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13] 동산 -2007/06/07-

思美 2010. 4. 1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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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13] 동산
옛 구암서원에 의료·선교박물관 줄줄이…대구 근대史 체험장
1899년 달성서씨 소유 민둥산 깎고 다져 선교기지로
독립만세 불렀던 3·1운동길 "꼭 몽마르트 언덕 닮았네"
대문·강당·사당만 남은 구암서원엔 역사의 숨결 그대로
퇴락한 '경앙문'·고즈넉한 달성서씨 종가도 볼 수 있어
동산의 옛 구암서원 낙재사당.
동산의 옛 구암서원 낙재사당.
동산병원의 선교사 묘지.
동산병원의 선교사 묘지.
봄이 되면 제일교회 앞에 있는 이팝나무가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룬다.
봄이 되면 제일교회 앞에 있는 이팝나무가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룬다.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교사 챔니스주택.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교사 챔니스주택.
동산의 옛 구암서원에 남아 있는 제수청 건물.
동산의 옛 구암서원에 남아 있는 제수청 건물.
등록문화재 제15호인 동산병원 구본관.
등록문화재 제15호인 동산병원 구본관.

대구의 동산(東山)은 서산(西山)이다. 왜 서쪽 산을 동산이라 부른 걸까.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기 전 대구읍지를 보면 그 답이 있다. 달성토성의 중심지에서 서산은 동쪽에 있었고, 자연스레 동산으로 불렸다. 1899년 미국인 선교사 아담스와 존스가 달성서씨 소유의 민둥산이던 이곳을 사서 학교·병원·신학대학을 세워 선교기지로 삼았다. 100여년이 흐른 현재 동산은 대구의 살아있는 근대사 박물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계산오거리를 지나 엘디스리젠트호텔 직전의 일방통행로. 동산맨션을 지나면 90계단의 오르막길이 나온다. 녹음 사이로 하늘에 맞닿은 언덕이 보인다. 대구의 3·1운동길로, 1919년 3월8일 만세 함성이 메아리쳤던 곳이다. 장꾼 차림의 계성학교 남학생들, 대야에 빨랫감을 담은 신명학교 여학생들은 이 솔밭을 통해 서문시장 큰장터(현재 섬유회관 건너 실골목 입구), 종로를 거쳐 달성군청(현재 대구백화점)까지 행진했다.

언덕의 이국적 풍광은 '대구의 몽마르트'로 손색이 없다. 3·1운동길의 의료박물관(챔니스주택)과 교육역사박물관(블레어주택), 선교박물관(스윗즈주택)은 모두 대구시 유형문화재다. 1907년 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놓고, 붉은 벽돌을 쌓은 지역 첫 서양식 건물이다.

챔니스주택의 마펫 박사(동산병원 7대 병원장)는 1년에 한주 정도를 미국에서 건너와 부인과 묵곤 한다. 선교박물관 앞 대나무 군락은 몇 해 전 화제를 모았다. 선교사들이 집을 지으며 없앤 대나무가 다시 죽순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대구시보호수인 대구 최초 사과나무의 손자나무도 선교박물관 풍경의 일부다. 엉성한 철제대문 너머로 제일교회의 200여년 된 이팝나무(현제명나무)와 노벨상 수상자인 헬렌 켈러가 방문한 신명고, 성명여중도 보인다.

주차장 팻말을 따라 걷다보면 흙길이 이어진다. 결혼 전 야외촬영 장소로 이름난 잔디밭을 끼고 있다. 계성고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핸더슨관과 맥퍼스관의 매혹적인 외관이 눈을 사로잡는다. 입원병동 신관 옆 붉은 벽돌 건물은 1931년 지어진 대구동산병원 구관으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5호'다.

우리은행 동산동지점 주차장 옆 '귀암서원(龜巖書院·이하 구암서원) 입구' 표지석. 막다른 골목에서 왼쪽으로 틀어 걷다보면 다양한 시대의 대문을 진열해 놓은 듯한 풍경이 나온다. 퇴락한 '경앙문' 현판과 암자처럼 고즈넉한 달성서씨 종가가 보이면 동산 여행의 끝이다.

