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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알지 못하는 ‘북-중관계 끈끈한 속사정’ 있다

思美 2014. 2. 1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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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알지 못하는 ‘북-중관계 끈끈한 속사정’ 있다
2014 기획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① 연재를 시작하며
한겨레 노형석 기자기자블로그
한국전쟁 휴전 이후 중국을 첫번째 공식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만나는 김일성(오른쪽). 마오 뒤에 당시 2인자였던 류사오치가 서 있다. 1954년 9월 말, 베이징 중난하이.

2014 기획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① 연재를 시작하며

앞으로 7개월만 지나면 한-중 수교 22주년을 맞이한다. 국가원수들 간의 친분이 중요하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간 우리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뒤통수 맞는 일이 허다했다. “겉과 속이 달라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중국인들의 꿍꿍이속을 모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기야 1894년 갑오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쫓겨나고,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1세기 가까이 관계가 단절되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1992년 1월,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남방 순시에 나섰다. 광둥(廣東) 일대를 둘러본 덩샤오핑은 붉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70년 전 혁명의 중심지에서 개혁과 개방의 강력한 추진을 천명했다.

 

같은 해 8월,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체결식이 열렸다. 한-중 관계가 원만해지면 우리의 숙원인 남북문제도 잘 풀릴 것이라고 다들 믿었다.

 

갑자기 맺어진 한-중 수교는 양국 간에 많은 에피소드를 양산했다. 한-중 수교 이후 우리 대통령이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대학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이날 베이징대학 쪽은 방청석을 채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결국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인정했던 화가 장딩(張?)은 한국에 왔다가 3류 미술가 취급을 받았고, 대서예가 황먀오쯔(黃苗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초청을 받은 시골 서예가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시사만화가 딩충(丁聰)도 마찬가지였다. 딩충이 세상을 떠났을 때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조의가 잇따르자 우리 신문에도 보도된 적이 있었다. 한 시사만화가의 칼럼이 눈길을 끌었다. “시사만화의 역사가 짧은 중국에서 한 시사만화가의 죽음에 국가지도자들이 조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현실을 개탄한다”는 내용이었다. 딩충이 항일전쟁과 반기아운동, 국공내전, 반우파운동, 문혁 등 온갖 고난을 거치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자유주의자인 줄 알았다면 나올 수 없는 글이었다. 한때 중국의 온갖 유행어를 만들어낸 화가 황융위(黃永玉)는 대표적인 중국 연구자가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고 하는 바람에 전시조차 거절당했다. 한국에 오면 장구를 신나게 쳐보고 싶다던 황융위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랬을 리도 없지만 만에 하나 이들이 북한을 갔었더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엄청난 대접을 받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1992년 겨울, 김일성 회고록 중국어판 <여세기동행>(與世紀同行: 세기와 더불어) 1권이 중국에서 출간될 때 필자는 베이징에 있었다.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7년 전, 우리 대통령의 회고록이 베이징에서 출간됐다. 한-중 문화교류를 표방한 서울의 민간단체가 대기업의 후원으로 베이징대학에 저자의 이름을 딴 강좌를 개설했다. 참석자들이 없을 것 같자 당황한 주최 쪽은 학생회 간부를 포섭했다. 말이 포섭이지 매수나 다름없었다.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던 학생회 간부는 개최 당일 자취를 감췄다. 평소 연락을 주고받던 전화도 꺼버렸다. 당황한 주최 쪽은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자리를 메웠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1997년 겨울,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 칭다오(靑島) 출신 여성 공직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북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열일곱살 때 평양 유학생 모집에 응모했습니다. 당시 평양 유학은 장학금을 많이 주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의 선생님들은 훌륭했습니다. 우리를 정성껏 지도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 명문대학의 특수대학원에 다녔습니다. 선생님들에게 실망했습니다. 특수대학원이라 회식이 많았습니다. 회식 내내 골프 얘기만 해서 놀랐습니다. 서울은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북한에 관해서도 많이 물어봤지만 제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북한에도 이런 게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거기도 사람 사는 나라라는 말을 해주려다 참았습니다. 선생님들 모시고 중국 여행도 한 적이 있습니다. 충칭(重慶)에서 우한(武漢)까지 장강삼협(長江三浹)을 여행하는 배 안에서 아이스크림 얘기가 또 나왔습니다. 장강삼협이 어떤 곳입니까. 중국 문학을 찬란하게 수놓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이상은(李商隱) 등의 체취가 물씬 배어 있는 곳입니다. 이들의 시와 함께하지 않는 삼협 여행은 남미의 원시림 여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쓰촨성(四川省)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과 함께 두보초당(杜甫草堂)을 찾아갔습니다.”

 

 

1984년 10월28일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여연구(여운형의 딸·왼쪽 둘째) 일행을 맞이한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왼쪽 셋째).

 

 

1992년 한-중 수교 맺었지만
한국대통령 첫 방중 특강땐
방청객 동원 소동이 일었다
장딩 등 중국 문화의 대가들은
한국 와서 삼류 취급을 받았다

 

북한과 중국은 달랐다
1970년 김일성 방중때 마오는
국빈관 직접 찾아가 회담
92년 출간된 김일성 회고록도
중국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한국인들은 문화가 없다는 말도 했다. “문명의 이기를 맘껏 누리는 것이 문화인이라고 착각하더군요.”

