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19] 태평로 -2007/07/26-

思美 2010. 4. 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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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19] 태평로

일제시대 담배창고부터 쌀 공출 전진기지인 米倉건물…

그리고 운송회사·석탄상점으로 쓰였던 건축물까지 격동의 '수탈史'가 허물어질듯 버티고 있다

지하철 대구역 광장에 있는 칠성바위. 칠성동의 지명이 이 바위에서 유래되었다.
지하철 대구역 광장에 있는 칠성바위. 칠성동의 지명이 이 바위에서 유래되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꽃시장인 칠성꽃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장미.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꽃시장인 칠성꽃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장미.
태평로의 한 가게에서 주인이 보루를 비닐에 담고 있다. 보루는 산업용 걸레이다.
태평로의 한 가게에서 주인이 보루를 비닐에 담고 있다. 보루는 산업용 걸레이다.
번개시장은 열차 도착시간에 맞춰 번개처럼 장이 섰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번개시장은 열차 도착시간에 맞춰 번개처럼 장이 섰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분도주유소는 옛 삼국상회 건물로 죽근콘크리트로 지은 3층 건물이다.
분도주유소는 옛 삼국상회 건물로 죽근콘크리트로 지은 3층 건물이다.

태평로(太平路). 곧이 곧대로 풀이하면 '큰 평화의 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태평로라는 이름 속에 숨은 일제의 수탈. 그 아픔의 현장이 평화의 길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태평로는 그야말로 평화롭다. 평화롭다 못해 무미건조하기까지 하다. 태평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매우 삭막하다.

태평로는 대구시 중구 달성네거리에서 동인네거리에 이르는 2.16㎞의 도로를 말한다. 경부선 철길과 평행을 이루며 뻗어있는 폭 30m의 일직선 도로다. 1905년 1월1일 경부선 기관차의 첫 기적이 울린 뒤 대구역 앞으로 '신작로'가 났다. 대구역은 일제 식민지사업의 거점이자 물류·자본·문화의 중심지였다. 철도, 운송, 석유, 석탄, 미곡, 무역 등 수많은 회사가 대구역 앞에 생겨났다. 오늘날의 컨벤션센터나 마찬가지인 경북상공장려관과 문화공간인 공회당까지 세워졌다.

튼튼한 두 다리를 믿고 태평로 탐험에 나섰다. 달성, 태평, 대구역, 교동, 동인네거리와 굴다리를 찬찬히 둘러봤다. 태평로의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되면서 시간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달성네거리에서 태평네거리까지의 큰길은 제쳐놓자. 대구의 여느 도로와 다를 바 없다. 골목으로 접어들면 상황은 달라진다. 허물어질 듯 버티고 있는 집들 속에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중구보건소를 지나 KT& G 대구지점 주차장 뒤편 골목에는 일제 강점기 대구전매지국 담배창고와 직원 관사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태평네거리에서 대구역네거리까지에는 쌀 공출의 전진기지인 미창(米倉)을 비롯해 석탄과 석유 상점, 운송회사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태평지하차도 옆 미군군수창고는 일제 곡물검사소 모습 그대로인데 출입허가가 나지 않아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북성공구골목 초입의 태경키친, 대나무형의 원형기둥과 둥근 창이 눈길을 끄는 분도석유주유소는 각각 운송회사와 석탄 상점이었던 근대건축물이다. 중부경찰서 역전치안센터~대구역 지하상가의 골목에 밀집한 여관, 하숙집은 시대극 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열렸던 대구시민회관. 1929년 지하 1층, 지상 5층의 대구공회당이 이곳에 문을 열었다. 당시 조양회관과 함께 '대구 문화 1번지'로 1935년 최승희의 무용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1975년 10월 시민회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대구역 지하차도에는 헌책방 상권이 형성돼 한때 학생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4곳의 헌책방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대구역네거리에 들어서니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파묻히다보면 발걸음마저 절로 빨라진다. 대구역네거리~교동네거리의 길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집회와 축제, 선거유세장으로 유명했던 대구역 광장은 1946년 10월 항쟁의 중심지였다. 일제가 물러난 뒤 미 군정의 부당한 식량배급과 잦은 공출로 촉발된 시위는 그해 10월1일 경찰의 총탄에 한 노동자가 목숨을 잃으면서 거세졌다. 당시 10월 항쟁은 두달 넘게 이어졌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대구역 인근의 번개시장. 이른 아침 완행열차 도착시각에 맞춰 '반짝' 섰다가 사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 초부터 영천, 왜관, 구미 등지에서 모여든 보따리 상인들이 채소와 과일, 곡물을 좌판에 깔고 소비자와 직거래하던 장이었다. 완행열차가 사라지면서 상설시장으로 뿌리를 내렸다. 시골장터의 맛은 사라졌지만, 푸근한 인심은 여전하다.

