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처럼 촘촘히 이어진 피란민 수용소…아직도 옛 흔적 고스란히 옛 향교자리엔 소규모 기계공업사가 줄지어 서있고 교동시장 백화부 2층 계단 오르면 생활용품 별천지 아치형 나무문이 이색적인 성공회 대구교회도 볼만
조선시대 달구벌의 정신문화·교육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바로 교동 일대였다.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인 향교(鄕校)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校洞)이라는 이름도 향교 때문에 붙여졌다. 조선시대 대구 교육의 1번지였던 교동은 이제 만물상 거리로 변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숨가쁘게 변화를 거듭한 교동이다.
세월의 흐름속에 달라진 교동을 따라가 봤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려한 물질문화의 중심에서 '오래된 교동'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때때로 만나는 근대문화유산이 보물처럼 다가온다.
대구 향교는 1398년 교동에 세워졌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1599년 지금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된 대구 향교는 1605년 교동으로 다시 옮겨졌다. 뱀과 빈대가 들끓어 성현을 모시기에 불결하다는 게 달성공원에서 교동으로 옮긴 이유였다. 300년이 넘게 교동에 있던 대구 향교는 1932년 일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현재의 중구 남산동에 자리를 잡았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교동의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특히 6·25전쟁을 통해 교동은 거대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6·25전쟁 피란민들이 대구역을 비롯해 인근의 난민수용소에 몰려들었고, 미 군수보급창고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을 기폭제로 삼아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번화한 거리가 됐다.
교동네거리 인근 골목에 들어서니 판금, 주물 등 소규모 기계공업사가 줄을 잇는다. 어디에도 향교의 흔적은 없다. 70여년의 세월이 골목의 기억을 깡그리 지운 듯하다. 대구마크사 좁은 골목에는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대구시 중구 완전동 6의 21)이 있다. 10㎡ 남짓한 20여개 방은 피란민 수용소였다. 벌집처럼 벽을 맞대고 촘촘히 이어지는 모습에서 '어려웠던 시절'이 읽힌다.
신용보증기금 대구지점과 중소기업은행 대구중앙지점 일대는 일제강점기 토지를 착취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출장소 자리였다. 맞은편의 성공회 대구교회는 1929년에 세워졌다. 아치형 나무문과 창문, 작은 잔디정원, 돌로 조각한 고딕양식의 십자가, 아담한 예배공간이 그림동화에나 나옴직한 소담스러움을 연출한다. 2006년 3월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 예고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동아백화점 야외주차장은 '한국문화재 수탈의 거물' 오쿠라 다케노스케(1870~1964)의 저택 일부였다. 1903년 한국에 온 오쿠라는 대구읍성 철거에 따른 땅 투기로 종자돈을 마련, 전기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1922~1952년 금력과 완력을 동원, 닥치는 대로 한국 고미술품을 모았다. 일본이 패망한 뒤 고고, 회화, 조각, 공예, 복식 등 트럭 7대분의 유물 수천 점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1천100여점의 '오쿠라 컬렉션'은 1982년 아들 야스유키가 도쿄박물관에 기증, 이 중 39점이 일본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다.
교동의 중심인 교동시장. 한때 미군부대에서 몰래 빠져나온 PX 물품을 살 수 있어 '양키시장'으로 불렸고, 도깨비 방망이처럼 두드리면 원하는 물건이 쏟아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으로 통했다. 1956년 3월 교동시장으로 정식 허가를 내 보따리무역을 통한 수입품과 군수품을 기반으로 1970~1980년대 호황을 누렸다.
눈과 입이 즐거운 먹자골목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동시장 백화부 2층 계단을 오르면 생활용품의 별천지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경기침체의 그늘도 짙다. 120여 가게 중 70여개만 문을 열었고, 힘들다는 상인들의 아우성이 넘친다. '돌을 놔둬도 팔린다'던 도깨비시장의 명성은 옛말이 됐다.
계단을 내려와 미로처럼 얽힌 1층 좁다란 통로를 빠져나오니 귀금속 세상이다. 교동 귀금속거리의 효시는 1970년 교동시장을 중심으로 생겨난 시계 매장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순금 등을 다루는 작은 공장이 생기면서 1980년대 대구·경북 금은보석 제조·판매의 메카가 됐다. 200m의 골목에 150여개의 귀금속 업체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 교동시장의 끝자락에는 전자골목이 있다. 한때 전자·전기와 관련된 도·소매상이 400여개 밀집했다. 지금은 컴퓨터상가로 통하고 있다.
피란민이 개척한 교동시장을 걷다보면 '세상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사방이 얽혀있는 교동시장의 골목은 눈맛을 즐기기에 더없이 매력적이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교동의 삶이 시대를 넘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먹자골목 가보니…억척 할매들의'좌판호객' 폭염열기보다 더 뜨거워
◇ 귀금속 골목은…관련업체 150여개 밀집 특구지정된후 입지 굳혀
교동시장 먹자골목을 골목 가이드 말을 인용해 표현하면 '길거리 좌판에서 시작해 억척같이 생존해 온 할매들의 땅'이다. 한여름 폭염 속,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 좌판에 앉아 '할매들'은 그 열기에도 여전히 납작만두를 굽고 오징어지짐을 부쳤다. '호객행위'도 여전했다. "여기 앉으소. 시원한 감주 서비스로 드릴게." 전혀 지친 목소리가 아니다. 이 더위에도 지치지 않는 저 삶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 곳 먹자골목은 1960∼70년대 교동이 대구의 중심 상권 역할을 하면서 번영기를 누렸다. 오징어지짐, 빨간오뎅, 납작만두, 그리고 교동소라 등을 파는 '다양한' 교동좌판은 '대구발(發)' 분식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엔 원조보다 원조를 모방한 집에 사람들이 더 많다. 교동시장 빨간오뎅보다 대백의 빨간오뎅이, 교동 납작만두보다 모 분식점의 납작만두집이 더 붐비는 현실이다.
'좌판 메뉴' 외 '식당 메뉴'로는 교동무침회가 대표적이다. 학꽁치, 한치다리, 논고둥, 가오리, 오징어, 미주구리, 전어 등을 채소와 함께 무친 교동무침회는 일반 횟집의 무침회보다 다양하고 푸짐해 꽤나 인기가 있었다. 무침회식당 골목은 한 때 저녁마다 소박한 술꾼들로 붐볐으나 요즘은 예전같지 않다. 서너집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먹자골목 북쪽으로 있는 교동귀금속거리는 겉보기엔 허름해보이지만, 거리 상점들이 파는 귀금속 가격을 따진다면 대구에서 가장 비싼 골목 중 하나일 것이다. 1970년대 시계 매장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이 골목의 역사가 시작됐다. 시계 판매·수리와 중고제품 판매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에 70년 중반부터는 순금, 18K공장들이 하나씩 자리 잡아 80년에 이르러 귀금속 골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귀금속 판매상만 있는 게 아니라 가공업체, 보석감정원 등 귀금속 관련 업체가 무려 150여개나 있다.
패션주얼리특구로 지정됨으로써 귀금속 제품의 제조, 생산 유통단지로서 전국적 입지를 굳혔는데, 주얼리전문타운 건립이 여러가지 이유로 지연되는 등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없어 아쉬움을 준다. 그러나 상인들의 노력과 기대감은 크다. 쇼핑객들이 불편하지 않게 차량통행을 금지시키는 등 이름에 걸맞은 특색있는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다음회는 '남산동 아미산' 입니다
2007-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