 

맞는 말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과 중국 관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이름 석자만 대면 초등학생들도 알 만한 사람들의 실명까지 거론했다. 직접 경험했던 일들을 몇 시간 동안 그것도 아주 차분하게 얘기하는데 놀랐다.

 

가깝게 지내던 젊은 외교관 한 사람은 한국어가 유창했다. 북한 발령이 날까 봐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반도는 외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학생 시절부터 윤동주와 김소월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 근무할 때 김소월의 고향을 자전거 타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가기 전에도 그랬고 다녀온 후에도 며칠간 밤잠을 설쳤습니다. 식료품 구하러 단둥(丹東)을 자주 왕래했습니다. 국경을 넘을 때 북한 경비병들의 간섭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상납할 식료품을 따로 준비해야 돌아올 때 통과가 수월합니다. 외교관이라고 해서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간 큰코다칩니다. 해외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이 휴가 때 일시 귀국하면 본국 근무자들에게 저녁을 삽니다. 북한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정반대입니다. 얼마나 고생이 심하냐며 밥 사주고 술 사주면서 위로합니다. 장인은 저와 다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북한 근무야말로 국가가 너를 인정했다는 증거다. 그런 영광이 없다’며 제가 다시 북한에 발령 날 날만 고대합니다”라며 웃었다.

 

국제사회에서 명성을 떨쳤던 전 중국 외교부장 차오관화(喬冠華)의 부인도 유엔 부대표까지 지냈지만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남편이 한국전 휴전회담에 중국 쪽 고문으로 참석한 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남북이 왕래를 못하느냐며 한심해했다. 대신 남편에게 들었다며 남일이나 최용건, 김책 같은 사람들에 관한 얘기가 줄줄이 나왔다. 북한 영화를 본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문혁(문화대혁명) 시절 나는 마오 주석의 영문 통역을 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이 만리장성 가는 날도 수행했다. 닉슨이 중국을 떠난 다음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평양을 다녀올 정도로 북한과 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문혁 초기 북한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는 대자보가 전국에 난무했다. 한동안 냉담한 관계가 유지됐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1969년 외교정책에 변화가 일자 이내 관계가 회복됐다. 최용건이 눈 수술을 받은 김일성을 대신해 중국을 방문해서 환대를 받았다. 1970년 김일성이 중국에 왔을 때는 마오 주석이 직접 댜오위타이(釣魚臺: 베이징에 있는 외국 귀빈을 접대하는 국빈관)까지 가서 김일성과 회담했다. 이런 파격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김일성이 아니라면 어느 외국 국가원수도 불가능했다. 당시 중국에는 북한 영화가 유행했다. <꽃 파는 처녀>를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964년 5월 베트남 하노이 순방을 마친 류사오치(오른쪽) 일행에게 송별연을 베푸는 호찌민(왼쪽)의 모습이다.

 

 

1949년 10월1일 신중국 선포 후 수많은 외국 국가원수들이 중국을 방문했다. 다들 일정한 격식에 따라 환영식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베트남의 호찌민과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만은 예외였다. 다른 국가원수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환대를 받고 사적인 은밀한 관계를 나눴다. 뿌리깊은 인연 때문이다.

 

호찌민은 1920년, 30살 때 프랑스에서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베트남인 최초의 공산당원이 된 호찌민은 파리의 한 공원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소년공산당 당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젊은 시절부터 저우언라이, 차이허썬(蔡和森), 덩샤오핑 등과 교분을 쌓았다. 호찌민은 소련을 거쳐 광둥성 광저우(廣州)에 안착했다. 공식 직함은 코민테른(20세기 초 소련의 주도 아래 각국 혁명운동을 지원했던 국제 노동자 조직)이 광저우에 쑨원(孫文)의 고문으로 파견한 미하일 보로딘의 통역이었다.

 

광저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호찌민은 광저우의 레닌이라 불리던 보로딘과 같은 집에 살며 중국 혁명가들과 어울렸다. 언변이 뛰어나고 영어, 프랑스어, 러시어, 광둥어에 능했던 호찌민은 정치훈련반을 개설했다. 저우언라이, 리푸춘(李富春) 등을 강사로 초빙하고 자신도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으로 있던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푸군관학교 학생들에게 군사학과 정치학을 강의했다. 훗날 중국의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도 강의실에 자주 나타났다. 정변을 일으킨 장제스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국민당 정부의 13개 감옥을 전전하며 고초를 겪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2012년 10월15일 중국을 제2의 조국이라 부르던 전 캄보디아 국가원수 시아누크가 베이징에서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을 캄보디아로 운구하는 날 베이징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후진타오 이하 중국의 지도자 전원이 참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국의 지도자들과 오랫동안 친분이 두터웠다. 긴말할 필요 없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제일 중심가 도로명이 마오쩌둥로이고 그 양쪽이 김일성로와 시아누크로이다.

 

중국 지도자들과의 긴밀했던 관계를 파고들어가 보면 호찌민과 시아누크도 김일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4-01-06 오후 08:33:46 기사수정 : 2014-01-28 오후 11: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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