지하철 대구역 광장의 칠성바위는 조선 정조 때 경상감사 이태영이 일곱 아들의 복을 빌며 이름을 바위에 하나씩 새긴 고인돌이다. 대구 3대 꽃시장 중 하나인 칠성꽃시장 건너편의 78태평아파트 뒤쪽 지역은 이상화의 시 '대구행진곡'에 나오는 일제시대 별장형 요정이자 저수지공원 도수원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제 식민지 수탈의 전진기지 태평로 여행에서 격동의 역사를 보게 된다. 1920~30년대 성행한 좌익 노동운동, 1930년 마루보시 운송회사의 파업, 1946년 광복 직후의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우리 스스로 기록할 여유가 없었던 역사였다. 치열한 삶에서 생겨난 저항과 항쟁의 정신 역시 대구 정신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2007-07-26

새벽 번개시장 가봤더니…
시끌벅적 옛 모습 사라지고
"요즘은 이름만 번개 장사도 예전만 못해"
"옛날엔 굉장했지. 새벽 첫 기차오면 시장통이 시끌벅적했어. 시골 할머니·아주머니들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와서 이 골목을 꽉 메웠어."

대구역 옆 번개시장. 이젠 이름만 '번개'일뿐 순식간에 섰다 사라지는 시장이 아니다. 여느 상설 전통시장의 모습이다.

1960년대 초 문을 연 번개시장은 완행열차(비둘기호)가 운행될 때까지만 해도 대구역에 첫 기차가 도착하는 오전 6시쯤부터 서너시간만 장이 섰다. 청도·하양·왜관 등 대구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직접 물건을 파는 직거래이기 때문에 값이 싸고 품질이 좋아 장이 서기 무섭게 물건이 동이났다. 때문에 오전 10시쯤이면 시장은 사라졌다. 2000년 모든 기차역에 정차를 하던 비둘기호가 모습을 감춘 뒤부터는 시골서 오던 상인들이 점차 줄어 소규모 상설시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새벽부터 대구 인근이나 경북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시골 할머니들이 하나 둘 시장 입구에 좌판을 편다. 깻잎, 호박, 옥수수, 복숭아, 가지…. 물건을 모두 팔아봐야 3만~4만원은 될까. 큰 벌이가 되지않는 이들 물건을 팔기위해 오후 늦도록 손님을 기다린다. 게다가 점포를 못가진 노점상이기에 자리잡기 다툼을 벌여야 한다. 때론 시장 관리인에게 타박을 받기도 한다. 또 농번기가 되면 농사를 위해 물건을 싸게 넘기고 가야할 때도 많다.

완행열차가 끊기면서 버스나 자가용으로 물건을 싣고 오는 상인들도 늘어났다.

수십년 이곳에서 채소 도매를 했다는 한 할머니는 "나라에서 국민들 잘살게 해줘야지. 왜 완행열차를 없애 시골서 상인들이 못 올라오게 만들어 시장을 어렵게 하나"면서 옛날만 못한 장사를 정부탓으로 돌렸다.

"돈 못 벌어. 새벽부터 오후 2~3시까지 있어봐야 한 2만~3만원 벌면 다행이야. 기차비하고 밥값 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겠나. 자식 신세 안지고 그저 용돈이나 하려고 오는거지."

청도에서 오전 6시10분 기차를 타고 사나흘에 한번씩 채소를 팔러 온다는 할머니. '장사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나 번개시장 직거래 물량은 줄어 상권이 예전만은 못하지만 품질만은 인정을 받고 있다. 시장을 찾는 이들은 하나같이 "시골서 올라온 채소·과일은 싱싱하고 깨끗하다"며 입을 모은다.


후원 (주) 드림FI

다음회는 '중앙로'입니다
/김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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