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운동 집결지…한때는 대구 섬유산업 중심지 직물업 큰손 김성재 포목점 자리, 피란시절엔 전국 문인들 '아지트' 삼성상회 터·이건희 생가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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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을 거꾸로 단 공구가게. 가게주인은 "장사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5년전에 거꾸로 걸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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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골목은 대구·경북 오토바이 상권의 중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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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북로 끝자락에 있는 삼성의 뿌리 '삼성상회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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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문시장의 북쪽으로 난 길이라 해 붙여진 이름인 대구 중구 시장북로. '등겨전골목' '닭전거리' '말전거리' '엿장이 골목' 등 민중들의 삶의 체취를 담은 명칭도 곳곳에 남아있다. 때문에 장꾼들의 외침, 소달구지·말발굽 소리 등 당시 시장통의 번잡한 모습도 아련히 연상된다. 1920년대 초 서문시장이 현재위치로 옮겨갔지만 시장 골목의 옛 지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앞다투는 개발물결에서 비켜나 있는 듯.
3·1만세운동 집결지였던 서문치안센터 앞 강씨소금집 자리에서 골목 끝자락 삼성상회가 있던 지점까지 시장북로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어보자.
서성로 교회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흰벽돌의 3층 건물. 이 곳은 일제시대 대구 직물업계의 큰 손 김성재가 설립한 포목점 자리다. 당시 지역 전체 상인의 거래량보다 이 포목점 물량이 많을 정도로 김성재는 대구직물업계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시작했을 즈음 이 회장은 김성재 사장을 길에서 만나면 "어르신 나오셨습니까" 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을 정도로 재계 거목이었다고.
이후 이곳에서 이윤수 시인이 명금당이란 금은방시계점을 운영하게 되었고, 문인들이 많이 찾게 돼 후일 죽순문학회가 태동한 곳이다. 피란시절엔 청마 유치환 등 전국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했다. 청마가 이 곳에 들렀다가 연인을 만났다는 얘기도 남아있다.
달서천 복개로에 형성된 오토바이 골목. 입구의 공단화공약품점이 바로 3·1만세운동 집결지였던 강씨소금집 자리. 1919년 3월 8일 신명여고·계성고 학생 등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강씨소금집 앞에 모여 달서교를 지나 서문로,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종로, 동성로,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2차로 정도 너비의 일방통행길 시장북로를 따라가면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 없이 다닥 다닥 붙은 일제시대 건축물이 곳곳에 눈에 들어온다. 한때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던 만큼 적벽돌의 대형 실창고 건물들이 번성했던 섬유시대를 전해주고 있다.
섬유업 부흥따라 '실가게 거리' '원사 거리'로 불렸던 시장북로는 한창 상권이 번창하던 60~70년대 세금계산서도 발급하지 않고 영업을 했던 이유로 '블랙마킷'이란 별명도 갖고있다. 이로 인해 이곳 업주들은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면서 타격을 많이 받았다고.
옛 불고기 골목길. 불고기 식당은 자취를 감추고 신발, 가구, 지물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는 1903년도 지도의 지형과 거의 일치, 옛 골목길이 그대로 살아있다.
시장북로 중간쯤 네거리. 본점다방 간판이 보인다. 광복 후 실가게 거리, 신발 골목, 말전거리를 오가던 인부들이 이 다방 주변에 말이나 우마차를 세워두고 차를 마시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고 한다. 네거리에서 서쪽으로 시커먼 기와를 얹은 낡은 집이 줄을 서있다. 옛 고무상회 건물들이다. 문을 닫은 지 적어도 수년 정도 된 듯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한때 건축자재 공급의 본산이었던 경북건축회관 4층 건물. 역시 낡고 헐벗었다. 왼편 대형 창고는 이미 헐려 골조만 설렁 남아있다. 당초 병원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대구지하철 3호선이 지상화로 결정나면서 인근 지역의 변화가 예상돼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이른 시각임에도 신발 박스 상·하차 등으로 부산한 신발도매점을 찾아봤다. 50대 후반의 사장은 이마에 땀을 훔치며 대뜸 "정말 장사가 안돼, 말도 마요"하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장은 "88년부터 94년까지 5~6년정도는 장사가 잘되었는데 94년부터 하향곡선을 그려 먹고살기가 힘들다"면서 혀를 찼다. 그는 한때 수출효자품목이었던 신발이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며 정책적 대안까지 주문했다. "이렇게 가면 생필품이고 뭐고 외국에 다 뺐겨요. 첨단 산업을 육성하지 않고는 나라 경제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며 경기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을 당부했다.
"왱~왱…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굉음이 들리는 오토바이 골목. 가게마다 수십대의 오토바이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나 찾는 이는 보기 드물다. 한때 대구·경북지역의 오토바이 판매·수리 상권의 70%정도를 차지했으나 여느 업종과 다름없이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햇볕이 따가운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하고 점원들의 손길도 느리다.
