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23] 남산1동·봉산동 -2007/08/23-

思美 2010. 4. 16. 14:44
728x90
반응형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23] 남산1동·봉산동
대구혈맥 이어준다는 신비한 돌거북에 일제시대 군인관사가 그때 모습 그대로
도루묵 안주 일품인 46년 된 막걸리집도
발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
제일중에 있는 돌거북.
제일중에 있는 돌거북.
제일중 옥상에 있는 대구 측량의 기준점, 구암원점.
제일중 옥상에 있는 대구 측량의 기준점, 구암원점.
대구민주화기념관 2층에는 대구지역 민주화 관련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민주화기념관 2층에는 대구지역 민주화 관련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향교에 있는 관립 도서관의 효시인 낙육재.
대구향교에 있는 관립 도서관의 효시인 낙육재.
일본 육군이 주둔했던 남산동 지역에는 일본군 관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일본 육군이 주둔했던 남산동 지역에는 일본군 관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대구 향교의 대성전
대구 향교의 대성전
대구초등학교 전경.
대구초등학교 전경.

서거정이 대구10경(十景)의 하나로 읊었던 풍치 좋은 연구산(連龜山) 일대에 형성된 남산1동, 봉산동. 수백년 세월이 지났기에 연구산 비경이야 간 데 없다. 연구산은 중구에서 가장 높은 지대라 산 정상부에 자리잡은 제일중학교 옥상에 올라서면 도심 조망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물론 곳곳에 불쑥 쏟은 고층아파트와 빌딩이 시야를 가리긴 한다. 건들바위네거리서 향교를 거쳐 봉산문화거리까지 지그재그 골목투어에서는 돌거북, 향교, 군소 사찰, 일제관사건물, 피란촌 등 볼거리가 심심찮게 이어진다.


건들바위 뒤편 언덕배기 레스토랑. 굳이 손님이 아니라도 눈길이 절로 갈 만큼 아름답고 근사한 정원을 갖고 있다. 대형 잉어가 노는 연못에 더위를 확 씻어갈 듯한 큰 나무 그늘, 깊은 산에만 자생하는 수령 100년의 은목서도 있다. 레스토랑을 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스친다.

향교 방향으로 몇걸음 옮기면 일제강점기때 모습 그대로의 일본 육군관사가 보인다. 이 일대에는 일제 관사가 아직도 10여채 남아있다. 1936년 대구에 거주한 일본인은 5천950여 가구에 2만6천700여 명으로 대구 인구의 30%에 육박했다고 한다. 10명 중 3명이 식민지 시대 압제 세력이었던 당시가 떠올라 갑자기 섬쩍지근하다.

삼익장한방탕 오른편 골목을 접어들어 건들바위 뒤편 언덕엔 도심서 보기드문 산동네 풍경이 펼쳐진다. 집 앞 비탈진 산기슭에는 야생 복숭아, 호두나무, 오동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서너평 텃밭에는 채소가 자라고 있다. 채송화, 봉선화가 촘촘히 피어 담장 밑에서 고개를 내민다. 오랜 시간 비바람에 시달린 듯한 나무전주는 전선을 힘겹게 두르고 있다. 모처럼 산동네 운치를 맛보고 뒷걸음으로 빠져나온다. 향교로 길을 재촉해본다. 왼편 오르막길에 있는 막창집의 나무지붕과 나무굴뚝도 눈길을 잡는다.

유림문화행사 등 특별한 날이 아니면 조용할 것 같은 향교. 의외로 중·고생들이 삼삼오오 보인다. 방학을 맞아 충효, 예절 등 선조들의 정신을 배우는 인성 교육을 받고 있다. 수백년 거목들이 땡볕을 가려주는 벤치에도 몇몇이 짝을 지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앞뜰에 서있는 공자상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 공자상은 대구시의 자매결연도시인 중국 칭다오시가 옥으로 만들어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후일 향교를 방문한 공자상 제작자의 외모가 이 공자상과 판박이여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 대구향교는 원래 교동에 있었는데 1932년 일제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유생들의 독립운동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해 일본 육군부대와 관사가 밀집해있는 남산동으로 옮겼다. 대구 시가지를 정비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진압하겠다'는 일제의 의도였다. 향교 앞 소방도로는 과거 '청도국도'라 하여 대구서 청도로 가는 교통축이었다.

