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12] 덕산동 -2007/05/31-

思美 2010. 4. 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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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12] 덕산동
떡전골목·화방골목·학사주점…
드문드문 그렇게 버텨온 세월만큼 향도 짙게 배었다
주점골목. 거리에 어둠이 내리면 젊은이들과 과거 향수를 느끼려는 중년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주점골목. 거리에 어둠이 내리면 젊은이들과 과거 향수를 느끼려는 중년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염매시장의 대표 얼굴 떡집.
염매시장의 대표 얼굴 떡집.
주점골목에 있는 얼음가게.
주점골목에 있는 얼음가게.
염매시장 모습.
염매시장 모습.
주점골목 입구에서 만난 좁은 외관을 가진 건물.
주점골목 입구에서 만난 좁은 외관을 가진 건물.
문화아파트가 들어선 관덕당 옛터.
문화아파트가 들어선 관덕당 옛터.
화방골목의 아루스화방과 미도화구센터
화방골목의 아루스화방과 미도화구센터

괜스레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온다. '어? 여기에 있었네.' 책상서랍을 정리하다 색 바랜 연애 편지 한 통을 발견한 기분이다. 잊고 살았던 풍경이 한달음에 확 다가온다. '그래, 그때 그랬지.' 알 수 없는 탄성이 새어나온다. 대구시 중구 덕산동에는 추억을 파는 골목들이 존재한다. 염매시장 떡전골목과 화방골목, 학사주점골목. 높이 솟은 고층빌딩과 맞닿은 그 골목에는 '멀고도 가까운 옛날'이 살아 숨쉰다.

염매시장은 1906~1907년 대구읍성 성벽이 헐리면서 형성됐다. 1984년 동아쇼핑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300여개 점포가 성시를 이뤘다. 지금은 조촐하다. 남성로와 동성로3가의 남쪽 200m 구간에 떡과 어패류, 과일, 죽, 채소 등을 취급하는 50여개 점포와 식당이 맥을 잇고 있다. '염가로 판다(廉賣)' '소금을 팔았다(鹽賣)'고 염매시장(덕산동에 위치해 '덕산시장'으로도 불림)으로 불렸다.

지하철 2호선 반월당역 17·18번 출구로 오르면 대구 최대의 떡전골목이 나온다. 하얀 쌀가루의 화려한 변신을 볼 수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다. 눈을 호강시키는 화려한 떡이 발길을 붙잡는다. 60년대 좌판을 깐 노점 형태로 시작돼 동아쇼핑 개점 후 전통떡전으로 발전했다. 도로폭이 좁아 차량통행이 어려워지자 동아쇼핑과 삼성금융플라자 사이의 대로변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염매시장 떡전골목의 20여개 떡집에서 파는 떡종류는 200개가 넘는다.

떡전골목서 영남대로 성밖골목으로 접어들면 주막형 여관 흔적이 있다. 경인여관과 계산여관, 안성여인숙이 지친 나그네의 하룻밤을 붙잡았다. 경인여관은 현재 성송자 할머니(75)가 운영하는 성주상회의 전신이다. 세월에 그을린 듯한 한옥이 이채롭다. 드러난 대들보와 키가 닿을 듯한 천장 아래를 지나다보면 약재 거래를 위해 전국에서 찾아든 객주들의 왁자지껄한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삼성금융플라자 담벼락 옆 막다른 골목에 '곡주사'가 있다. 들고 보니 곡주사다. 원래 상호는 성주식당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김치 한쪽을 안주 삼아 격동기의 울분을 삭이며 막걸리를 들이켜던 곡주사. 판잣집인 듯한 옛 모습이 그대로다. 힘겹게 30여년을 버텨온 세월이 가슴을 '짠'하게 적신다.