오토바이 골목에 이어진 공구 골목. 가게마다 각종 공구가 빽빽이 차 있건만 역시 조용하다. 50여년 한자리에서 영업을 했다는 70대의 사장은 "큰일이다. IMF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장사가 못하다"면서 더 이상 경기타령도 귀찮다는 말투다. 그는 "주고객이었던 기업체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3년전부터 매출이 급락, 예전의 절반도 못된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시장북로 끝자락 삼성그룹의 모태 삼성상회 터. 옛 제일모직 터와 함께 삼성기념관 대구 유치 추진의 중심점에 서 있는 곳이다. 야외 박물관을 짓는다고 4층 건물을 허물었지만 공사 진척이 없어 표지석, 동판 등만 남아 썰렁하기 그지없다. 세계적 기업의 발생지로서 면모를 볼 수 없어 못내 아쉽다. 삼성상회 인근에는 이건희 회장의 생가도 자리잡고 있다. 이 회장의 생가는 팔짝지붕의 ㄱ자형 한옥으로 78평이다. 반듯한 구조에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집 관리인은 "집 터가 좋아서인지 이 집에 살고난 뒤 수년 간 앓던 질환이 사라졌다"면서 명당임을 넌지시 비쳤다.
☞현장 인터뷰 시장북로서 공구상 55년 운영 정지태씨
"한때는 공구 팔아 집을 두채나 샀는데…"
- 휴전되고 난 다음에 군 생활 마치고 여기에서 공구 장사를 시작했지. 그 때는 여기에 말구루마(말리어카)가 천지였지. 요즘으로 치면 용달차야. 짐실어주고 돈받고 하는 일 말이야. 공구상은 서너 군데밖에 없었어. 그냥 노점상 형태로 했지. 공구상 하는 우리는 말구루마 배달꾼들 틈에 전을 펴 놓고 장사했어.
- 그 때는 국산 공구가 거의 없었어. 미군부대와 왜정 흘러 나오는 헌 공구 사다가 고쳐서 팔고 그랬지. 그러다가 공구상이 하나둘 늘어나 90년대 초반이 이 골목의 전성기였어. 국산 공구업체들도 많았고 경기도 좋고 모두들 돈 좀 벌었지. 요즘, 장사 안 돼. 옛날에 여기서 공구 같이 하는 사람들 중에 남은 사람은 거의 없어.
- 돈은 좀 번 적도 있었지. 한 때는 집을 두 채나 사놓았으니까. 근데 집안에 일이 많아 돈을 못모았어. 저기 책임테크툴 있잖아(책임테크툴은 전국 최고 수준의 공구 유통업체로 대구 공구골목의 대표 업체다). 그 사장이 해군병 출신인데 초창기에만 해도 내 가게에서 물건 사가지고 장사하고 그랬지. 근데 거기는 저만큼 컸지.
- 삼성상회터? 거긴, 국시공장이었는데 공장 문을 닫고도 건물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지. 하여간 그 건물 헐 때 말이야(글로벌 기업 삼성의 모태인 삼성상회 건물은 1999년 헐렸다), 나무조각 한 개도 버리지 않고 전부 남바(number·번호) 붙여서 적어가더구만. 철저하더구만.
2년 전 공구를 깎다가 날이 튀어 왼쪽 눈을 다친 그는 며칠 전 쇠뭉텅이에 발까지 다쳤다. "장사 안돼도 나와야 조금이라도 벌어먹고 살지." 그는 성한 오른쪽 눈에 돋보기를 대고 공구 카탈로그를 들여다보았다. 다친 발을 감고 있던 깁스는 뗀 채 말이다. "(깁스 때문에) 잘 움직일 수가 없어 그냥 내가 떼버렸어. 오늘 병원에 가면 의사한테 엄청 혼나겠지?"
☞ 꼭 맛보고 가세요
동산동 실골목은 한때 섬유도시 대구의 꿈이 실현되던 곳이다. 촘촘히 들어섰던 실창고와 가게들, 지금은 그 흔적과 갈비골목만이 화려했던 지난날을 짐작케 한다.
△ 진갈비: 대신지하상가 1번 출입구 오른쪽 골목 초입. 48년 전통의 대구 첫 숯불갈비집. 손에 들고 뜯는 갈비의 참맛을 볼 수 있다. 생갈비 1만4천원.
△ 성주숯불갈비: 오토바이골목 협화주차장 옆. 2대에 걸친 모녀의 손맛을 잊지 못하는 골수팬이 많다. 동인동 찜갈비와 확연히 구별되는 별미 갈비찜 1만7천원.
△ 석안정: 서성1길 이건희 생가 맞은편 국수전문점. 들깨 듬뿍 들어간 칼국수와 정갈한 밑반찬이 단골을 만든다. 칼국수·콩국수·육국수 각 4천원.
2007-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