향교에서 제일중학교 가는 길엔 피란시절 주객들의 명소가 하나 있었다. 술집 주인의 성이 마(馬)씨였고 얼굴이 말상이라고 '말대가리집'이란 별칭을 가졌다고. 조지훈 등 문인과 교수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사랑방. 손님들은 처음에는 '말대가리집'으로 칭하다 주인 마씨가 시집을 안간 처녀인데다 마음씨도 고와 더이상 그 같이 부를 수 없어 '3H(Horse Head Home)클럽'으로 바꿔 불렀다는 우스갯말이 전해진다.

남산동엔 또 하나의 유명한 대폿집이 있다. 향교에서 남문시장 네거리로 가다 왼쪽 골목길안 4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남산동 도루묵'. 간판이 없었는데 최근 이전하면서 주인 할머니 얼굴을 넣은 간판을 내걸었다. 콩나물 무침 기본안주에 놋그릇 막걸리 한 사발 1천원. 가마솥 뚜껑에 지진 도루묵을 곁들이면 일품이라고.

제일중이 터 잡고 있는 연구산 정상. 연구산은 예로부터 정상부가 평평해 기우제나 대중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고 한다. 학교 본관 앞 화단에 대구 혈맥을 이어준다는 돌거북이 있다. 대구에 참사가 터질 때마다 방향 논란에 올랐던 돌거북은 2003년 '달구벌얼을 찾는 모임'이 정남북방향으로 앉히고 몸체의 3분의 2가량을 땅에 묻었다.

제일중 옥상에는 대구 측량의 기준점인 좌표값 '0', 원점 표석이 있다.

반월당 못미쳐 대구민주화기념관. 구 신민당 당사로 선거철 대구 야당 정치인들의'사랑채'였다. 적벽돌의 2층 건물에 담쟁이가 지붕까지 손을 뻗치고 있어 고풍스럽다.

 

2007-08-23

◇ 봉산문화거리 가보니…
아파트가 골목 한가운데'점령'
'문화거리'란 이름이 민망하네
대구학원~봉산오거리까지 600여m의 거리에 전주마다 플래카드가 넘쳐났다. 뮤지컬 공연, 누구의 개인전, 도예전, 문화 강좌 신청까지 플래카드 내용만 보면 문화거리가 실감났다. 그러나 거리는 한산하다. 화랑 10여개를 포함해 고서적상, 고미술상, 표구사, 화방 등 40여개의 문화 관련 업소들이 몰려 있는 대구의 유일한 문화거리(1992년 중구청이 지정)치고는 그 명성이 빛바랜다. 게다가 문화거리 한 가운데 아파트라니!

"문화도시 대구를 만든다고 하면서 대구시도 시의회도 유일한 문화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92년 이곳에 와 봉산문화협회를 이끌고 있는 이상래 회장(예송갤러리관장)의 탄식어린 말이다.

지금의 위치에 문화 관련 업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다. 그 동안 덕산동 및 동아양봉원 일대에 밀집해 있던 표구사, 화방 등이 임대료가 저렴하고 시내에서 가까운 이 곳에 하나둘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이들 업소를 따라 화랑들도 옮겨오면서 문화거리로 지정됐다. 지정 당시에만 해도 아스팔트도 안 깔렸고, 하수도도 없었단다. 기반 시설을 하나 둘 늘리고 2001년 중구청소년의 집, 2004년 봉산문화회관이 들어서면서 외형상으로는 번듯한 문화거리가 됐다.

내용적으로 보면 '문화거리'라는 이름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거는 것은 이 거리를 대구의 명물 거리로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리에 입주한 30여개의 문화 업소 사장들로 구성된 봉산문화협회는 봄(4월)에는 도예전, 가을(10월)에는 미술제를 연다. 올해는 처음으로 조각아트페어(7월)를 열기도 했다. 지난 6월에는 봉산문화거리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대구시에 건의하기도 했고, 다음 달에는 대구시의회에서 같은 주제로 토론회도 갖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아파트 짓기 전에는 반대도 많이 했는데 돈없는 대구시로서는 공영개발밖에 선택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이 거리에 문화 업소가 더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술집, 미장원 등 아파트 주민들 대상으로 한 근린상가가 이 거리를 차지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혜진기자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