화방골목은 중앙파출소에서 덕산빌딩에 이르는 20여m의 골목이다. 일제강점기 청도로 가는 간선도로였다. 1980년대 중반 봉산문화거리가 형성되기 전 화방, 갤러리, 표구사가 촘촘히 박혀 있던 골목이다. 지금은 어사필방, 아루스화방, 미도화구센터, 대구서화사만이 화방골목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화방골목의 풀하우스 맞은편 골목.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이 즐겨찾던 학사주점 골목이다. 골목 초입의 집현전 간판을 시작으로 학사주점, 삼거리주점, 약속, 흥부, 동창, 골목길, 장날, 무심천, 시인의 마을, 행복식당까지 골목 양쪽으로 10여개의 주점과 음식점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한번 발길이 이끄는 대로 들어가 보자. 기본 같지 않은 푸짐한 안주가 눈을 즐겁게 한다. 한껏 마시고 비틀거려도 이해가 되는 편안함은 덤이다. 그리 달라지지 않는 모습이 독특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학사주점 골목은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밀리오레와 경상감영공원 일대에 존재했던 학사주점골목은 70년대 대구백화점 뒷골목에 형성됐고, 80년대 대구백화점 주차장이 생기면서 지금의 봉산골목으로 옮겨졌다. 한때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던 학사주점 골목에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땅거미 짙게 내려앉아도 드문드문 자리가 찬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도심 한복판에서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학사주점 골목. 추억을 잊지 못하는 주객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골목마다 특유의 향기가 콧잔등을 자극하는 덕산동 골목. 시간이 갈수록 그 향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골목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토해낸다.


다음회는 '동산'입니다

 

2007-05-31

"운동권 학생들 감싸안다 엄청 고생했지…그래도 후회는 안해"
곡주사 정옥순 할머니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들어 고생도 적지 않았지만 내 집을 거쳐간 학생들이 모두 잘됐다고 하니 다행스럽고 고맙지."

유신 때 대구지역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암울한 시대를 걱정했던 대폿집 '곡주사'의 주인 정옥순 할머니(74). 중구 덕산동 삼성금융플라자 주차장 옆 막다른 골목 허름한 식당. 청년지사들의 '사랑방'과 '할매'는 그때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지 일흔 고개를 훨씬 넘긴 할머니는 예전 같지 않은 기력때문에 밥 퍼주기도 막걸리 붓기도 힘에 겹다.

할머니는 운동권 학생들을 늘 반기며 재워주고, 숨겨주고, 먹여주고 했기에 당국에서 주시했고 '운동권 연락책'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때문에 할머니가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받은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학생들이 비를 맞고 왔기에 2층에 막걸리 상을 차려주고 재웠는데 새벽 5시에 형사들이 들이닥쳤어. 얼마나 놀랐는지." 당시 할머니는 수사기관에 끌려가 보름동안 고생을 했다면서 '몹쓸놈의 세월'을 되뇌였다.

할머니는 그러면서도 손님들 중 운동권 학생들이 많았기에 자신이 겪었던 고초보다는, 학생들이 훗날 훌륭하게 돼 결코 후회없는 과거였다고 했다.

허나 핏줄의 아픔은 감출 수가 어려운지 주름진 눈가를 잠시 적셨다. "엄마가 이 장사하는 죄로 둘째 아들이 군대에서 많이 두들겨 맞고 무진 고생을 했어."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입대했을 때 부대 여장교가 당시 요시찰 대상이었던 곡주사의 아들이었다는 걸 알고 제보를 했고, 이때문에 아들은 군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입원까지 하게 됐다. 아들이 지금도 그때의 후유증에 시달리는지 할머니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할머니의 인연은 운동권 학생들 뿐 아니다. 배고픔과 정에 굶주린 복지시설 아이들에게 베푼 할머니의 사랑도 깊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고아원생들에게 밥을 주고 차비도 건네며 정을 나눴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아이들이지만 걱정을 했다. "잘 살고 있는지 못살고 있는지…. 지금 잘 있다면 다행인데 날 찾아오지 않는걸 봐서 어려운 것 같기도 해. 마음이 편치가 않아."

70~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가슴으로 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할머니. 술값·밥값 신경 안쓰고 마구 퍼줘 남는 게 별로 없는 장사였지만 가끔씩 찾아오거나 안부 전하는 학생들이 있어 행복하다며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김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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