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게 없네" 만물장터 서문시장부터 중세성곽 이미지 풍기는 계성학교 건물 일제시대 건축노동자 집단숙소 흔적까지
"골라, 골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소리. '피식' 웃으며 한번쯤 고개가 돌아간다.
서민들의 질퍽한 삶이 녹아있는 서문시장. 볼거리, 살거리, 먹을거리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대구의 명물시장이다. 공간활용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2천500여 개 점포와 손수레 그리고 흑갈색 '고무다라이'로 무장한 1천여 개 노점. '도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무질서하게만 보이던 점포와 노점들이 나름대로 제 영역을 지키고 있어 철저하게 '계획된 공간연출'이라고 믿어질 정도다. 물론 시장안으로 파고들면 '미로'나 다름없다. 시장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도 자칫 한눈을 팔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큰장, 대신동 시장으로도 불리는 서문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읍성 북문의 작은 장으로 '대구장'이란 이름이 붙었던 서문시장은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확 커졌다. 1920년쯤 천황당 못을 메워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한때 1만여 점포가 있던 서문시장은 현재 주단과 포목을 중심으로 6개 지구 상가를 갖추고 있다. 그릇으로 유명한 육교 앞 동산상가와 의류·주단·한복·이불 등의 도매점포가 밀집한 1지구와 4지구, 청과물·도자기·잡화 등으로 대표되는 5지구, 건어물 상가, 2005년 12월 화재로 대체상가(옛 베네시움과 옛 롯데마트)서 손님을 맞는 2지구로 이뤄졌다. 일상 생활용품은 물론 관혼상제품, 농산물,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는 만물장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서문시장에서 맛집을 따로 찾을 필요는 없다. 간판 없는 '거리식당'의 긴 나무의자에 앉아 먹는 국수나 수제비, 순대, 떡볶이는 그야말로 별미다. 한 그릇 가득 담고도 덤으로 얹어주는 인정은 배고픈 나그네를 감동시킨다.
끝없이 이어질 듯 보이는 서문시장 난전의 좌판이 사라지면 계성중·고 정문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숲이 포근히 감싸는 50계단과 담쟁이가 덮인 핸더슨관 등 '명품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학교 본관인 핸더슨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7호)은 1931년 2층으로 지었다가, 64년 증축한 3층 건물로 중세 성곽의 이미지가 풍긴다. 핸더슨관 왼쪽의 아담스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은 1908년 준공된 영남 최초의 신식 2층 건축물로 수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대구읍성 돌을 기초와 테두리 장식에 사용했다. 모서리 부분의 읍성 돌 하나는 1995년 계명대 성서캠퍼스 본관의 머릿돌로 옮겨갔다. 아담스관 지하실은 대구 3·1운동 당시 태극기 제작이 이뤄진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지붕누수 보수공사가 한창인 맥퍼슨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6호)은 1913년 세워졌다. 서구 건축에 한식 기와를 입힌 혼합 형태로 근대 건축의 수용과정을 보여준다.
대구 중구 달성로 165번지. 계성학교 담벼락을 끼고 걷다보면 일제가 동원한 대구역 건설노동자들의 집단숙소 일부가 남아있다. 장옥(長屋)형태인 목조단층 건물의 흔적을 통해 건설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전해진다.
계성초등 입구를 지나 시작되는 대구명물거리 양말골목. 70년대말 대구상회와 원일상회를 기점으로 형성됐고, 현재 50여 점포가 자리잡고 있다. 별의별 양말을 놀랄 만큼 싼 가격에 판다. 동산네거리~큰장네거리에 이르는 금은방골목과 미싱골목도 서문시장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 상권이지만, 지금은 명맥만 겨우 잇고 있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따뜻한 정(情)을 파는 서문시장부터 계성학교, 양말골목까지 대신동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즐비하다.
2007-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