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25] 공평동-삼덕동1·2가 -2007/09/06-

思美 2010. 4. 1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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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25] 공평동-삼덕동1·2가
야시골목·늑대골목·로데오거리…24시간 젊은 열기 '서울 홍대거리 뺨치네'

# 공평동
- 일제 고등법원 '대구복심법원' 있던 곳
- 2·28기념중앙공원은 원래 중앙초등 터

# 삼덕동1·2가
- 낮엔 쇼핑족·밤엔 클럽족으로 북적
- 일본인 다니던 관음사도 눈길 끌어

'숙제일까, 축제일까.' 때때로 삶은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늘 같은 삶이란 없다. 삶이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축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미로처럼 얽힌 '삶의 골목'에서 출구를 찾기란 쉽지않다. 출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즈음이면 머리가 아프다.

대구시 중구 공평동(公平洞)과 삼덕동(三德洞) 골목은 묘하다. 화려한 네온사인 속에 펼쳐진 이 거리는 '축제의 삶'을 권한다. 야시골목, 늑대골목, 로데오거리, 카페거리의 소란스러움이 숙제 같은 삶을 잊으라고 강요한다. '삶을 즐겨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진다.

공평동과 삼덕동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대구읍성 동쪽 외곽지역으로, 주로 논밭이었다. 이 논밭이 지금은 대구에서 가장 젊음이 넘치는 거리로 변했다.

1910년대 신작로가 나면서 법원, 형무소, 세무감독국 등 일제의 주요 행정기관이 모여들었다. 도청·우체국·검찰청·전매청 관사와 거상(巨商)의 저택도 들어섰다. 이때문에 한때 대구의 부촌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강점기 고등법원격인 대구복심법원이 있던 공평동. 법 앞에 평등하고 공평한 일 처리에 대한 바람이 담긴 동네이름이다. 법원 건물은 1975년 시립도서관, 86년 대구백화점 별관으로 사용되다 99년 철거되면서 공평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2·28기념중앙공원은 100여년 역사의 중앙초등학교 터. 개교 때 심은 등나무 2그루가 지금도 남아있다. 원래 4그루였는데 2그루는 수성구 만촌동에 새로 지은 학교로 옮겨졌다.

삼덕동은 천덕(天德), 지덕(地德), 인덕(人德)을 뜻한다. 옛 동인호텔과 갤러리존(옛 데레사소비센터)이 있는 삼덕동1가, 음악카페가 즐비한 삼덕동2가, 신천대로변에 인접한 삼덕동3가로 나눠진다.

통신골목 옛 고려양봉원에서 갤러리존을 거쳐 금융결제원 대구경북지역본부에 이르는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옷가게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단박에 사내를 호리는 구미호로 변신한다는 패션 아지트 '야시골목'이다. 1980년대 후반에 형성된 야시골목은 로데오거리 입구까지 확장됐다. 통신골목 동아양봉원에서 야시골목으로 접어드는 100여m의 거리는 멋쟁이 남성들의 '늑대골목'으로 불려 이채롭다. 여우와 늑대들이 붐비는 골목이다.

로데오거리는 서울의 홍익대 부근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복합유흥지역이다. 낮엔 쇼핑족, 밤엔 클럽문화를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야시골목과 조금 다른 캐주얼, 힙합, 히피 등의 패션 콘셉트가 눈길을 끈다. 마구 그린 벽면의 낙서가 범상치 않은 골목이다.

대구 중부소방서 삼덕119안전센터에서 공평로를 건너면 포장마차와 갤러리가 혼재하는 삼덕동2가 음악카페 거리가 나온다. 1990년대 후반 중고 LP 음반가게와 구제 옷가게, 중고책방, 선술집 등이 옛 대구은행 삼덕2가지점에서 경북대병원에 이르는 150m 남짓한 골목에 늘어서 있다. 별난 분위기의 술집과 카페, 클럽이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인생은 짧다. 그러나 술잔을 비울 시간은 많다'는 한 포장마차 간판이 이 골목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음악카페인 최마차, 텐트바 하자하자, 삼덕동 133, 아름다운 술 이야기, 포장마차 칠천만, ACID, 전천후 문화공간 북카페 '소설', 전통찻집 연암과 갤러리 심자한 등 수많은 실험이 이뤄지는 거리다.

관음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다니던 사찰 건물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916년쯤 일본인 승려에 의해 창건됐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돼 있다.

관음사 맞은편 삼덕동2가 카페거리 남쪽 일대는 일제강점기 대구형무소 자리였다. 대구형무소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광야' '청포도'를 지은 시인(詩人) 이육사가 수감된 곳. 지금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날마다 젊은이들의 축제가 열리는 공평동과 삼덕동1·2가. 삶은 즐기는 자의 몫임을 웅변하는 거리다.

 

2007-09-06


[인터뷰] 공평약국 44년째 운영 윤덕자 약사
"의약분업이후 단골개념 사라져
예전엔 약국이 동네사랑방 역할"
"예전에는 약사와 손님의 관계라기보단 다정한 이웃이었어요. 서로 고민도 나누고 참 따뜻했죠."

공평동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공평약국을 44년째 운영하고 있는 윤덕자 약사(75).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고운 얼굴에 미소가 단아하다.

"사람의 일은 모두 인연이 짓는 것 아니겠어요"

한평생 한자리서 약국을 운영해온 감회를 묻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삶의 관조가 느껴진다.

윤 약사는 대학졸업 후 2년여 교편을 잡았다가 결혼 뒤 약대에 편입, 만학으로 졸업하고 63년 약국을 열었다. '모두가 평등하다'란 의미의 동이름이 마음에 들어 약국이름도 고민없이 동명에서 땄다.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는 약사로서 공평하지 못해 상처받는 이웃들이 없기를 바랐다.

그는 조용하던 주택가 시절부터 밤낮없이 북적이는 대구 중심가로 변한 공평동 역사를 지켜보았다. 공평약국은 개업 당시 일대에서 유일했던 2층 타일 건물. 주변이 모두 단층 한옥이나 상가였고, 심지어 대구백화점 건물도 당시 1층 가구점이었다.

약을 지어간 손님이 감사의 표시로 빨간 사과 하나를 품에 소중하게 넣어와 전해주던 시절도 있었다. "너무 정감 넘치고 찡해요."

또 손님과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자녀교육 문제, 부부·고부갈등 등 인생상담을 하며 '마음 치료사'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의약분업 후부턴 단골개념이 없어져 '약 지어가면 끝'이 되었다고 했다. 20여년 전까진 약국 맞은편 한옥 담장을 넘어온 감나무를 보면서 계절이 오고감을 알 수 있었다고. 감나무 잎이 돋아나면 4월, 꽃이 피면 5월….

그는 풋풋하게 정을 나눴던 과거를 떠올리다 나날이 변해가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언행 잘못을 꼬집으면 귀담아 듣지않고 때론 거부감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며 "부모같은 심정으로 충고를 해도 잘 안돼 걱정이다"면서 씁쓸해했다.
/김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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