목을 지키고 있다. 시민회관 건너편 골목에 들어서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의 미로를 만난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공구골목 가운데쯤엔 높이 3m짜리 철제 공룡 조형물이 서 있다. 뒤편에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난 길은 1909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행차했다고 해서 '어행정'이라 한다. 당시 대구 관찰사는 순종의 대구 행차소식에 모래 12만포를 급히 구해 길을 단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회는 '동성로' 입니다.

2007-05-03

 

"북성로의 생존 비결은 상인들의 질긴 단결력"
이의정 북성상가번영회 회장
"이 골목 한 바퀴 돌면 탱크도 만듭니다." 이의정 북성상가번영회 회장(63·사진)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대구 최대의 산업공구 골목 북성로. 기계, 선박, 차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품을 갖춘 만물상 거리이다.

북성상가번영회는 1988년 만들어졌다. 현재 이 곳 상인 25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북성상가번영회는 상가발전과 거래질서, 주차관리에 신경을 쏟고 있다. 길흉사 참여 등 상인들간의 화합에도 적극적이다.

1993년 북성로에 이주 바람이 몰아쳤다. 대구시 북구 산격동 종합유통단지로의 이전 압력이 가해졌다. 건물이 낡은데다 주차 및 교통 문제로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게 이주 정책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상가가 그대로 남아 북성로의 전통과 명성을 잇고 있다. 환경정비나 단체활동이 강화되면서 한결 질긴 생존력을 유지하게 됐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이 회장은 주차장을 확보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들과 대안 없이 이뤄지는 단속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모두의 문제이기에 서로 협력한다"는 이 회장은 "손님이 방문하거나, 하역작업을 할 경우 서로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악의 불경기로 몸살을 앓는 요즘, 그렇지만 북성상가번영회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은 "북성로 공구골목은 여전히 건재하다"며 '북성산업용품 거리'로 거듭날 의지를 밝혔다.

/이애란기자


꼭 맛보고 가세요
연탄불 돼지고기 '일품'
출출할 땐 우동 한그릇
포장마차가 북성로의 밤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먹는 우동과 돼지불고기는 별미다.
포장마차가 북성로의 밤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먹는 우동과 돼지불고기는 별미다.
북성로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골목 중 하나다. 온갖 종류의 공구들이 거리로까지 삐죽이 나와 있고, 쉴 새 없이 다니는 차량들이 기름 냄새 향긋한(?) 공구 골목의 낮 얼굴이다. 해가 저물면 공구 가게 셔터들은 하나 둘 내려지고 대신 포장마차들이 자리잡는다. 기름 냄새 대신 연탄불에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하고, 공구 대신 돼지불고기와 우동을 파는 포장마차가 차지하는 거리. 그것이 북성로의 밤 얼굴이다. 서민들 술자리의 마지막 코스이거나 새벽녘에 일을 마친 이들이 우동 한 그릇 후루룩 마시고 귀가를 서두르는 장소다.

흔히들 '북성로 돼지갈비'라고 부르는 불고기는 돼지갈비에 붙어있는 조각 살을 연탄불에 구워 내는 것으로, 기름기 없이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석쇠에 돼지고기를 넣고 연탄불에 구으면 돼지고기의 기름이 연탄에 떨어져 불이 확 붙는데 이를 탁탁 털어내고 몇 번이고 뒤집어 굽는 게 맛의 비결이다. 중독된 이들은 연탄에 약간 탄 듯한 고기 맛을 못잊어한다. 우동은 전문 우동집에 비하면 국물이 시원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출출할 때 먹기에 딱 좋을 정도로 평범하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70년대에는 서민들의 생계형 포장마차들이 도로에 가득했으나, 지금은 기업화된 포장마차 소수만이 사유지를 빌려 영업한다. 돼지불고기 소 5천원·대 1만원, 우동 2천원.

/정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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