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천리교 대구교회-대안성당-대안성결교회 '3色 종교시설이 한곳에' 요정·찻집골목이던 향촌동에선 피란시절 문인들 삶 엿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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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전해진 천리교를 바탕으로 하는 대한천리교 대구교회에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와 중국 원산인 능소화가 피어 있다. 韓·中·日 세 나라가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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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천주교회에 남아 있는 형틀. 천주교인들에게 형벌을 가하던 기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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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아카시요정이었고 후에 대구 최고의 극장식 맥주집 판코리아가 있던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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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대안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은 신자들의 기념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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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동의 수제화 골목. 다양한 종류의 신발을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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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시절 음악애호가들이 즐겨 찾은 르네상스가 있었던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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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공원에서 볼 때 북편 동네가 대안동이다. 군데군데 있는 상점이나 여관, 도로 모두 한적해 슬슬 하릴없이 걷기에 무난하다. 대안동에서 볼만한 장소는 대한천리교 대구교회-대안성당-대안성결교회로 이어지는 길이다. 세 개의 종교 시설이 나란히 있는 점도 특이하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장소로 사용돼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가 있다.
조선시대 대한천리교 대구교회와 대안성당 자리에는 금학루가 있었다 한다. 서거정이 읊은 '대구 10경' 중 제4경 '학루명월(鶴樓明月)'은 금학루에서 바라본 밝은 달을 말한다. 당시엔 풍경이 꽤나 멋졌나 본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경상감영이 있던 시절에는 이곳이 옥터였다. 일제시대 때 이 자리를 허물고 들어선 것은 쌍둥이 사찰이라 불리던 서본원사(西本願寺:니시혼간지)와 동본원사(東本願寺:히가혼간지)였다. 현재의 성당 자리에 동본원사, 대한천리교 교회 자리에 서본원사가 있었다. 일본 불교계의 제일 큰 종파 정토진종에 속하는 사찰이었다.
광복 후 전쟁 시절 두 절은 난민 수용소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나면서 각각 대한천리교 교회와 성당으로 개보수됐다. 누각→옥터→사찰→난민 수용소→교회 혹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숨가빴던 근대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대안성당 초기 현판은 죽농 서동균 선생이 썼는데, 별관 6층 강당에 아직도 전시돼 있다.
그 옆의 대안성결교회는 일제 시대 때도 교회로 이용된 곳이다. 앞의 두 종교시설에 비해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한 길에 제각각 다른 세 개의 종교시설이 공생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교회 길을 따라 쭉 나가면 여관 골목이다. 경상도 사투리로 '고무다라이'라고 부르는 플라스틱 통에 심겨진 나무들, 장미, 선인장 등이 동네 분위기를 묘하게 장식하고 있다.
여관 골목을 벗어나면 바로 향촌동이다. 일제시대 은행, 금융, 우체국, 전화국, 헌병대 등이 몰려 있던 경북도청(현재의 경상감영 공원) 앞이 '낮의 중심지'였다면, 그 옆 동네인 향촌동에는 요정, 여관, 술집, 찻집 등이 밀집해 '밤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제 시대 전에는 감영의 중영(中營)과 대구부가 있던 자리다.
피란 시절엔 구상,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유치환 등 수 많은 시인들이 향촌동 술집과 찻집, 음악감상실을 넘나들며 시를 쓰고 가난한 시절의 낭만을 꽃피웠다. 문단의 중심이자 문화계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때의 문학 중심지, 그리고 유흥 중심지는 그 명성을 잃은지 오래여서 새삼스러워 보였다. 판코리아 성인텍, 대보성인텍 등 옛 간판들이 일부 남아 있고, 일부는 중년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아직 쓰이고 있지만 대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형 화재 사건으로 유명했던 '초원의 집'도 지금은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한 때 시대의 울분을 토했던 시인들의 낭만은 잊힌지 오래다. 대안동만큼이나 한적해 보이는 현재의 향촌동에서 가장 깔끔하게 보이는 곳은 수제화 골목이다. 대안동까지 이어지는 수제화 골목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 20년 동안 이어오는 골목으로, 스무개 남짓한 수제화 가게들이 사이좋게 들어서 있다. 쇼윈도를 통해 각양각색의 구두를 보고 있노라니 이 구식 골목이 보듬었던 격동기 한 때의 영광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다음회는 '태평로'입니다
2007-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