경앙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5칸의 강당이 보인다. 강당 뒤에 숭현사(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 구계(龜溪) 서침·사가정(四佳亭) 서거정·함재(涵齋) 서해·약봉(藥峰) 서성의 불천위를 모심)가 있었으나 10여년 전 연암공원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대나무 바람만 맴돈다.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현재 제일여중 자리)에 구암사(龜巖祠)로 지어졌다. 달성(현재 달성공원)을 국가에 헌납하며 대구 백성의 환곡 이자를 감해주도록 한 구계 서침을 봉안, 1675년 구암서원이라 부르게 된다. 1718년 동산동으로 옮겼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다.

1924년 다시 지어진 구암서원은 1996년 북구 산격1동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 동산동에는 대문, 강당, 낙재사당만이 쓰러질 듯이 남아 있다.

동산은 생활과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문화공간으로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박물관은 단순히 수집과 보존에 머물지 않고, 역사 체험의 장으로 살아 숨쉰다. 동산에선 맨발의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아스팔트의 차가움을 저만치 밀어내는 소중한 공간이다.

어제와 오늘, 내일의 역사까지 담고 있는 에덴동산.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동산에서 들리는 '영혼의 울림'은 멋진 화음을 만들어낸다.

다음회는 '시장북로'입니다

후원 (주)드림FI

 

2007-06-07

 

 

[인터뷰] 달성서씨 25세 종부 이명호 할머니
1년 12번 제사 종부 자리는 운명이라 생각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어, 힘이야 들었지만 어쩌겠어. 남편 생전엔 그 양반이 이것 저것 모두 챙겨줘 그리 고된 줄은 몰랐지."

달성서씨 25세 종부 이명호 할머니(77)는 영화(榮華)보단 짐이 무거울 것 같은 종부 자리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듯 담담하게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동산동 구암서원 옆 종택. 곱디 고운 20세에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 대종가의 맏며느리가 된 할머니는 이곳에서 한평생을 살아왔다.

한달에 쌀 두가마와 보리쌀 두말로 밥을 해대도 모자랄 정도로 유림과 일가의 방문이 이어져 북적거렸던 종가. 이젠 한산하다 못해 쓸쓸함이 묻어난다. 맏며느리가 오래전 사고로 숨지고 장남마저 3년전 갑자기 세상을 떠 식솔이라야 대학 휴학중인 손자(22) 뿐, 단둘이서 넓은 저택을 지키고 있다.

1995년 구암서원이 북구 연암산으로 옮겨가면서 큰 제사는 줄었지만 아직도 1년에 12차례에 달하는 제사는 할머니의 몫. 특히 음력 사월 초파일 치르는 낙재서사원(1550∼1615·대구에서 퇴계의 학맥을 이은 석학) 선생 제사땐 20~30명의 손님을 맞아야 한다. 물론 제수 장만부터 손님 접대는 모두 자신의 책무이다.

"구암서원이 옮겨가기 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거드는 일손이 많았지만 큰 제사땐 제관이 300여명이나 돼 쉬운 일은 아니었지. 또 과거엔 갑자기 들이닥치는 손님이 많고 교통이 불편해 행사에 오면 자고가는 사람이 아주 많았어."

종부로서 고충과 애환도 적진 않았지만 자식들이 잘 자라줘 그 보람에 힘들 줄 모르고 지내왔다는 할머니. 그러나 50대 이른 나이에 장남이 세상을 저버려 한으로 남는다고. 또 장남 대신 가문의 명맥을 이을 손자의 나이가 어려 내심 걱정스러워했다. 봉제사 몇차례도 마다하는 요즘 세태이기에 자신의 자리를 이을 손주며느리에 대해서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했다.
/김기홍기자

[꼭 맛보고 가세요]
△진주집= 한식 전문점으로 조미료를 전혀 안써 깔끔하고 정갈한 맛 자랑. 가격에 비해 양이 푸짐해 직장인들이 즐겨 찾고 단골 손님도 많다.

△동경갈비= 전골·갈비 등 다양한 고기 메뉴. 특히 주머니 걱정 안해도 되는 가격의 돼지갈비 정식은 점심시간에 인기.

△명성식당= 갈치찌개 맛은 어느 식당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 또 손맛이 가득 담긴 밑반찬이 손님들의 입맛을 돋움.

△별미식당= 고소하고 담백한 수육에 옛날 맛이 우러나는 칼국수가 주특기. 특히 김치를 잘게 썰어 넣어 먹는 칼국수 맛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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