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갤러리·소극장·도서관·카페…한적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
갈바람이 마음을 일렁인다. 목적지가 없어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가족이나 연인과 나들이 하기에 딱 좋은 계절. 멀리 떠나기 여의치 않고 복잡한 시내 중심가 인파와의 부대낌도 싫다면 대봉동으로 발걸음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두어시간 한가롭게 거닐면 이것저것 볼거리가 촘촘히 반긴다.
대봉동은 대로에도 차량이 붐비지 않아 조용하고 여유롭다. 특색있는 카페와 상점이 골목길에 이어져 있고 갤러리와 도서관, 소극장 등 문화공간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또 신천을 끼고 있어 강변 산책의 즐거움도 준다. 대봉동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1990년대 모던 포크의 대명사 김광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전엔 논과 밭의 벌판이었는데 식민지 통치기구와 근대학교,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18년 달성군의 대명동과 봉덕동이 대구부에 편입되면서 일부지역을 합쳐 대봉정(大鳳町)이라 불렀다가, 광복후 대봉동으로 이름이 변경됐다.
달구벌대로변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 건물. 꼬리문 차량들의 경적음이 짜증나게 하나 짙푸른 담쟁이가 휘감은 적벽돌의 건물에 일순 편안함을 얻는다. 문화재 지정 건물인 덕분에 수십년 그대로 모습, 변함없는 운치를 보여준다.
삼덕네거리서 대백프라자 가는 길은 패션·골프·명품가구점과 고급 레스토랑 등이 줄지어 들어서있다. 큰길은 웨딩숍, 대백프라자 인근은 부티크패션거리다. "고급이 좋긴 좋네." 실없는 독백을 한다. 가게마다 규모나 인테리어가 만만찮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잖은 이들은 쉬이 매장문을 노크하기 부담스러울 것같다. 서울 청담동의 '명품거리'를 떠올려 혹자는'대구의 허영'을 상징하는 거리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청운맨션에서 강변도로로 가다 왼쪽 6층건물 P& B아트센터. 상호 '아트'에 걸맞게 외형부터 근사하다. 연극 전용 소극장과 패션살롱, 화랑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이 부근의 아름다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강변 야경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6층 카페는 '분위기 잡기 좋은 집'으로 일컫는 이들도 있다.
웨딩숍거리 중간쯤 골목안, 신라갤러리를 끼고 있는 큰 은행나무가 발걸음을 잡는다. 주택을 허물고 은행나무를 잘 살려 갤러리를 지었다고. 나무와 갤러리, 한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져 삭막한 도심 거리를 부드럽게 채색해준다.
대봉도서관 가기 앞서 세원출판유통 주차장도 이채롭다. '독서는 희망, 책을 열면 그 뜻이 저절로 통한다' 등의 문구와 그림으로 주차장 한쪽면을 벽화로 장식,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는다. 몇걸음 옆 '도서관 가는 길 전통찻집 감사'란 찻집 간판은 '재밌고 착한 가게'란 느낌을 준다.
옛 경북고 본관 건물에 들어선 대봉도서관.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는 한낮이나 입구를 오가는 이들이 적잖다. 경북고 전신 대구고등보통학교 시절 적벽돌 건물은 리모델링해 갤러리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도서관 건너편 골목안 2층 건물의 중부교회는 어느 재벌가의 대저택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 잘 가꿔진 넓은 정원과 외관이 뜬금없이 부러움을 자아내게한다. 현 대봉동교회 자리에는 1959년 11월 붕괴사고로 신문지면을 장식했던 제일예식장이 있었다. 당시 결혼식 도중 2층 홀 일부가 무너져 하객 70여명이 아래층 피로연석으로 떨어져 4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옆 건물과 한눈에 구별되는 일제식 가옥도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다. 대봉도서관 건너편 일식 가옥을 리모델링한 카페 'Story Ville'. 나름대로 손님을 끌 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나 지금은 문을 내린 상태. 대봉2동 파출소를 돌아가도 일제식 가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현재 해동표구사가 사용하고 있는 2층건물.
청구맨션과 센트로펠리스 사이 도로가 의외로 한적하고 깨끗해 마음에 찬다. 주민 산책로로 제격일 듯 싶다.
번듯한 센트로펠리스 단지 안에 부조화같기도, 조화같기도 한 적벽돌의 2층 건축물. 옛 대구상업고등학교의 본관이다. 역시 문화재 건물인지라 80여년전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예총에서 사용할 계획을 잡고 있지만, 문화재가 민간단체 사무실로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신천제방을 따라 개설된 방천시장. 70~8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에서 나름대로 큰 규모의 전통시장이었으나 급속한 상권 위축으로 현재는 활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이곳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6·25전쟁직후 신문을 팔면서 '신문값 후불제'란 튀는 방식으로 판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시장을 독식한 일화를 갖고 있기도 하다.
동문 한사람 한사람 흔적 기록…역사관 설립후 한해 4천여명 찾아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강당
대구시 중구 대봉동 60번지. 경북대 사범대학 부설 중·고의 주소이다. 일제강점기 삼남(三南) 수재들의 교육요람이던 대구사범학교의 맥을 이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모교인 대구사범학교는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항일비밀결사 등 일제시대 대구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대구사범 학생들은 1938년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자 '민요집'을 발간해 우리말 보존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1940년 문예부와 1941년 연구회 및 다혁당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대구사범 학생들의 활동은 졸업 후에도 계속됐다. 1941년 비밀리에 내던 '반딧불'지가 발각되면서 졸업생과 학부모 등 300여명이 구속돼 갖은 희생을 치렀다. 1973년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 앞에 세워진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 추모비'는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장세파 등 독립운동 희생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2002년 등록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은 1923년과 1925년 세워진 유서 깊은 건물이다. 현재 역사관으로 활용되는 본관과 체육시설로 이용되는 강당의 담쟁이는 건물의 역사만큼이나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2004년 11월 문을 연 역사관은 동문 한 사람 한 사람의 흔적을 모아둔 공간으로, 국내외에서 한 해에만 4천여명이 찾는다. 한때 대구사범학교 본관, 경북대 사대부중 본관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72년 2월 화재로 12개 교실이 소실됐다 1979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원형대로 복구됐다. '역사관 안 또하나의 역사관'으로 자리잡은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 역사관 일부는 박정희 대통령 추모관으로 통할 정도로 자료가 많다.
경북대 사대부고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 수많은 기업가와 학자, 교육자, 행정가, 과학자들을 배출한 전통의 명문으로 우뚝 서있다.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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